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석동
- 151번, 5524번 버스를 승차하여 흑석동에서 하차하거나 지하철 9호선 흑석역 (중앙대 입구역)에서 내린 후 도보로 이동하면 된다.
참아버님 학창 시절 참아버님께서는 평안북도 정주군의 정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시고 1938년 4월 12일 서울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에 입학하셨다. 참아버님은 재학 중이셨던 3년간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서 지내셨다. 이 기간 동안 여섯 차례 거처를 옮기셨고 그중 가장 오랜 기간 지내셨던 곳은 이기봉 여사의 집이다.
이곳은 "흑석동 성지"라는 명칭으로 훗날 많은 통일가 식구들이 방문, 정성 들이며 참아버님의 학창 시절의 삶을 더듬었다. 안타깝게도 흑석동 이 일대는 2008년 12월 재개발로 인해 철거되고 말았다. 지금은 성지 조성 예정지에서 정성을 들일 수 있도록 돼 있다.
참아버님께서는 일본 유학을 마친 1943년 10월 이후에도 이기봉 여사의 집에서 생활하셨는데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실이 발각돼 1944년 10 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경기도 경찰부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셨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흥남감옥에서 나오시어 평양에서 부산으로 남하하시던 도중 서울에 도착하셨을 때도 잠시 이곳에 들르셨다.
한편 참아버님께서는 경성상공실무학교 재학시절 흑석동 서달산(또는 달마산이라 명명)에 자주 오르시어 섭리를 놓고 밤새워 통곡하며 기도하 셨다. 1961년 4월 17일에는 서달산(흑석동 국립묘지 뒤편)에서 실체부활의 날을 선포하셨다.
* 이기완 여사 간증 (한국성지 가이드 p27, 광언사)
참아버님이 학창 시절 명수대교회에 다니셨을 때 부흥회 마지막 날 아침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성령에 이끌린 자는 기도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앞자리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일어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목소리는 침착하였고 내용 또한 절실하였습니다. 신령에 충만했기에 마음이 녹아내릴 듯했습니다.
기도를 들으며 누가 기도하는지 알고 싶어 눈을 떠 둘러보았습니다. 가장 앞자리의 젊은 학생(참아버님)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나는 그 학생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 손을 잡고 “언제부터 신령에 가득 찬 기도를 하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기도회가 끝난 후 그 학생이 어디에 사는지 알아보니 동생(이기봉)의 집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습니다.
*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p.69-77, 김영사)
보통학교를 마친 뒤 서울로 거처를 옮긴 나는 흑석동에서 자취를 하며 경성상공실무학교에 다녔습니다. 서울의 겨울은 무척 추웠습니다. 한 겨울에도 내 방에 불을 넣어 본 적이 없습니다. 불을 넣을 형편이 못 되었고 혹한에 집도 없이 길가에서 언 몸을 녹이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나마 지붕 아래 누워 잠을 청하는 내 처지가 호사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하도 추워 알전구를 화덕처럼 끌어안은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다가 뜨거운 전구에 데어 살갗이 벗겨진 적도 있었습니다.
1980년대에 흑석동을 찾아가 보니 놀랍게도 하숙하던 집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내가 살던 문간방이며 빨래가 널린 마당이며 수십 년 전 그대로였습니다.
그 시절 내 좌우명은 "우주주관(宇宙主管) 바라기 전에 자아주관(自我主管)부터 완성하라."였습니다. 내 몸을 먼저 단련한 다음에야 나라를 구하고 세상을 구할 힘이 있다는 뜻입니다.
경성상공실무학교에 다닐 때는 학급 청소를 나 혼자 도맡아 했습니다.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느라 그런 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학교를 더 많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우러나와 그랬습니다.
나는 좀처럼 말이 없는 학생이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처럼 재잘재잘 얘기하는 법도 없었고 온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은 적도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내가 주먹질을 한 것도 아닌데 동급생들은 나를 어려워하며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고향에서 산이란 산은 모두 찾아 올라갔던 것처럼 서울에서도 구석구석 안 가 본 곳이 없습니다. 무더운 여름날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걸었고 차디찬 겨울에는 살을 에는 바람을 뚫고 뛰다시피 걸었습니다.
걸음 이 워낙 빨라서 흑석동에서 한강을 건너 종로의 화신백화점까지 45분이면 도착했습니다. 전차 값은 아껴 두었다가 나보다 돈이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내세우기 부끄러울 정도로 적은 돈이었지만 천만 금을 내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주었고 그 돈이 복의 씨가 되길 빌며 주었습니다.
서울에서도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주로 흑석동에 있던 명수대 예수교회와 한강 건너편 백사장에 있던 서빙고교회를 다녔습니다. 교회에선 주일학교 선생님 노릇을 했습니다. 내 수업은 아주 재미있어서 아이들이 많이 좋아했습니다. 내가 엉엉 울면 아이들도 "엉엉" 울고 내가 하하 웃으면 아이들도 "하하" 웃으며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닐 정도로 인기가 좋았습니다.
명수대 뒤쪽에는 달마산이 있습니다. 나는 달마산 바윗돌에 올라가 밤새 기도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춥거나 덥거나 상관없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에 열중했습니다. 한 번 기도에 들어가면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될 정도로 울며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놓고 몇 시간씩 기도에만 전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암호와 같아서 그것을 풀려면 더욱 기도에 몰두해야 했습니다.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같이 하숙하던 친구들은 내가 산에 올라가 밤새 기도한다는 사실을 잘 몰랐습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과는 다른 뭔가가 느껴졌는지 나를 어려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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