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헌 李相軒 先生
- 1914.9.5 함경남도 정평 출생
- 1940.3 세브란스 의전 졸
- 1956.5 통일교회 입교
- 1968.2 새 공산주의 비판 발간
- 1973.6 통일사상 요강 발간
- 1975.4 2대 승공연합 이사장.
- 1981.9 4대 승공연합 이사장.
- 1986.11 6대 승공연합 이사장.
- 1991~1997 세계일보 부회장. 주필. 사장.
- 1997.3.23 성화.
● 세브란스 의전 연혁
신촌 세브란스 병원은 조선 말기 1885년에 개원한 광혜원 (廣惠院)을 기반으로 한 종합병원으로서 미국인 사업가 세브란스의 기부로 1904년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종합병원이다. 즉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병원이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 내에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가 설치되어 한국의 서양 의학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으며, 1957년에 세브란스 의과대학이 연희대학교와 통합하면서 연세대학교가 출범하였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이 되었다.
1885년 :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견된 앨런 박사에 의하여 광혜원 설립 (서울 종로구 재동)
1885년 : 제중원으로 개칭
1886년 : 최초의 의학생 선발
1904년 : 도동에서 제중원을 기반으로 한국 최초의 종합병원, 세브란스 병원 설립
1909년 : 사립 세브란스 의학교로 교명 제정
1917년 : 사립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 인가 - 조건부 10년 기한의 인가
1923년 :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재인가
1942년 : 아사히 의학전문학교로 변경(적산재산몰수정책에 의하여 교명 변경)
1945년 :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명칭 회복 복권
1947년 : 세브란스 의과대학으로 승격
1957년 : 연희대학교와 통합되어 연세대학교로 개명
1967년 : 치과대학 설치
1968년 : 간호대학 설치
1978년 :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원주분교 설치
1983년 : 영동병원 개원, 용인 및 광주분원 개원
1991년 : 세브란스병원 심장혈관센터 개원
1993년 : 광주 세브란스병원 폐쇄
2008년 : 영동 세브란스 병원이 강남 세브란스 병원으로 명칭 변경
2009년 : 대한민국 최초 존엄사 시행
* 나는 유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나의 아버지는 유교 학자였었고 3.1운동 때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서 5, 6개월 감옥생활도 한 일이 있었다. 그때 나의 나이는 만 5세였다.
* 아버지는 그때 일본 사람을 크게 미워하면서,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기 시작할 때 한국의 고종 황제는 화란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국제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 일본의 침략이 불법적이라는 것을 폭로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일본이 妨害했기 때문에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밀사인 이준 선생은 그 자리에서 자살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이런 식으로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민족적 교육, 반일 교육을 시켰다. 그리하여 나는 어렸을 적부터 반일 사상이 굳어졌던 것이다.
* 10살 때 보통학교 (소학교)에 들어갔다.
* 16세 때 고등보통학교 (지금의 중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갈 때 광주 학생사건(1929년 11월 3일. 10월 30일 나주역에 도착한 통학열차에서 내린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인 박기옥, 암성금자, 이광춘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였다. 일본인 학생 50명과 한국인 학생 30명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양 11월 3일은 메이지 천황 탄생의 날인 명치절, 음 10월 3일은 개천절,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 이 일어났다.
* 그때 나도 그 학생 그룹에 끼어서 전단지를 뿌리고 데모를 하곤 했다.
* 그런데 그 운동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쌍방에 의해서 지도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내막을 전연 몰랐던 것이다. 슬로건이 일본을 반대하는 반일이었기 때문에 나도 그 데모에 참가하였다.
* 나는 공산주의나 민족주의가 같은 것같이 느껴져서 공산주의에 민족의 살 길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민족을 구하는 것은 공산주의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 나는 항상 반일 감정에 타올라서 스트라이크 때마다 참가했기 때문에 퇴학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학교에 보결 시험을 쳐서 입학하였다. 그리고 그 학교에서도 또 좌익운동을 했다. 또 퇴학을 당했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에 나는 몇 차례 체포되어서 심한 고문을 받았다.
* 그 당시 "세계에서 제일 酷甚혹심한 고문을 하는 일본 경찰"이라는 평판이 돌았다.
* 처음에는 16, 17세 경에 체포되기 시작했는데 나는 25, 26세쯤 되면 죽을 것으로 생각했다.
* 민족이 독립하는 길은 지도자에게 있어서는 죽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자기의 몸을 막대기로 쳐 보면서 얼마나 고문을 이겨낼 것인가를 시험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심각했던 것이다.
* 나는 공산주의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공산주의 책을 열심히 읽고 자본주의 사회의 결점이나 문제점을 잘 이해했다. 그리하여 반일적, 투쟁적이 되었다. 그 때문에 나의 이름은 일본 형사의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 나는 서울에서 하숙생활을 하고 있었다. 형사가 1주일에 한 번, 두 번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 불온 문서나 서적이 있지 않나 조사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 보결로 들어간 학교는 보성고등보통학교였다. 교장이나 선생이나 모두 민족주의자여서 나같이 다른 학교를 중퇴한 학생을 기꺼이 받아 주었다. 거기에서도 체포되어 몇 달간 유치장 생활을 하고 석방되었다.
* 보성고등보통학교를 25세에 졸업, 세브란스 의과대학에 들어갔다.
* 나의 심경은 21세쯤부터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나의 마음에 있었던 것은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애와 인류애였다. "민족을 위하여 싸우다가 죽자! 인류를 위하여 싸우다가 죽자!" 이런 座右銘을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민족애란 무엇인가? 인류애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도대체 어디서부터 오는가?"라는 의문이 생기게 되었다.
* 공산주의의 유물론에 의하면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원숭이가 진화할 때 민족애나 인류애가 어떻게 진화과정에서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가 나의 마음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민족애나 인류애의 당위성이 논리적으로 밝혀지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끝까지 싸울 용의가 있지만 사실은 싸울 필요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과연 정당한 길인가?" 하는 의심이 나의 마음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 민족애, 인류애는 유물론에서는 나올 수 없었다. 동물에게도 사랑은 있지만 자기의 생명을 희생까지 하면서 다른 동물을 살린다는 일은 없다.
*사랑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가? 이것이 유물론에서는 해결되지 않았다.
* 결국은 공산주의를 버리게 된 것이다. 인간을 동물로 규정하고 있는 공산주의는 잘못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사랑의 근원을 찾기 위하여 종교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기독교 불교 유교, 여러 가지 사상과 철학 등이 있었지마는 이들의 교리는 이 문제에 대한 바른 해답을 주지 못했다.
* 무엇을 보든지 의문이 생긴다. 새를 보면 새는 왜 사는가, 벌레가 기어가는 것을 보면 벌레는 무엇 때문에 살려고 하는가? 산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의가 있는가? 거지를 보면 왜 거지가 되었으며 거지가 되면서도 왜 살려고 하는가? 인간은 어디서부터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 생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밤하늘을 보더라도 별은 왜 있는가? 우주 가운데 지구는 대단히 작은데 작은 지구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상으로 더욱더 작은 인간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 동물이 진화한 것이 인간이라 한다면 인간에게도 존재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닌가? 어찌하여 남성과 여성, 암컷과 수컷이 있는가? 가정을 보면 가정에는 비극이 너무나 많다. 부부가 된다는 것, 결혼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결국은 비극을 낳기 위한 결혼이 아닌가?
* 나는 형이 둘 있다. 두 형 모두 16세에 결혼했다.
* 21세 때 인생을 번민하고 있을 때 아버지께서 결혼 문제를 다시 꺼내셨는데 결혼의 불필요성을 고집하며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강력히 반대했다.
그때 이후로는 나는 공산주의를 버린 때였기 때문에 그 시기는 나에게 암흑기였다. 바로 지옥과 같은 기간이었다. 자살을 기도한 때도 가끔 있었다. 산다는 것이 정말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항상 주머니에는 수면제가 들어 있었다. 언제든지 필요하면 약을 먹고 죽어버리려고 하였던 것이다.
* 그때에 "인생에는 무언가 있다! 내가 고통하는 그 사실이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죽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좀 더 죽는 것을 보류하고 "살아 보자"는 생각이 나의 생명을 연장시켜 왔던 것이다. 그럭저럭 하여 대학에 들어갔다.
* 대학에 들어가서부터는 심경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나를 사랑해 주던 부모가 대단히 불쌍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때까지 내가 부모에 대하여 너무 불효를 하여 미안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부모를 위로하여 준다는 의미에서 결혼을 하였다.
* 종교나 철학의 무력함을 개탄하고 있을 때 일본의 신흥종교 生長の家의 "생명의 실상"이라는 책을 읽고 의외로 많은 문제가 해결되었다.
*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거기에는 역사관이 없었다. 공산주의에는 역사관이 있기 때문에 항상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반드시 공산주의 사회가 미래에 온다고 하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정열을 불태우면서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 生長の家는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고 하는 희망을 주는 것이었다. 하나의 문제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장래 일본 천황 중심으로 세계를 통일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점만은 결단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 生長の家의 교조인 谷口 선생은 항상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재림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딸로 보고 경배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을 나는 대단히 좋은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서 정말로 사람을 진심으로 경배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 얼마 안 가 일본은 대동아 전쟁에서 패배하였는데 生長の家의 월간잡지가 폐간되었다. 출판하려고 해도 종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호에 谷口 선생의 권두언을 썼는데 "잡지는 이제 출판할 수 없게 되었지만 여러분의 신앙은 결단코 잃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권두언 중에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재림한다"고 하는 구절이 적혀 있었다. ··· 이것은 나에게 대단히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전하고 한국은 해방되어 1948년 8월 15일에는 국토가 양분된 채로 대한민국의 정부가 수립되고, 완전히 독립하였다. 그때에 나는 충북 영동에서 개인 병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 1950년 6월 25일 북괴군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벌어졌으며 국군의 후퇴에 따라서 나는 가족을 촌에 소개시키고 홀로 부산으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새로 설립된 경찰병원 내과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유엔군의 도착과 더불어 북진이 개시되어 9월 18일 서울이 수복되었는데 나는 잠시 서울에 왔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다시 후퇴하자 나도 다시 남쪽으로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영동에 들러서 가족을 데리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그곳에 거처할 곳을 구하지 못해 부산에서 30리 떨어진 장림리라는 조그마한 촌에 방을 얻어서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 거처하면서 경찰병원에 다녔다.
* 1951년 2월 갑자기 장티푸스에 걸려서 중태에 이르게 되었다. 여러 날 고열에 심한 장출혈로 2월 하순 어느 날 정신을 잃고 실신상태에 빠졌다. 실신되기 직전 나는 대량의 장출혈로 쓰러졌는데 그때에 나는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아내를 급히 불러서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하였다.
그리고 가물거리는 정신을 겨우 가다듬어 가면서 기도를 하였다. "하나님이시여, 저를 살려 주십시오. 단 몇 해라도 살려 주시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보려고 합니다" 이런 기도했는데 그때 나의 몸이 공중으로 떠 올라가는 듯하더니 다시 내려앉는 것이었으며, 그리고는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나 "이 선생!" 하고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떠 보니 경찰병원 내과 과장이 간호원 두 사람과 과원 몇 명을 데리고 와서 나의 오른편 팔에 "폴리스마"라고 하는 영양주사를 놓고 있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내가 나의 유언을 듣고 사태가 위급함을 깨닫고 그곳에서 10리 떨어져 있는 면 사무소에 허둥지둥 달려가 병원에 전화해서 달려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간호원과 과원이 여러 명 온 것은 내가 운명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의 얼굴을 보고 슬퍼하는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 그 후 나의 병세는 호전되어 3월 하순에는 드디어 보행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때 아내를 다시 불러 "내가 유언까지 했다가 이렇게 나온 것은 하나님이 나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나를 낫게 해 준 것이니 이제부터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할 것인즉 가사나 아이들의 교육 등은 나에게 의지하지 말고 고생되겠지만 당신이 전적으로 책임져 달라"고 엄숙히 말했던 것이다. 아내는 내가 나아준 것만도 고마워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후 나는 이영춘 박사가 운영하는 전북 군산시에 있는 농촌 위생연구소의 부속병원의 내과과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것은 불쌍한 농민들의 보건을 위해서 세워진 병원이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1953년에는 원장이 되었는데 그다음 해인 1956년, 나의 연령이 43세일 때 전도되어서 통일교회에 입교하게 되었다.
* 나는 그때까지 의업에 종사하고 있으면서 경제는 제2의 문제로 하고 인생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언제나 간절하였다.
* 신문을 보면 그 당시 통일교회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 그 평판이 나왔을 때에 나는 도리어 통일교회에 들어오게 되었다. 내가 신문을 볼 때 "소문이 문제가 아니고 가르침 그 자체가 진리인가 아닌가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나를 인도한 사람에 이끌려서 통일교회 본부에 안내되어서 유효원 협회장으로부터 원리를 듣게 되었다. 나는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말도 당신이 들어주시오!" 하면서 유 협회장이 5분쯤 말하면 내가 거기에 대해서 내 말을 꺼내곤 하였다.
이렇게 해서는 강의가 진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협회장은 "이 선생, 잠깐 내 말을 들으시오. 이선생도 종교에 대하여 상당한 견해를 가지고 있으신 모양인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여기에 오셨습니까?. 통일원리를 일단 들어보려고 온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일단 그렇습니다"
"그러면 전부 다 들어보십시오. 들어보시고, 그다음에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하시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합시다."
그날 밤 3시까지 원리를 들었다. 그 후 수일간 통일원리를 처음부터 복귀원리까지 3차례나 들었다. 그 당시에는 원리강론이라는 인쇄된 책은 없었고 100페이지쯤 되는 노트에다가 펜으로 원리를 필기한 것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식구들이 그 노트를 필기해서 보배처럼 가지고 다니는 경전이었다.
나도 그것을 빌려서 열심히 읽고 필기하였다. 원리는 대단히 내용이 좋은 것이었다. 나는 인생의 문제점을 많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한 가지를 듣고도 열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원리를 3일쯤 듣고 나니 대부분의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었던 것이다.
나는 공산주의의 유물사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원리에 특별히 역사관이라는 타이틀이 쓰여져 있는 것이 아니지만 복귀원리를 들었을 때 이것이 통일원리의 역사관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 나의 기쁨은 비길 데 없이 컸다. 너무나 기뻐서 남이 보지 않는 데서 춤까지 췄다. 그래서 드디어 입회를 결심했던 것이다.
* 아직도 사소한 문제들은 원리만으로서는 충분히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님을 직접 뵙고 질문을 하였다. 선생님은 방에 여럿이 있을 때에 전체를 향하여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지만 내용은 나의 질문에 대한 해답의 내용일 때가 가끔 있었다.
* 예컨대 수수작용에 관하여 질문한 데 대해서 상세한 해답을 주시는 것이었다. 그때에 수수작용에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나중에 체계화한 것이 오늘날 통일사상 안에 있는 수수법의 제1형 제2형 제3형 제4형 제5형으로 되어 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받았는데 나는 "이분이 이렇게도 훌륭하고 차원 높은 사상을 가지신 분이구나" 하고 항상 감탄하였다. ··· 이와 같이 해서 개인지도를 가끔 받곤 하였다.
* 설교 말씀을 하실 때에 설교 말씀이 민족이나 인류에 미치게 될 때 또는 박해와 고통을 당한 의인들에 대하여 말씀이 미치게 될 때 그들의 불쌍함에 참을 길이 없어서 통곡하시는 것이었다. 또 6천 년 동안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수고해 오신 하나님을 붙들고 통곡하시는 모습도 가끔 뵈었던 것이다. 역사상 가장 비참하고 슬픈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선생님을 통하여 깨달았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선천초목 등 모든 만물에도 고통과 슬픔을 느끼시고 이들을 붙들고 슬퍼하시는 것이었다.
천상천하에 꽉 차 있는 이 참상, 비극은 인간의 타락 때문이었다. 그래서 민족을, 인류를, 만물을 더 나아가서 하나님까지 구하기 위해서 전 생명을 바쳐서 수고하시는 분이 선생님이셨다.
이와 같이 나의 눈에 바쳐진 선생님의 모습은 이 세상의 인간의 모습은 아니셨다. 이분은 한없는 지혜의 보고를 가지시고 한없는 연민의 사랑을 품고 계시는 성자이시며 하나님이 受肉하여서 인간을 구하기 위하여 나타나신 메시아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마음속 깊이 결심한 바가 있었는데 이분의 사상을 체계화하여 세계에 넓히겠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이분을 전 인류 앞에 메시아로서 증거하기 위해서였다. 나처럼 고민하는 입장의 인간이 이 세계에 얼마든지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사람들을 빨리 구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 그 당시 통일원리를 배워 보니 통일교회는 다음과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출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 성서의 미해결의 문제를 밝혀서 기독교의 각 교파를 통일하기 위해서.
2) 모든 종교를 통일하기 위해서
3) 종교와 과학을 통일하기 위해서
4) 모든 사상을 통일하기 위해서
5) 모든 문화를 통일하기 위해서
6) 지상세계와 영계를 통일하기 위해서
* "선생님께서는 절대로 개인에 대하여 명령하시지 않는다." 이것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김 아무개에게 명령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집회나 예배 같은 때에 여럿을 향해서 "통일식구들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일괄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왜 그러냐 하면 직접 명령하는 것은 작접주관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직접 명령하면 그 사람이 그 명령대로 행하면 좋지마는 만일 행치 않을 때에는 그것이 조건에 걸린다는 것이다. 즉 하늘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조건에 세워져서 한평생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래, 회개해서 좋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 영적인 이력서상에 하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汚點이 남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본인을 위해서도 직접주관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 一例를 말해 보겠다. 어떤 대학 교수가 입교했는데 어느 날 밤 선생님께서는 유리컵에다 밀가루를 가득 채워 넣고 그 위에다 물을 붓으셨다. 당연히 물은 밖으로 모두 흘러버리는 것이었다. 왜 선생님께서는 그와 같은 일을 하실까? 그릇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으면 다음부터는 다른 것을 넣을 수가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진리를 받고 싶으면 마음을 전부 텅 비워야 한다. 마음을 텅 비우지 않고 자기 지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 아무리 훌륭한 하늘의 진리라 하더라도 들어가지 않는다.
* 1958년 나의 입교지인 군산에 순회 오셨을 때 7, 8명의 식구들이 모인 가운데서 "미래에 통일주의 시대가 온다. 통일사상 시대가 온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 그런데 내가 입교한 이래 약 6년 동안 선생님께서는 전연 반공이니 승공이니 하는 것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셨으므로 나는 이분은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오신 순수한 기독교 지도자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반공, 승공 지도자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반공이라는 말씀을 한마디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 자신도 공산주의 운동을 한 바 있는 자기의 과거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할 필요가 없었고 또 말하지도 않았다. ··· 자기의 과거는 완전히 망각한 상태에서 다만 신앙생활만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 그러던 차에 1960년 선생님의 탄신일 축하회에서 선생님은 많은 식구들에게 간증을 하라고 명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저에게는 부디 간증을 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이렇게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남의 간증을 듣는 것은 유익하고 필요하지만 자기가 간증하는 것은 뭔가 자신을 자랑하는 것 같아서 나의 성격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오전은 아무 일도 없이 지났기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오후에 다시 모였는데 갑자기 부르시더니 나에게 "21일 금식(1959.12.1~21)에 대한 간증을 하라"는 것이었다. "기도도 소용없구나" 생각하면서 간증하였다.
* 21일간 금식은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기 위해서 어떤 식구의 권고에 따라서 한 것이다.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설교 때마다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 같은 비판적인 인간은 금식기도를 하지 않으면 특히 담판기도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남들이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사적으로 금식을 감행했던 것이다.
* 그런데 그날 밤 또다시 나오라고 하시는데 이번에는 "과거의 공산주의 운동을 간증하라"는 것이었다. 도대체 내가 공산주의 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큰 의문이었다. 그리고 어째서 선생님께서 나에게 그런 간증을 시키는가도 의문이었다. 왜냐하면 "선생님께서는 절대로 섭리에 관계되지 않은 일은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선생님에 관하여 많은 것을 연구해 보니 선생님은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말씀하고 행동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 "선생님에게 있어서는 섭리적으로 뜻이 없는 무의미한 말씀이나 행동은 하나도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얻은 결론이었다. 그러므로 나에게 간증을 시킨 이상 뭔가 섭리적인 의의와 내용이 있을 것인데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 그 후 2년이 지난 1962년 같은 탄신일 전날 밤이었다. 밤 12시가 되어서 탄신일이 되었는데, 그때 선생님의 말씀이 시작되었다. 1시, 2시 사이인 줄로 기억되는데 36가정을 모아 놓고, "이제부터 간부들은 공산주의 이론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때에 나는 처음으로 선생님에게도 반공적, 승공적 측면이 계셨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나는 대단히 놀랐다.
* "종교가로서 과연 공산주의자들을 미워해야 될 것인가?"라는 생각을 평소에 늘 갖고 있었다. 원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역사의 종말기에는 반드시 가인 아벨의 대립관계가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선생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지상에 실천하실 분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까지라도 반드시 사랑하실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지상에 펴기 위해서는 不得不 공산주의와 싸우지 않을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고로 공산주의자에 대한 사랑의 문제와 공산주의 이론과의 투쟁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다. 이렇게 스스로 정리했던 것이다.
* 공산주의 이론 비판에 관한 집필을 개시하려고 하였지만 공산주의에 관한 서적이 하나도 없었다. 한국은 그 당시 5.16 혁명이 일어나서 반공이 제1국시였으며 공산주의적인 요소를 일체 용납하지 않은 때였기 때문에 공산주의 서적은 좀처럼 구하기 어려웠다.
* 유 협회장님께 부탁해서 일본에 있던 한상길 선생을 통해서 모리스 컴퍼스의 <유물론과 변증법>, <유물사관>, <인식론> 등을 구할 수가 있었다. 그것을 읽고서 승공 이론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 1962년 12월 선생님께서는 대전에 오셨는데 그때에 반공 이론을 구상 중에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더니 "빨리 써서 책으로 내라"고 명령하시는 것이었다.
* 1963년 8월 1일 본격적인 집필을 시작하여 1964년 3월 20일 탈고했다. 그리하여 3월 24일 원고를 선생님께 바쳤던 것이다.
* 선생님께서는 유광열 문화부장에게 명령하셔서 출판의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결국 1968년 <새 공산주의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 여기까지 오는 데는 일이 간단치만 않았다. 통일원리가 아무리 위대하다 하더라도 역사에 나타났던 많은 사상 가운데 제일 우수하다고 보이는 공산주의의 사상체계를 비판하고 대안까지 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 내가 병원을 하고 있었지만 환자는 제2의 문제였다. 가게를 유지하려면 환자가 많이 오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집필에 몰두할 때에는 환자가 오는 것이 귀찮았다. 그만큼 이 작업이 제1차적이었던 것이다.
* 그때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성지에 다니곤 하였는데 그 성지에 가서 일심전력으로 기도하여서 문제점이 해결된 때가 가끔 있었다. 그래도 알 수 없을 때에는 서울에 가서 선생님을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다.
병원을 하면서 서울에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 선생님께서는 항상 바쁘시기 때문에 갔다 하더라도 단독으로 조용히 배운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지만 어렵게 뵈어서 말씀드리면 시간을 내셔서 여러 가지로 상세하게 답변을 해 주시는 것이었다.
* 1972년 8월 일본에서 韓日 교수 친선세미나가 있을 때에 선생님의 명령을 받고 참가하였다. "일본에 가서 일본 간부들에게 통일사상을 전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강의는 존재론, 본성론, 인식론, 가치론, 윤리학, 교육론, 역사론, 예술론 등을 강의하였다. 논리학도 그때 골격이 되어 있었지만 강의는 하지 않았다.
* 1973년 3월 말 집필을 완료하고 6월 1일 <통일사상 요강>을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 1979년 11월 4일 한국의 간부들이 모인 합동회의 석상에서 "전 세계의 통일식구는 모두가 통일원리, 통일사상, 승공이론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공식적으로 지시하셨다.
▣ 1998.4.27(월) 이스트가든.
- 미국 지도자 회의.
292-318 여러분, 이 이상헌 씨는 통일교회에서 기도도 많이 하고 공부도 많이 한 사람입니다. 신앙길에서는 참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자기가 지금까지 배워서 많이 알고, 많은 종교 배경도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런 콘셉트도 없이 순수한 자리에서 언제든지 신앙길을 개척하려고 했던 인격자였다는 걸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이 통일사상이라든가 승공연합의 이론 체제를 만들라는 책임을 줬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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