▣ 1969.2.2(일) 전본부교회. 나의 뜻과 신념.
- 제2차 세계 순회 노정 떠나기 전 집회.
▶ 어느 누구도 선생님이 어떠한 마음을 품고 다니는지 몰랐습니다.
022-117 원래는 선생님이 먼저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선포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아직까지 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종족에 대한 ···. 나에게는 사랑하는 부모와 8명의 형제자매가 있었고 사돈의 팔촌까지 합하면 상당히 큰 문중이었습니다. 그렇지만 ···.
더욱이나 우리 형님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계와 통했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될 것도 알았고 다년간 고생한 병도 한 한 번 안 쓰고 영적으로 치료받은 분입니다. 그 형님은 나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나에 대해서 깊이는 알지 못했지만 세계의 모든 사람 중에서 우리 동생이 제일이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내 말을 듣고 안 것이 아니라 영계에서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알았던 것입니다. 또 내가 말하지 않는 한 물어봐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형님은 선생님의 가슴에 품고 있는 깊은 무엇을 자기에게 얘기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셨습니다. 그 형님과 우리 부모님은 선생님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또한 선생님은 문중에서 논쟁의 대상이 됐습니다. 장래에 면이면 면에서 도면 도에서 잘 되면 무엇이 되고 못되면 무엇이 된다는 등 하여튼 말이 많았습니다.
이와 같은 평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님은 나를 위하여 말할 수 없이 많은 정성을 들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어머니께 손수건 한 장도 사 드리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됩니다.
지금도 농촌에 가게 되면 베 짜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여러분은 베 짜는 것 알아요? 우리 8남매 중에는 누이가 6입니다. 어머니는 이 여섯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서 온갖 고생을 하셨습니다. 내가 어디 갔다 돌아오면 어머니께서 베를 짜고 계실 때가 많았는데 그때 어머니와 함께 얘기하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보통 마흔 자 한 필을 짜는데 5일 정도밖에 안 걸렸습니다. 그러니 하루에 여덟 자 내지 아홉 자 정도를 짰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 베의 표면은 참 고왔습니다. 하루종일 베를 짜고 나면 얼마나 눈이 시리고 힘이 드는지 여러분은 모를 거예요. 그런 일을 우리 어머니는 수 십 년씩이나 하셨습니다.
옛날 농촌에서는 아들딸을 전부 장가보내고 시집보내려면 입고 갈 옷은 직접 목화를 재배하여 옷감을 만들어 지너 입고 가야 했기 때문에 손이 너무 많이 갑니다.
022-119 우리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서 온갖 희생을 했습니다. 나를 위해서 그 누구보다도 정성을 많이 들였습니다. 그런 어머니에 대해서 내가 자식노릇 제대로 못했다는 것입니다. 부끄럽습니다. 앞으로 어느 땐가 내가 이북에 가게 될 때에는 이미 만나 뵙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 아버지에 대해서 기도 한 번 안 해 봤습니다.
내가 요구하면 집이라도 팔아서 돈을 보내 줄 수 있는 그러한 형님인데도 불구하고 그 형님에 대해서 내가 통일교회 누구라는 이야기나 무슨 사상을 갖고 있다는 얘기를 한마디도 안 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에게도 얘기 못 해 줬습니다.
단 한 가지 그분들이 알고 있었던 것은 선생님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 그것은 알았습니다. 너무도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과 불의에 대해서는 참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자라면서도 동네에서 누군가가 자기가 잘산다고 해서 못 사는 사람들을 천대하는 것을 보면 그가 누구이든 간에 못 참았습니다. 그러니 동네 사람들도 나를 무서워했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언제나 먹을 것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엿을 사다 놓든지 떡을 하시든지 하셨기 때문에 언제나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고 있어서 내가 이것을 불쌍한 사람들에게 갖다 주곤 했습니다. 이렇게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신 부모님께도, 형에게도 선생님은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또 우리 동생들 중에는 나 때문에 희생된 동생도 있습니다. 내가 이 길을 가기 때문에 죽은 동생도 있습니다. 그것을 선생님은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왜정 때 감옥에 들어가 고문받고 있을 때 누이동생이 죽었습니다. 그건 순전히 선생님 때문에, 탕감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하늘의 역사는 반드시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 가정에서는 풍파가 많았습니다. 한 7년 동안 재앙과 풍파가 많았어요.
열세 식구 중에서 다섯 식구가 죽어 여덟 식구가 되었습니다. 거기에다가 개가 죽지, 소가 죽지, 형님이 미치지, 누나가 미치지···. 사탄의 활동 때문에 그런 역사적인 탕감을 치렀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가운데서도 섭리적으로 볼 때에 그럴 수밖에 없는 배후의 사연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선생님이 어떠한 마음을 품고 다니는지 몰랐습니다. 형님에게도 얘기 안 하고 부모에게도 안 했습니다. 그렇게 해방될 때까지 참고 나왔습니다.
해방되고 나서 선생님은 한국에서 한다 하는 신령한 사람은 다 찾아가서 만나 봤습니다. 그들을 만나서 영계의 사정을 물어보면 아무래도 그 사람들의 대답이 미흡하더라는 것입니다. 미흡未洽한 사람은 완전한 시대에 남아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앞으로 나가다가 전부 중도에서 포기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을 어떻게 타파해 나가고 새로운 기준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것을 놓고 학생 때부터 생각해 나왔습니다.
▶ 일본 유학
022-120 일본 유학시절에 선생님은 빈민굴에서부터 사창굴에 이르기까지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쁜 행동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창굴에 있는 아가씨들의 과거를 캐 보니 보통 사람의 과거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습니다. 사회 환경에 몰리고 그 흐름에 따라가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불쌍한 처지가 되기도 했고, 혹은 부모와 형제를 위하여 자기 일신을 제물로 삼았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비록 자기 몸이 버린 바 되어 거리에 밝히는 그런 여인이 될지라도, 쓸쓸히 사라지는 불쌍한 아낙네가 되더라도 자기 부모와 형제를 살리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하고 나섰다고 했을 때 그들의 손을 붙들고 통곡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도 순수하고 솔직한 인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선생님은 이런 비참한 인류의 해방을 위해 싸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별의별 인간들이 다 거쳐 나가는 그런 류의 생활 이면을 알지 못하고서는 큰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빈민굴 생활로부터 밥을 얻어먹는 일에 이르기까지 안 해 본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었고 하나님이 길이길이 세우고 싶었던 그 사연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해방될 때까지 기다려 왔습니다. 선생님은 해방의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1941년도에 일본에 유학을 가기 위해서 부산을 향해 서울역을 떠날 때 서울 장안을 바라보면서 불쌍한 이 민족을 누가 책임지겠는가를 생각하며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지금도 한강변에 가면 불쌍한 이 민족이 해방되는 한날을 위해 눈물 흘리며 붙들고 기도하던 그 바위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은 되었지만 이 민족은 아직도 불쌍한 민족으로 남아져 있습니다.
* 흑석동의 고갯길은 선생님이 많이 걸어 다닌 길입니다. 선생님이 학교 다닐 때는 전차를 안 타고 다녔습니다. 전차를 타고도 꽤 먼 곳이었지만 걸어갔다가 걸어왔습니다. 돈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흑석동 고개를 넘어갈 때 보면 길가에서 積善(동냥질에 응하다)을 바라며 행인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었었는데 전차를 타지 않고 남겨 두었던 그 돈을 주곤 했었습니다.
한 번은 그들을 붙들고 한없이 울어도 봤습니다. "부모가 있느냐?"고 물어보니까 "없다"고 하고 "형제가 있느냐?"라고 물어보니까 "없다"고 하는 그들 선생님이 그의 부모 형제를 대신해서 위로해 주지 못하는 것을 놓고···.
여러분들 중에 교회에 나올 때, 어떤 사람은 중앙청 쪽에서부터 혹은 종로나 동대문 쪽에서부터 남대문을 거쳐 걸어 나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선생님이 소년 시절에 오뉴월, 삼복지경에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걸어 다녔던 것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또 전차나 버스 혹은 택시를 타고 편히 오더라도 지난날 선생님이 이 나라, 이 민족의 한을 풀어주고, 이 나라, 이 민족이 하나님께 안길 수 있는 그날을 애타게 기다린 것과 같은 마음을 품고 나와야 합니다.
그런 심정을 누구한테도 얘기 안 했습니다. 말을 안 해도 아는 사람을 잘 알겠지만, 선생님이 학생시절에 기도를 할 때는 목이 메인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왜 그렇게 기도를 하는지 그 이유는 몰랐습니다.
20세를 전후한 청년이 목이 메어서 기도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은 "저 청년은 왜 저렇게 기도할까?" 하고 이상하게 여겼지만 거기에는 남 모르는 내적 심정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022-122 선생님이 어느 곳에 가든지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그런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 사정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동정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또 여러분이 선생님을 대하듯이 가는 곳곳마다 그렇게 대해 주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가 명절날 같은 때에 밤을 새워 가면서 준비한 그 상을, 혹은 남편을 위해서 준비한 그 상을 선생님 방에 갖다 주지 않고서는 안방에 들어가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냥 안방에 들어가게 되면 갑자기 눈앞에 캄캄해진다는 것입니다. 자기들도 왜 그런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낙네들의 정성 들인 그 음식까지도 선생님을 먹이기 위해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런 역사가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꿈에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천 번 만 번 이 몸이 으스러지고 뼈가 가루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나온 역사 과정에서 하나님은 선생님이 어떠한 자리에 가 있든지 함께해 주셨고 선생님을 위해서 그렇게도 수고를 하셨다는 것은 선생님 자신에 있어서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일본에 갈 때는 보통 부산에서 배를 타고 가는데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기차로 8시간 걸립니다. 나는 그때 기차를 타면서부터 오버를 뒤집어쓰고 통곡을 했습니다. 눈물이 끊이지 않아서 눈이 붓고 코와 입술이 붓도록 울었던 것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 이 민족을 위해 눈물을 흘린 것으로 말한다면 선생님은 어느 애국자보다 더 많이 흘렸습니다. 선생님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던 1941년 4월 1일 새벽 두 시에 부산 부두에서 한국을 바라보며 기도하던 것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비록 떠나지만 너를 더욱더 사랑하고 너를 위하여 더 많은 눈물을 흘려 주마"고 약속했던 것입니다.
022-123 일본에 가서도 굶주린 친구를 만나게 되면 선생님은 굶더라도 그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굶주린 苦學生(학비를 스스로 벌어서 고생하며 공부하는 학생.)을 만나면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습니다. 그들이 먹을 것이 없을 때에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주기 위해 학생복을 벗어던지고 부두 노동을 했고 석탄 짐을 지고 운반을 했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러한 젊은 동지들을 사랑하기 위해 싸워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나를 친한 친구로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선생님이 어떤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선생님을 친구 중의 친구라면서 자기의 비밀을 자백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실을 너한테만은 이야기하지 않으면 못 견디겠다"고 직고하는 동지들을 남겼던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또한 선생님이 일본의 궁성을 지나게 될 때 나라를 잃어버리고 민족을 잃어버린 한을 품은 외로운 사나이로서 그 궁성을 응시하면서 "이제부터 20년 후에는 하늘이 한민족을 중심 삼고 승리의 깃발을 꽂으실 그날이 오리라"는 것을 선생님은 이미 알고 하나님께 기도했었습니다.
"지금은 네가 우리 민족을 핍박하지만 앞으로는 반대로 내가 명령만 하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너를 향하여 이 궁성을 향하여 화살을 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그렇게 다짐했던 것이 25년 만인 1965년도에 이루어졌습니다.
* 선생님을 사랑하던 친구들은 전부 다 영계에서 데려갔습니다. 선생님과 가까운 사이의 사람들은 전부 다 데려갔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을 영계에서 데려갔는가" 하는 것을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이 그들과 사정을 나눌까 봐 그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을 책임지고 나가는 선생님이 그들과 사정을 나눌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사랑하는 누이동생도 데려갔습니다. 하나님은 선생님이 세상에서 관심을 갖는 모든 것은 모두 데려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선생님이 잘 알기 때문에 다른 길로 가려야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못나서 이러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겠어요?
022-125 선생님이 천신만고 끝에 찾아놓은 영계의 모든 비밀과 모든 내용은 보화 중의 보화요,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함께 나눌 수 없었으니 이것이 얼마나 한스러웠겠습니까?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어머니를 뒤에 두고 나설 때에 눈물을 머금고 마음속으로 "어머님, 이제 이 집을 떠나면 다시 만나 뵐 수 없는 길로 가게 됨을 용서하십시오" 이렇게 인사를 드리고 어머님과 헤어졌는데 선생님이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찾아오셔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 어머니께 위로의 말 한마디 해 드리지 못하고 도리어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어머니께 "졸장부 아들을 낳은 어머니가 되지 말고 대장부를 낳은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청천벽력 같은 호령을 하여 눈물을 그치게 했습니다. 이런 역사를 선생님은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생님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계의 수많은 선한 영인들이 선생님을 중심 삼고 그 어머니의 가치를 천 배 만 배 더하여 바라보고 있는데 일대의 혈육의 인연을 중심 삼고 눈물 지음으로 인하여 그 권위와 가치가 상실될 것을 염려하여 선생님은 무자비하게 어머니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처자식을 대해서도 자기 심중에 품은 말을 하지 못하는 불쌍한 사나이가 바로 통일교회 문선명 선생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선생님은 하나님의 이 엄청난 뜻을 알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모를 붙들고 형님 누나를 붙들고 처자를 붙들고 사정을 나누지 못했느냐는 것입니다.
▶ 1946.6.6 평양 도착.
선생님이 뜻을 위해서 Rucksack을 메고 처자를 떠나 눈물을 흘리며 이북으로 향하던 기억이 엊그제 같습니다. 그때 나는 친척들이 나를 원망할 것이요, 친지들이 원망할 것이요, 처자가 원망하면서 눈물 흘릴 것을 알고, 돌아서서 눈물 흘리며 대한민국을 이별했습니다.
그때 나는 "오냐, 6천 년 섭리 역사가 이렇듯 슬픔의 역사로 남아져 온 것을 알았으니, 그 해원을 위해 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리하여 다 싫다는 이북 땅을 향하여 떠난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해방을 그리워하면서 통곡하며 절규하던 그 사나이가 해방된 이 땅 위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북녘땅을 향하여 발걸음을 돌이키면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부디 남아져 달라"고 나라를 위해 기도했고, 삼팔선을 넘어설 때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기도했던 사실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하나도 죽지 말고, 하나도 망하지 말고, 하나도 배반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토록 동지들과 신도들에게 부탁을 했지만 선생님이 가고 난 후에는 모두 선생님을 원망했고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 남한 땅에 돌아오다.
남한 땅에 다시 돌아왔을 때 선생님을 원망하고 배반했던 그 무리들에게 아직도 하늘의 슬픈 역사의 사연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사연을 나누고자 찾아갔습니다. 그때는 명주 바지가 누더기가 되어서 선생님이 보기에도 형편없는 거지 중의 상거지 모습이었습니다.
022-127 어떤 집을 찾아 들어가니 세 모녀가 선생님의 면전에서 "그 길을 가지 말라고 말려도 가더니 결국은 거지 모양이 되어서 찾아왔다"고 서로 눈짓을 하면서 비웃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이 그 집을 찾아간 것은 밥이 그리워서 찾아간 것이 아니라 천적인 인연을 중심 삼고 같이 눈물을 흘렸고, 같이 사연을 나누었던 하늘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인연을 거룩하게 심었으니 심은 것을 거룩하게 거두어들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선생님을 맞이했더라면 선생님이 이북에 가서 해야 할 일들을 얘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생님을 보고 비웃었습니다. 그때부터 선생님은 그들과 상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그 집안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선생님이 누구보다도 잊을 수 없었던 동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업을 시작해서 회사를 설립했는데 장안에서 이름이 났습니다. 선생님은 일주일 동안 얼굴도 씻지 않고 이도 닦지 않은 상거지의 모습을 해 가지고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선생님을 어떻게 대하나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도 역시 선생님을 배신했습니다.
선생님은 대개 어떤 사람을 찾아갈 때 그 사람이 어떻게 대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찾아갑니다. 그때도 "틀림없이 넌 이렇게 대할 것이다." 하고 예상하고서 찾아갔던 것입니다.
가 보니까 없어요. 찾아갈 때는 아예 하룻밤을 지내고 오기 위하여 오후 늦게 상거지 모습으로 찾아가서 그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저녁 7시가 되어도 오지를 않았습니다. 해가 진 다음에 저녁밥을 먹고 기다렸는데 늦게서야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선생님에게 언짢은 표정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나이는 동지 앞에서 몰리고 쫓겨도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부모 앞에도 몰렸고 민족 앞에도 몰렸습니다. 나는 내 뒤에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벽이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참았습니다. 그러나 나를 몰다가는 걸려 넘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만난 그 자리에서는 "그동안 염려를 끼쳐서 미안하다."고 그저 도의적인 입장에서 얘기했을 뿐입니다.
선생님은 그때 내복도 안 입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방에 이불 한 채를 내주면서 "어쨌거나 왔으니 덮고 자라."고 했지만 그냥 그대로 그 옷을 입고 잤습니다. 선생님은 그때 거기에서 그를 염려하면서 기도를 했었습니다. 나를 박대하면 그가 7개월 이내에 어떻게 될 것인지 선생님은 그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그 집을 기쁜 얼굴 표정을 하고 들어갔다가 기쁜 얼굴 표정을 하고 나왔지만 배후의 하나님은 슬펐던 모양입니다. 그 역시 산산조각으로 다 깨져 나갔습니다.
선생님은 이런저런 별의별 곡절의 노정을 거치며 먼저 동지들을 찾아다녔던 것입니다. 남들 같으면 다시 남한 땅을 찾아왔으면 처자를 먼저 찾아가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만 선생님은 동지부터 찾아갔던 것입니다. 가까운 동지부터 찾기 시작해서 먼 동지까지 또 이북에서 선생님을 따르던 식구들을 비롯해서 선생님과 인연 된 동지를 찾는 데에 2년이 걸렸습니다.
여기 승도 할머니는 그것을 압니다. 내 처자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았지만 동지들을 모두 찾기 전에는 편지조차 할 수 없는 천적인 사연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 자취생활을 하면서 그들을 다 찾은 후에야, 찾고 찾아서 그들을 다 만난 후에야 집으로 연락을 했습니다. 하늘은 이렇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선생님이 목석같은 사나이가 아닙니다. 정적인 사람이요, 눈물 많은 사람이요, 동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 약한 친구를 괴롭힌 짓궂은 친구와 싸우다가도 그 친구의 옷이 찢어지면 선생님의 옷을 벗어 입히고서야 돌아섰던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악은 악대로 처리하면서도 그 처량한 신세는 동정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천정입니다.
선생님은 역사적인 사연을 품고 나오면서도 이러한 심각한 내용을 선생님과 제일 가까운 부모에게 얘기하지 못했습니다. 형님 누나 동생에게도 얘기 못 했습니다. 처자한테도, 친척들한테도 얘기 못 했습니다. 우리 동지들에게도 때가 되기 전에는 이것을 얘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 평양감옥
- 복중교의 허호빈 씨.
022-129 그러면 이 말씀을 누구에게 먼저 전했느냐? 해방이 되고 난 다음 원수들이 우글대는 이북 땅에서부터 이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씀 전파가 출발함과 동시에 원수의 총끝이 선생님을 겨누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감옥길로부터 출발했던 것입니다. 원수 앞에서 또 몰림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몰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공산치하에서 3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죽지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평양감옥에 들어갈 때에도 어떠 어떠한 사람을 만날 것이라는 것까지도 알았습니다. 선생님에게 어떠한 이 필요한 때는 영계에서 무지몽매無知蒙昧한 강도, 절도, 살인범 등의 수많은 죄수들에게 "아무 감방에 번호가 몇 호인 사람이 있으니 그분에게 어떤 것을 갖다 드려라" 하고 시키기도 하고 겨울이 되어 날씨는 추워지는데 선생님이 입을 옷이 없을 때에는 그들을 시켜서 옷을 갖다 주기도 했으며, 또 내가 먹지 못하여 배가 고플 때에는 난데없는 사람을 통해 선생님 이름과 번호를 가르쳐 주면서 먹을 것을 갖다 주었습니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평양감옥에 들어가면 누구누구를 만날 것을 알았기 때문에 희망 가운데서 4월 20일까지 지냈습니다. 그때 감방의 창가를 스치던 버들잎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던 것이 엊그제 같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거기서 하늘의 뜻을 따르기로 약속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과 만남으로 말미암아 거기 원수의 땅 제일 깊은 골짜기에서부터 하늘의 밀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늘의 병사를 모집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몰리고 쫓겼으니 감옥에서부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통일교회가 출발을 해서 이남 땅으로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 흥남감옥에서 나오다. 1950.10.14
이북에서 유엔군이 제일 먼저 상륙한 곳이 흥남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바쁘게 구해야 할 한 아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공산당은 그 전전날 한 감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밥을 준다고 꼬여서 전부 데리고 나갔습니다. 이 사람들은 죽이려고 그러는 줄은 모르고 밥을 준다 하니까 그것을 얻어먹겠다고 서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벌써 그것을 알았습니다. "너희들은 마지막 길을 가는구나! 그렇지만 난 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너희들은 다 죽더라도 난 죽지 않는다. 어떠한 참사의 비운이 거쳐가는 자리에서도, 총살을 당해 쓰러지는 자리에서도 난 결코 죽지 않고 살아남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해 10월 12일 형기가 7년 이상인 죄수 한 70명 정도를 30리쯤 산속으로 끌고 들어가서 전부 죽여 버렸습니다. 그 당시 선생님의 형기는 5년이었기 때문에 그 다음다음 날이 내가 끌려갈 차례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바쁘셨을 것입니다.
13일 밤거리를 내다보니 벌써 사태가 달라졌습니다. 유엔군이 흥남에 상륙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산군들은 보따리를 싸기가 바빴습니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10월 14일 공산군이 물러가자 우리는 감옥에서 빠져나와서 이남으로 내려왔던 것입니다.
▶ 이대 연대 사건과 서대문 형무소.
* 이화여대 사건 때 김활란과 박마리아가 주동이 되어 경무대에 가서 거짓 증언해 가지고 4개 부처 장관을 움직여서 통일교회를 없애 버리고 나를 완전히 매장하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안 죽었습니다. 안 죽어요! 세상의 어떠한 일이 부닥쳐 오더라도 안 망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1955년도에 있었던 7.4사건 알지요? 내가 원숭이띠라서 감옥살이를 많이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 서대문 형무소 소장이 기성교인이었는데 대뜸 "임자가 문 아무 갠가? 한 달은 구류받아, 이 자식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돼먹지 못한 사람에게 농담 삼아 한마디했습니다. "이 자식이 뭐야? 당신은 이런 것을 해먹었군" 하니까, 가슴이 찔렸는지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자식아, 가만히 있어"라고 했습니다. 이런 돼먹지 못한 사람이 선생님의 가슴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정도 지나서 그렇게 못되게 굴던 형무관들은 선생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듣게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물을 갖다 달라" 하면 떠 올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선생님이 때려서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대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022-131 여러분 지금은 이곳에 아무나 와서 앉아 있지만 옛날에는 절대 아무나 못 들어왔습니다. 선생님은 무서울 때도 있었습니다. 경찰이 들어오려고 문 앞에 와서 문을 두드릴 때 "무엇하러 왔느냐"고 호통을 치며 쫓아낸 적도 있습니다. 그들은 종의 자식이기 때문에 그렇게 다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딸에게는 정도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통일교회를 괄시받게 하고 그러한 사건을 만드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전부 "文" 家입니다. 지금 통일교회를 깎아먹는 문 장관, 이 사람도 "文" 家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집안 식구가 원수"라 했는데, 이 "文" 家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文" 家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文" 家가 아니라 "統" 家입니다. "統" 家.
여기에선 김 씨 성을 가진 사람 있습니까? 너무 많습니다. "統" 家가 하나밖에 없다면 유명해질 것입니다. 만약 그 아버지가 자기 아들딸에게도 절대로 "統" 家가 되고 선생님은 天地가 된다면 "하늘땅, 天地人"이 되기 때문에 天地가 통일될 것이다, 나 그런 생각도 해 봤어요.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은 피로하니까 한번 웃고 넘어가자는 뜻에서 한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해 나오면서 왜 자기 부모나 처자에게는 차마 말을 못 했느냐? 하나님의 뜻은 자기의 혈육만을 중심 삼고 자기의 가정만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사랑하는 자식을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의 섭리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자기 처자를 먼저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은 가짜입니다. 천법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자기를 사랑하는 무리들만 사랑했다면 오늘날처럼 세계적으로 기독교가 발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4천 년 만에 비로소 이 지상에 둘도 없는 사랑의 실체로서 보내진 하나님의 아들이었는데, 하나님은 악당의 무리와 원수의 자식들을 살리기 위하여 대신 자기의 아들을 희생시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리라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유대 민족은 지금까지 나라 없는 민족으로 세계에 유리방황하는 민족이 되었지만 그들은 쫓기고 몰리고 밟히면서도 세계의 문화권을 창설하는 데에 공헌했습니다.
*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딸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인격자가 아닙니다. 자기편의 사람만 사랑하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 못 됩니다. 하나님은 원수의 자식을 자기 직계의 자식보다도 더 사랑하셨다는 그런 입장에 섰기 때문에 사탄도 그 앞에서는 머리 숙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탄도 자기 자식들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랑해 주시니 그 사랑 앞에 머리 숙여야 할 기준이 결정된 것입니다.
그러한 도리의 내용을 안 예수님은 죽으시면서도 원수들을 위해 "저들이 알지 못하여 저러니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예수님이 천정의 인연과 천정의 전통을 이어받고 천정의 핏줄을 통해서 태어난 아들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의 슬펐던 역사적인 사연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그런 운명의 자리로 내보낸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하늘 뜻 앞에 드려질까를 생각했습니다.
민족과 세계로부터 조롱받고 몰리면서도 원수의 무리를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뜻 앞으로 돌이키기 위해서 누구보다도 사랑해 주었습니다. 사랑할 뿐만 아니라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내 아들과 딸이 있거든 그들에게 어떻게 원수들을 위해 내 대신 축복해 주고 내 대신 사랑해 달라고 유언을 남길 것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소원이요, 그럴 수 있도록 길을 닦아 나온 선생님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운명의 판결 ▣ 1970.4.20(월) 전본부교회 - 제2회 777 가정 축복 대상자 특별 수련. (0) | 2025.01.09 |
---|---|
가정과 세계 평화 ▣ 1998.6.11(목) 뉴욕 월돌프 아스토리아호텔. (0) | 2025.01.09 |
세계 평화로 가는 길 ▣ 1991.8.28(수) 리틀엔젤스 예술회관 - 세계평화연합 창설 대회. (0) | 2024.12.18 |
하나님의 뜻과 미국 ▣ 평화경 1334. 1976.9.18. 워싱턴, D.C. Washington Monument Plaza. (3) | 2024.12.18 |
제4회 전도사 수련회 개회식 ▣ 1960.11.11(금) 전본부교회. - 손이나 눈이 잘못하면 그것을 제거하라고 하였다. 이것이 가능할 때 힘이 난다. (0) | 2024.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