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2.10.22(일) 한을 남긴 책임분담. 전본부교회.
063-320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책임분담이라는 말을 합니다. 인간이 보다 가치 있는 내용을 지닐 수 있는 것도 이 책임분담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원리를 통해서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책임분담을 완수했더라면 우리에게는 한이라는 말이 남아 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책임분담을 다 하지 못한 연고로 우리의 역사과정에는 한스러운 이런 길이 남아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일에 책임분담을 완수했더라면 인간과 천사 세계, 전 피조세계는 기쁨과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관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책임분담 미완성으로 말미암아 사탄 세계가 형성되었고 이 땅이 사탄 주관권 내에 남아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임분담 미완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도 수고의 길을 지금까지 가려 나오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임분담이라는 것은 어느 시대나 어떠한 개인이나 혹은 어떠한 민족이면 민족 어떠한 세계에도 남아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한 개인을 중심 삼고 볼 때 이 책임분담이라는 과제가 자기 생애를 중심 삼고 언제나 앞에서 이미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책임분담을 완수하면 개인으로서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요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면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개인으로서의 인생길을 완전히 가려야 갈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책임분담은 물론 생애 노정에 전개되어 있지만 우리 하루하루의 생활 가운데도 여러분이 보고 듣고 혹은 느끼는 일체의 생활 가운데도 책임분담을 해야 할 인연이나 환경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듣는 것도 책임분담을 완수하고 나서 들어야 되는 것이요 보는 것도 책임분담을 완수하고 나서 보아야 되는 것이요 느끼는 것도 책임분담을 완수하고 나서 느껴야 되는 겁니다. 만일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한 자리에서 보고 듣고 느낀다면 모든 것은 책임분담 완수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한 자리에서 내가 듣고 기뻐한 그 기쁨이 책임분담을 완성한 이루의 기쁨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한 그 자리에서 느끼는 그 느낌이 책임분담을 다한 자리에서의 느낌으로 통할 수 없는 겁니다.
즉 나라는 사람이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한 자리에서 살고 있는 것이 책임분담을 완수하고 난 후의 삶고 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에 우리는 자나깨나 가나오나 혹은 우리의 일체의 생활을 통해서 이 책임분담이라는 명제가 전체를 좌우할 수 있는 중심적인 요인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 만일 살아생전에 이 책임분담 완성을 하지 못하게 될 때는 이것은 영원한 참소의 조건으로 남아집니다. 저 세계에 가서도 이 책임분담의 요인은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의 책임분담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것은 한 많은 요인을 갖고 있는 책임분담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 가정에서도 이것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타락했고 아벨을 중심 삼은 복귀의 역사도 책임분담을 하는 입장은 달랐지만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벨이 희생을 당한 것입니다.
062-326 내 하나의 몸과 마음을 가지고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 하나의 남자 하나의 여자가 자녀를 거느린 하나의 가정을 중심 삼고 책임분담을 완수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개인이 책임분담을 완수하는 것보다 몇십 배 몇백 배 힘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개인이 책임분담 완수한 터전 위에 가정 책임분담을 추구하고 가정 책임분담을 완수한 터전 위에 씨족 책임분담을, 씨족 책임분담을 완수한 터전 위에 민족 책임분담을, 민족 책임분담을 완수한 터전 위에 국가 책임분담을 완수해야 할 것이 원리가 가르쳐 주는 전진적인 발전 노정이라고 할진대는 과연 이 문제가 얼마나 어려우나? 얼마나 어려우나 이것입니다.
그런 것을 직시한 예수님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탕감 복귀하기 위해서는 당초에 죽는 것을 각오하지 않고는 갈 수 없다 하는 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의 싸우는 그 삼팔선을 타개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역사가 동원되었지만 그것을 해결한 그 누가 있었느냐?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인간으로서 승리했노라"고 만천하 앞에 제시한 사람이 었었느냐? 없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절망으로 태어났고 절망으로 살고 절망으로 죽어 가는 것이 인생인데 이 절망의 함정을 초월해서 나만은 승리하겠다고 할 수 있는 자리에서 나는 하늘이 제시한 책임분담의 요인을 전부 다 탕감해 버렸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 봤느냐?
일시에는 그럴 수 있어요. 일시에는. 석가 같은 분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홀로 천상천하에 제일 높다고 할 수 있는 그 자리라는 것은 일시 한 때에는 있을 수 있지만 장구하게도 있을 수 있느냐?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 역사시대에 있어서 아담 해와가 망한 것도 책임분담 때문이요, 가인과 아벨이 망한 것도 책임분담 때문이요, 노아 가정이 또다시 꺼꾸러진 것도 책임분담 때문이요, 아브라함이 수난길을 벗어나지 못한 것도 책임분담 때문이요, 모세가 광야에서 쓰러지게 된 것도 책임분담 때문이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서 이상적인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성전 건축을 못한 것도 책임분담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도 역시 그랬고 이스라엘 민족도 역시 그랬고 유대교도 역시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한을 남긴 것도 결국은 책임분담 때문이 아녔더냐? 하나님이 한을 품고 오는 것도 책임분담을 완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냐? 이렇게 볼 때 한 많은 책임분담이라는 것입니다.
*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이 탕감복귀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탕감복귀를 해서는 뭘 하느냐? 탕감 복귀해 가지고는 타락 전 아담 해와의 자리까지밖에 넘어갈 수 없습니다. 탕감복귀로 수습할 수 있는 그 한계점을 타락 전 아담 해와 그 이상의 자리는 못 올라간다 이거예요. 여러분이 그걸 알아야 돼요.
결국 탕감복귀라는 것은 타락이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말이지 타락이 없었으면 탕감 복귀하는 말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탕감해 가지고 복귀한다는 그 복귀의 한계점이 어디냐?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의 자리, 그 이상은 못 가는 것입니다.
063-329 그러면 탕감 복귀된 개인은 어떻게 되느냐? 여기에서 책임분담이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 것 아니에요? 그래야 타락하지 않은 아담이 5%의 사명을 완수할 것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탕감복귀라는 것은, 복귀는 돌아가는 것인데 탕감해서 다시 돌아가는 것은 타락 전 아담 해와의 입장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탕감복귀된 후에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5%의 책임, 미완성한 아담으로서의 완성 단계를 넘어가 하나님 앞에 효와 충의 도리를 세워야 할 책임분담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생 장성 완성 이 원리결과주관권 내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최후까지 책임분담이 추구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으로, 가정으로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전체가 또 타락의 인연을 가진 수많은 피조세계가 이 책임분담의 과정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 앞에 이 사상이 희박해졌기 때문에, 이 사상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낙오자가 되고 지치고 주저하게 됩니다. 이런 무리가 점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의 필연입니다. 백 번 죽어서라도 또다시 부활하여 가지 않으면 안 될 길입니다. 이것을 아는 한 내가 한번 태어난 일생을 깨끗이 바쳐 가지고 탕감복귀의 한계선을 넘어야 되겠습니다.
* 책임분담이라는 말은 타락하기 전부터 있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타락하고 생겨난 말이 아니라구요. 이러한 엄청난 내용이 복귀 역사라는 것을 여러분이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한 많은 복귀역사, 이러한 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063-332 알고도 행치 못하면 걸려요, 안 걸려요? 알고 행치 못해도 걸리는 것이요, 알지 못하고 행치 못해도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행치 못해서 걸리는 것보다도 모르고 행치 못해서 설리는 것이 못하다? (낫다.) 그건 아는구만. 그러니 차라리 원리를 몰랐으면 좋을 뻔했다는 거예요, 행치 못할 때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죽을 각오를 해야 된다는 거라구요. 그래서 성경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고 했습니다.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이리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이기라는 것이 뭐예요? 뭐 밥 먹는 것을 이기라는 거예요? 고통의 길을 이기라는 거예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생명을 이기고 나서라는 거예요. 알겠어요? 타락한 세계에서 이어받은 생명을 이기고 나서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생명을 죽이는 자리에 들어가는 사람은 새로운 생명의 출발을 볼 수 있는 거라구요. 그거라구요. 그러지 않고는 가지 못한다구요.
* 통일교회를 믿는 여러분들이 "아, 책임분담을 완수하겠다. 우리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5%의 책임완성이다" 하는 생각을 하루에 몇 번이나 해요?
"5%의 책임 완수하겠다" 하는 생각을 하기 전에 그것을 하려면 반드시 탕감복귀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탕감복귀하는 데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제물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문 선생이 지어낸 말이 아니라 역사적인 내용이 그렇게 돼 있으니 틀림없는 사실이 아니냐는 거예요.
자, 이 나라가 망하게 될 때 망하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나라를 위하여 희생하는 무리가 없어 가지고는 망하는 나라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생겨날 수 있어요? 절대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망하는 인간이 다시 희생되기 위해서는,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제물의 과정을 거쳐 나가야 된다는 거예요.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고 피를 흘리는 그런 역사가 없어 가지고는 되짚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법도라구요. 물이 빠진 자가 나오려면 빠질 때의 힘 이상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려면 누군가 대신 죽는 이상의 힘을 투입하지 않는 한 살릴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입니다.
063-335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으로서 탕감복귀라는 말을 아는 사람은 손들어 봐요. 하나도 없나? 툭하면 탕감복귀예요? 그런 시시한 탕감복귀가 아닙니다. 그저 "허허" 웃으면서 하는 탕감복귀가 아니라구요. 눈을 부릅뜨고 생명을 가름하는 여기서 죽느냐 사느냐, 칼을 받느냐 안 받느냐 하는 입장에서의 탕감복귀입니다.
* 탕감복귀는 제물 없이도 된다? (안 된다.) 왜 안 돼? 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무슨 죄? 본연의 아버지 어머니를 잡아먹는 죄다. 그런 죄를 지었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 세계를 대신해서 탕감하려면 세계를 전부 다 잡아 죽여야 됩니다. 전부 다 잡아 죽이면 어떻게 되느냐? 사람 종자가 없어집니다. 없어지면 어떻게 되느냐? 뜻이고 뭐고 못 이룹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탕감조건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조건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조건물을 만드는 데 있어서는 그냥 "아, 아나님! 이것을 오늘의 탕감조건으로 드립니다" 해서는 안 된다구요. 조건물을 드릴 때에는 조건은 작지만 대등한 가치 이상이 되어야만 조건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사탄이 참소합니다. 제물도 함부로 드리게 되면 지고지성하신 하나님이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생명보다 더 정성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063-338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탕감복귀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제물적인 조건이 필요한데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 얼마나 정성 들였어요? 정성 들인 생각나요? 생각 나? 엉터리들만 모여 있다는 거라구요. 생각대로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생각대로 한다고 하나님이 받아 줄 수 있나 이거예요. 어림도 없다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조건물은 내 생명 대신입니다. 나 대신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조건물과는 완전히 하나되어야 되고 완전히 사랑해야 됩니다. 사랑의 대상으로 대해 가지고 그것이 죽음을 당할 때 같이 아픔을 느껴 가지고 속으로 울면서 제사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잡아 제사드리던 것과 마찬가지로 심정적으로 끊으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을 갖춘 자리에서 끊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제물을 바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에게 있어서 제일 귀한 것을 제물로 바쳐야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물질을 바치게 될 때에는 여러분이 쓰고 남은 찌꺼기를 바치면 벌을 받습니다. 그런 건 차라리 안 바치는 것이 낫습니다.
여러분이 십일조를 할 때 정성 들여 해 보라구요. 절대 굶어 죽지 않는다구요. 그 후손이 물질에 대한 궁핍을 당하지 않는다 하는 것이 원칙이라구요. "십일조 드리기 위해서 정성을 들여라!" 그렇게 돼 있다구요. 그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적당히 하면 되겠거니···, 그것은 통하지 않는다구요. 제물은 내 생명 대신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일 귀한 것을 바쳐야 됩니다.
* 사람에게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이냐? 생명입니다. 이런 거예요. 알겠어요? 그러니 내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탕감복귀의 제물을 통해서 죄를 씻는 놀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관점에서 죽고자 하는 자는 용서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제물을 드리는 데 있어서 자기를 완전히 희생시켜서 드리는 자는 완전히 구원받을 수 없다? (있다)
* 탕감복귀는 그냥 되지 않습니다. 알겠어요? 탕감복귀하려면 무엇이 절대로 필요하다구요? 제물이 절대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 탕감복귀는 주먹구구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구요. 탕감복귀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물을 통해서 되는 것입니다. 제물을 드리는 데는 그냥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제물과 나는 반드시 하나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제물은 조건물입니다.
탕감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물을 드려야 되고 제물은 조건물이 되고 조건물을 드리려면 아담 대신자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불효하였던 아담 대신 나는 효도하는 아담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망하게 한 남편이 되었기 때문에 망하게 하는 남편이 아니라 구해 주는 남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망하게 만든 오빠가 되었다면 나는 망하게 만드는 오빠가 안 돼야 하는 것입니다.
여자 측에서도 마찬가지라구요. 여자가 남편을 망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남편을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흥하게 하는 여자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누이동생의 입장에서 오빠를 망하게 했으니 오빠를 흥하게 만들어야 되고 하나님 아버지를 망하게 만들었으니 하나님 아버지를 흥하게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쓸데없는, 타락된 후손인 아들딸을 낳아 버렸으니 그런 아들딸을 절대 안 낳고 하나님이 기뻐하고 만민이 기뻐할 수 있는 아들딸을 다시 낳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되는 것입니다.
063-340 탕감복귀가 되었다면 어느 자리까지 가요? 장성기 완성급에 올라서는 것입니다. 원리로 말하면 소생 장성 완성이 있지요? 타락은 여기에서 했기 때문에 탕감복귀하면 요 자리에 가는 것입니다.
탕감복귀하는 그 자리는 혼자만 가느냐? 혼자만이 아니라구요. 세계적 사명을 짊어진 자가 와야 합니다. 그 대표자로 오시는 분이 메시아라는 분입니다.
그분은 마음대로 이 자리를 마음대로 넘나들어 가지고 책임분담을 완수할 수 있는 내용까지 다 알고 오시는 분입니다. 아담은 모르고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어떻게 가야 되는지를 알고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요 자리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 통일교회로 말하면 믿음의 기대를 세워 가지고 실체기대를 완성하게 되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루게 된다는 말이 있지요? 그것이 그 말이라구요.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무엇이냐? 메시아하고 완전히 하나되는 기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왜, 메시아하고 하나되는 것이 필요하냐? 내 개인 탕감복귀, 가정 탕감복귀, 종족 탕감복귀, 민족 탕감복귀, 국가 탕감복귀, 세계 탕감복귀, 천주 탕감복귀, 하나님의 심정 탕감복귀까지 인간은 일생 동안 갈 수 없겠기 때문에 이런 역사적인 승리의 모든 내용을 총 수습해서, 하나의 결실체로서 대표로 나타난 것이 메시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메시아에만 달라붙게 되면 개인 완성한 노력 가지고 천주 완성한 자리에 설 수 있다, 없다?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메시아는 절대 필요하다. 자기 생명을 끊어 버리더라도 메시아는 남겨야 된다 이거예요. 이것을 12제자가 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걸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타락의 역사가 다시 연장되어 내려온 것입니다. 이 말은 선생님의 말이 아니라구요. 문 선생이 꾸며 가지고 얘기하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 있다는 거라구요.
063-347 탕감복귀는 왜 해야 되느냐? 책임분담하기 위해서 해야 되는 겁니다. 책임분담은 왜 해야 되느냐? 한 많은 역사를 해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책임분담을 완수하는 날에는 하나님의 한이 풀리나요, 안 풀리나요? 또 인류의 한이 풀리나요, 안 풀리나요? 그뿐만이 아니라 시대적인 한, 미래의 한까지 다 풀린다는 거라구요.
063-349 한 많은 책임분담의 역사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 한을 풀 수 있는 책임 완수의 한 날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것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것을 그 누구를 그리워하는 것보다 그리워해야 합니다. 부부가 서로서로 자기의 아내를 사랑하고 자기의 남편을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그리워야 합니다.
그것을 해결 지어 놓고 그 터전 위에 아내가 필요한 것이요 남편이 필요한 것이요 자식이 필요한 것이요 가정이 필요한 것이요 민족 국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냐.
063-351 탕감복귀의 원칙은 선생님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탕감복귀 원칙의 길을 가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 나타나고자 하는 생각을 안 했습니다. 제물의 과정을 가지 못한 사람은 후원이 필요 없다구요.
제물을 동정하는 입장에 서면 진정한 제물은 못 바치는 것이 아니냐.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이 감옥에 들어갈 때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해 주소서" 절대 그런 시시한 기도는 안 했습니다. 그러면 제물의 뜻에 위배됩니다. 깨끗이 희생하고 깨끗이 피를 흘려야 됩니다. 동정을 바라는 제사장이 되어 가지고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이겁니다.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하나님!" 난 그러지 못한다구요. "하나님, 나는 나 자신을 책임지겠습니다. 동정은 필요 없습니다" 하는 사상을 가지고 나오는 사나이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탕감복귀를 하지 않고는 책임을 완수할 수 없습니다. 민족적 탕감복귀를 시키려니 통일교회 교인들을 들이 고생시키는 거라구요. 죽을 자리에 내모는 거라구요. 가라 이거예요. 그 방향과 여러분이 가는 방향이 엇갈리게 될 때에는 엇갈리는 각도만큼 여기에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을 뻔했어요. 가롯 유대와 같은 사람은 몰랐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하였도다. 차라리 통일교를 믿지 않았으면, 차라리 문 선생님을 몰랐으면 좋을 뻔하였도다. 그러면 여러분 일 대만 걸리는 것이 아니라 잘못하면 여러분의 70대 선조까지 걸려 버리는 것입니다. 선한 공적이 있으면 전부 다 빼앗아 가지고 이방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거라구요. 말만 그러는 것이 아니에요.
'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의 사명 ▣ 1963.10.20(일) 대전교회. "하나님께서 임하실 수 있는 행복한 가정을 만듦으로써 천국을 이루려는 것이다. " (0) | 2024.12.17 |
---|---|
애승일의 필요성 ▣ 1984.1.15(일) 미국. (1) | 2024.12.12 |
짐을 지우는 자가 되지 말자 ▣ 1969.5.11(일) 전본부교회. (0) | 2024.12.04 |
생애에 있어서 귀중한 청년기 ▣ 1968.10.27(일) 전본부교회. (0) | 2024.12.04 |
소명받은 사람들 ▣ 1986.10.8(수) 용인 연수원. (2) | 2024.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