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8.6.9(일) 전본부교회. 하늘 편에 서자.
- 방한한 일본식구 환영식.
▶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
- 하나님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골수 중의 골수를 몽땅 퍼부어 지은 인간.
020-201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하늘 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도 그렇지만 우리 개인에게 있어서도 하늘 편의 것을 찾아볼 수 없는 때가 많습니다.
* 그러나 우리들은 아무리 어렵고 혼란된 환경에 있을지라도 하늘 편을 찾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논리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필사적으로 성취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현재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늘 편을 생각해 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모두가 하늘 편과 반대되는 현상뿐이요, 우리가 사는 환경이 하늘 편과 관계없는 내용으로 엉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하늘 편을 찾아가고 하늘 편에 선다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것임을 우리들은 알게 됩니다.
▶ 하늘 편에 서기 위해서는 인간 편에 서 가지고는 안 된다.
*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늘 편에 서기 위해서는 인간 편에 서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사정 가지고는 하나님의 사정과 접할 수가 없는 것이요, 인간의 인연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인연과 연결 지을 수 없는 것이요, 인간의 목적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목적과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 편에 서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중심 삼고 생활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목표를 갖고 싸우는 입장을 취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적인 노정을 통하여 연결되는 분이시기에 사적인 것을 중심 삼은 곳에는 하나님이 임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020-203 이런 점에서 보게 될 때에 하나님이 임하실 수 있는 공적인 자리는 어떤 자리냐? 우리 인간의 몸과 마음을 중심 삼고 볼 때에 몸보다 더 공적인 입장에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둘 다 공적인 입장에 서는 내 자신이 되었다 할진대 또다시 더 큰 공적인 입장에 서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가정입니다.
* 그러나 공적인 기반을 세운 가정이 있다 할진대 그 가정은 민족을 중심 삼은 공적인 기반 위에 서야 합니다. 민족을 중심 삼은 공적 기반 위에 선 하나의 민족이 있다면 그 민족은 국가를 넘어 세계적인 공적 기반 위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더 큰 기반을 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생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 이런 환경에서 우리들은 남달리 하나님권을 찾아 나가기 위한 공적 기준을 목표로 하여 생활 속에서 선의 발판을 세우기 위해 싸워 나오고 있습니다.
그 행로야말로 인간적으로 볼 때는 무한히 비참한 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전체가 타협할 수 있는 기준이 아니요 전체를 부정하고 전체를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절대적인 기준이니만큼 비참함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 오늘날 인간들은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이 자신들의 앞길을 개척해 주기 위하여 지금도 수다한 고생을 하시고 수다한 시련 가운데에서 외로움을 무릅쓰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참고 견디다. 뒤집어서 머리에 덮어쓰다.) 공적인 노정을 걸어오신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물론이지만 오늘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늘의 본향의 나라로 추구해 나가는 신앙의 길에 선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엄청난 공적인 역사노정을 짊어지시고 오셨다는 사실을 망각해 버리고 자기 자신이 자탄할 내용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걸고 넘어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였던 사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 역사적인 사실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가를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통일교인들이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 공적인 노정에 있어서 책임을 짊어진 하늘 편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사정보다도 더 어려우셨던 하나님, 우리나라 사정보다도 더 어려우셨던 하나님, 오늘날 혼란 중인 세계의 사정보다도 더 어려운 환경에서 책임을 지고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진정으로 위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도 그 사람을 찾아가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020-205 하나님을 아는 무리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은 그 무리를 통하여 역사상의 서러움을 풀고 싶어하실 것이고 시대의 사명을 분부하고 싶어하실 것이며 미래의 책임을 맡기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오늘 통일교회 식구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선두에 서서 이러한 서러움 가운데 계신 하나님,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 계신 하나님, 이러한 억울하고 분한 입장에 계신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한 사실은 어느 때에 벌어지느냐?
오늘날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한 사실은 어느 때에 벌어지느냐? 내가 믿고 바라고 있던 일이 깨어지게 될 때이며 혹은 나와 그와의 사이에 맺어진 혈연적 관계가 부정될 때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그때가 가장 비참하고 비통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그렇게 믿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식이 배반하게 될 때 그 믿음에 비례헤서 부모가 받는 충격과 고충 그리고 비참함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생명을 걸고 서로 사랑한 사람이 배반하고 배척하며 불신할 때도 역시 말할 수 없이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몸부림치는 그 고통은 그런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것입니다. 말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일을 미루어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되어서 비참하게 되었느냐? 우리는 이것을 놓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막연한 하나님이 아닌 구체적인 하나님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과는 최고의 관계를 가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과 더불어 기쁨으로 출발해서 끝이 없는 영원을 향해 계속 나갈 수 있는 그런 출발의 기점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출발의 기점을 인간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기뻐할 수 있고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자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은, 하나님을 모시는 자리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 삼고 자녀의 입장으로 맺어질 인연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런 모든 인연이 끊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인간은 오늘날 하나님을 비참한 자리에 몰아낸 張本人(어떤 일을 꾀하여 일으킨 바로 그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을 지금까지 인간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온 만물을 지으시고 그 만물의 주인공으로 인간 시조를 에덴동산에 지어 놓으셨습니다. 인간을 지으실 때는 하나님의 어떠한 희롱거리로 지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취미로 지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지어 만물을 대표하는 중심으로 세우게 될 때까지의 하나님의 수고와 정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020-207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 온갖 정성을 다 들이시고 또한 심혈과 당신의 생명의 핵심을 다 기울여 지으셨으며 사랑과 애정을 몽땅 퍼부어서 지으셨습니다. 어떠한 힘 가지고도 떼려야 뗄 수 없고 갈라지려야 갈라질 수 없는 인연 가운데서 지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지으신 인간이기에 그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평화가 깃들 수 있는 것이고 모든 정과 행복은 그 인간을 통하여서만이 깃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아버지요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하나님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골수 중의 골수를 몽땅 퍼부어 지은 인간이기에 이런 인간이 하나님을 끌면 안 끌려오실 수 없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이 인간을 끌으시면 안 끌려갈 수 없는 것입니다.
* 겉보기에 아무리 흉하고 못난 사람이라도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넘칠 수 있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싹틀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의 노래가 읊어질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차적인 하나님을 중심 삼은 고귀한 가치를 지닌 인간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 주위에 지어진 모든 만물은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의 자극적인 상징체였습니다. 들려오는 새소리는 아담의 심정을 울려 파동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동기였습니다. 나비와 벌 그 외의 모든 만물을 아담 해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상징적인, 자극적인 상징체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불어오는 바람도 흘러가는 물도 들어 있는 풀 한 포기도 모두가 아담 해와를 사랑한다는 그 실체의 표상체로 지으셨습니다.
인간을 만물의 중심으로 두시고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자리가 얼마나 복된 자리입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자랑스러운 인간이었고 하나님의 품에 품고는 영원히 영원히 놓지 않고 싶었던 인류 시조였습니다.
020-209 자식을 낳아 길러 본 부모들은 알 것입니다. 애지중지한 그 아들딸을 통하여 복을 받고 싶고 행복도 느끼고 싶을 것입니다. 또한 기뻐하고 복 받을 수 있는 기준이 있으면 그 아들딸에게 영원히 남겨 주고 싶을 것입니다.
* 낮이나 밤이나 그 아들딸이 고이 자라 만국으로부터 높임을 받고 만세에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상처를 입을까 보호하고 애달픈 심정으로 초조해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타락한 부모의 마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품 안에서 젖을 먹여 키우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 자식이 똥을 싸고 오줌을 싸서 냄새가 나더라도 사랑으로 그 환경을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타락한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사랑의 주체되시는 하나님께서 본연의 심정을 통하여 아담과 해와를 사랑하고 싶었던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애기를 품고 키울 때에 잠자리에서도 노래를 불러 주고 혼잣말로 얘기도 해 주며 잘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은 부모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못나고 부족한 자식이라도 그 자식에게 결함이 있으면 부모의 마음은 그 가슴에 몽땅 젖도록 최고의 고통을 겪는 것이요, 이것이 풀어지면 그 고통에 비례한 만큼 기쁨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부모의 마음도 그러한데 하나님의 마음이야 어떠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원리를 통해서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되 온 천하가 몽땅 굴복할 수 있는 사랑, 온 전체가 그를 따를 수 있는 권위를 주시되 온 전체가 완전히 고개 숙일 수 있는 권위, 그런 최고의 사랑과 최고의 권위를 생각하고 인간에게 책임을 주신 것입니다.
▶ 하나님은 어찌하여 인생 가운데 책임분담을 세우셨던고?
*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인생 가운데 책임분담을 세우셨던고? 전지전능하신 분이니 그 전지전능한 창조성까지 부여하고 또 永遠不變한 사랑의 주체이시니 그 사랑의 주체를 대신할 수 있는 자리에 세우기 위해서 책임분담을 주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복의 조건이 되는 것이요 전체를 점령할 수 있는 하나의 열쇠와 같은 것이기에 이것을 안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임분담이 문제가 되어서 타락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020-210 여러분은 제3자의 입장에 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책임분담과 나" 이런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 책임분담을 어기려 할 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책임분담을 하기 위해 올라가던 과정에서 그 책임분담을 어기려 할 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여러분은 축구경기를 많이 해 보았을 것입니다. 자기편의 볼이 센터 라인을 넘어서면 좋아서 "야!" 하고 소리치지만 볼이 센터 라인을 넘어 자기편으로 오면 마음이 얼마나 초조합니까? 구경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림픽같이 그 경기가 크면 클수록 초조감은 거기에 비례해서 커지는 것입니다.
* 그러나 축구에서는 그까짓 한 골 먹으면 다음에 다시 이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 앞에 놓인 책임분담은 한번 잘못하면 억천만세 동안 인간에게 암이 될 수 있는 무서운 구렁텅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책임을 해야 할 입장에 있는 아담 해와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공박攻駁 (남의 잘못을 초들어 따지며 공격함)이 있을 것을 예상해서 "따먹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그걸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느냐는 것입니다.
* 그때 하나님의 염려하는 마음이 두 갈래 길에서 얼마나 뒤넘이쳤겠어요? 타락 직전에 가기까지 인간의 권위를 얼마나 주장하고 싶었겠어요? 그 권위를 가지고 사탄을 굴복시키고 싶으신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어요? 이렇게 애달픈 자리에서 인간은 타락한 것입니다.
이것은 천 년간의 한으로 탕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억천만세에 수많은 億兆蒼生(수많은 백성, 온 세상 사람)이 전부 죽음의 고비에 걸릴 함정이 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셨으니 얼마나 분했겠습니까? 그러한 비참한 상처를 입힌 인간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인간은 할 말이 없는 존재입니다.
세상에서도 환갑이 넘어 낳은 즉 晩得子인 7대 독자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절망 중에 절망일 것입니다. 젊으면 또 낳을 수 있지만 만득자로 태어난 그 7대 독자가 잘 자라지 못하고 죽는다면 7대권을 계승하려던 조상들의 마음이 얼마나 애가 타겠어요?
조상들은 자기의 후손, 자기의 핏줄을 통해서 세계에 없는 만복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자식이 죽는다면 그 부모는 따라 죽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7대 독자가 아니 영원한 독자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담을 중심 삼아 가정을 이루게 하여 천지의 대업을 세우려 하셨는데 그 아담이 죽었으니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이렇게 일이 틀어졌을 때 어떠했겠어요?
내가 결혼하고 싶은데 결혼 못할 때의 그 안타까움에 비교되겠어요? 부모는 천년만년 같이 살고 싶은데 7대 독자가 지금 몹쓸 병에 걸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고 한다면 그 부모의 심정이 어떠하겠어요?
여러분의 아들딸이 지금 숨이 넘어가고 있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부모가 소리치겠어요 안 치겠어요? 그 부모는 죽어 가는 자식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체면과 위신을 다 버리고 그 방법을 쓸 것입니다. 어떤 원수가 있어 그의 영원한 종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의 아들딸을 살릴 수 있다면 부모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해가 됩니까?
그 자식을 살리는 어떤 방법이 있다 할진대 부모는 위신과 체면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자식을 살릴 수 있다면 부모가 종이 되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한날의 뜻을 세울 수 있는 그 한 실체인 아들을 찾기 위해서는 천만 년의 한을 푸는 제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부모도 그러하거늘 하나님이야 오죽하시겠습니까? 그런 아들딸이 접경을 넘어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비참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020-212 천국을 가려면 그 사연을 땅 위에서 알아 가지고 내 힘이 미치지 못하여 풀어 드리지 못하면 눈물이라도 흘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풀어 드리지 못하는 자신을 탄식하면, 내가 더 불쌍한 자리에서 탄식의 주인공이 되면 탄식하는 그 사정을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이렇게 탄식하면 그것이 조건이 되어 하나님과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뻔뻔스러워 가지고는 인연이 맺어지지 않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타락할 때 천지가 어떻게 되었겠어요? 새까맣게 되었겠어요 하얗게 되었겠어요? 세상에도 그렇잖아요? 젊은 부부가 살다가 한 갈래가 갈라져 나가든지 죽든지 하면 얼마나 몸부림칩니까?
*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어요? "너 그만두어라. 또 창조하자" 그러셨겠어요? 그랬다면 얼마나 좋겠나?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들딸이 태어났다가 죽고 나면 언제나 못 잊을 것입니다. 그 자식이 살아 있을 때, 뭐 먹겠다고 할 때 왜 못 사주었나, 무엇을 입고 싶다고 했을 때 그것을 왜 못 사주었나, 이렇게 먹겠다는 것 못 사 주고 입겠다는 것 못 입혀 준 그 모든 사연이 걸려 한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을 복귀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복귀라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 아담 해와가 자랄 때에 하고 싶고 바라던 모든 것을 다 해 주지 못한 것이 부모이신 하나님의 한입니다.
020-214 아담 해와가 자랄 때에 하고 싶고 바라던 모든 것을 다 해 주지 못한 것이 부모이신 하나님의 한입니다. 그 마음이 있기에 복귀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식으로서 하나님 앞에 효의 도리를 세우고 천륜의 법도를 세워 정착점을 마련해야 할 것이었는데 그것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태어난 오늘의 인간이기 때문에 탄식과 저주와 불만의 비탄 가운게서 신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우리가 하나님의 공적인 터전을 중심 삼고 하늘 편에 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오늘이 내 위신과 권세를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뼛골 사이에서 스며 나오는 타락 전의 본연의 정 즉 본성의 정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타락했던 조상의 입장에 서서는 안 됩니다. 때문에 타락한 부모들은 울어야 되고 눈물 흘려야 됩니다. 그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들도 당연히 고생해야 됩니다. 비참해져야 됩니다. 죽어 나자빠져야 됩니다. 쓰러져야 됩니다. 억울한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것은 당연지사입니다.
내 뼛골 깊이 숨겨져 있는 본성의 정을 중심 삼고 타락 전 즐거워하시던 아버지를 동경하면서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마음에 준 그 상저를 부여안고 타락하지 않은 본성의 심정을 가지고 이루어 드릴 수 있는 내 자신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과 인연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종교에서는 "죽을 때까지 정성을 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고 했습니다.
* 하나님은 억울하고 분하신 분입니다. 그것은 누구 때문이냐? 바로 나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요? 내가 몇천 년 전 조상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다 썩어 가지고 보기 싫게 앙상한 가지만 남은 고목에 싹이 나온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은행나무든 느티나무든 그 싹에게 나이가 몇이냐고 물었을 때 금년 봄에 나왔으니 석 달이 되었다고 하면 되겠어요? 내 나이는 심으신 할아버지 때부터 뿌리가 나기 시작했으니 몇이라 해야 되겠어요?
그 고목의 순과 같은 사람이 누구이겠어요?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지금 몇 살입니까? 15살, 스물 살로 생각하지 말아요.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나이에 6천 년을 더해야 합니다.
020-218 하나님은 다 잃어버리고 슬퍼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병이 나서 죽었다면 그래도 괜찮겠는데 "따먹으면 죽는다"고 경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경망스럽게 따먹었다는 것입니다.
이걸 볼 때 얼마나 얄미웠겠습니까? 그것을 따먹으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반드시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귀에 불어넣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좋다고 따먹었던 것입니다.
* 사람 하나 죽인 것은 몇백 번 몇만 번이라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 세워질 수 있는 단 하나밖에 없는 상대적인 중심 존재가 사랑의 법도를 파탄시켰으니 그것을 어디 가서 찾을 것이냐?
▶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위신을 세워 드리느냐?
020-220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위신을 세워 드리느냐? 타락할 때보다 더 사랑받을 수 있는 아들딸을 찾아 세워 드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믿음에 있어서도 그때의 아담 해와보다 높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심정과 인격에 있어서도 아담 해와 以上이어야 합니다.
사탄이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하던?" 하면서 "그것을 따먹으면 눈이 밝아진다"고 꼬일 때 거기에 빠져 넘어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때도 아담 해와보다 더 나아야 되고 인격에 있어서도 사탄에게 "넌 뭐야 이 자식아! 넌 종이야!"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심정에 있어서도 "사랑의 주인은 누구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에서는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믿음에 있어서 그 이상의 사람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좋아요 나빠요? 좋습니까? 얼마나 좋아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감사한다 해도 못 다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짓말이라면 돌무더기에 맞아 죽어도 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감사해야 되느냐? 죽어 가지고 부활할 때까지 감사해야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 하나님을 믿는 데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믿지 못한 역사의 굴레를 가진 인류이기 때문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어야 천당 가는 것입니다. 뭐 성경 끼고 교회에 다닌다 해서 예수 믿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를 넘어가더라도 "나는 부활한다."고 믿어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옛날 사탄은 경계선을 그냥 넘어 들어와서 아담 해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앙자는 권한과 인격을 갖추어 사탄이 그 앞에 오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천사장이 그 앞에 오기를 무서워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한 사람들이 사탄권 내에 있겠어요? 정성의 내용을 가져서 사탄이 그 앞에 나타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냐? 무슨 보좌에 앉아서 영광 받는 하나님이신 것 같습니까?
*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냐? 무슨 보좌에 앉아서 영광 받는 하나님이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류를 대하여 하나님은 지금까지 무엇을 하셨느냐? 이 인류를 구원시키느라고 매일 통곡하고 계십니다. 그런 입장에서 인류를 이끌어 오시는 것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비참한 분입니다. 비참 가운데 떨어진 인류를 구원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잠든 인류를 깨워서 "와라! 와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 가지고 가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책임분담을 해야 하는데 이것을 대신해 줄 수 없는 입장에서 일을 하시려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020-222 오늘날 종교의 문을 두드리며 참된 길을 추구하고 나선 사람들을 살펴보면 세상의 낙오자들이 많습니다. 통일교인들도 가만 보면 저렇게 얌전하게 앉아 있어도 세상에서 다 멍든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 이 세상에서 쓰러지고 나자빠진 무리들입니다.
집에 있어도 시원치 않고 학교에 가도 시원치 않고 노는 것들을 보아도 마음에 안 들고 사회를 보아도 그렇고 세계를 보아도 그러니 그렇다고 전부 쓸어 버릴 수도 없고. 그러니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 통일교회에 들어온 여러분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전부 다 멍들고 구멍 뚫어지고 인생행로에 있어서 패배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한두 개만이 아니라 너저분하게 구멍이 뻥뻥 뚫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 땅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섭리하실 때 어떤 사람을 중심 삼고 했느냐?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중심 삼고 구원섭리하셨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잘났다는 녀석들을 전부 다 도망가고 지지리도 못나고 상처투성이고 병신이며 곰배팔이고 눈이 찌그러지고 언청이인 팔방미인이 아닌 팔방병신만 남아 있어서 그들을 중심 삼고 섭리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들을 수습해서 섭리해 나오신 것입니다.
* 쓰레기를 모아 재생시키고 수리하는 곳을 재생창이라 합니다. 교회라는 것은 인간을 다시 수리할 수 있는 재생창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무슨 교회냐? 통일이니까 몽땅 재생시키는 교회입니다. 몽땅 재생시키는 곳입니다.
* 여러분들이 키우던 자식이 죽어서 그 자식을 붙안고 눈물을 흘릴 때 여러분은 "아버지가 이런 일을 당하셨을 때 얼마나 고통이 크셨습니까? 그 고통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런 일을 당하게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면 감사해야 됩니다.
020-224 아담과 해와가 타락할 때도 비참한 하나님이었지만 그 아담 해와를 다시 찾으시기 위해 섭리하실 때는 더 비참한 하나님이었습니다. 찾아간 자식에 추방당하고 배신당하신 하니님, 원수의 품에 안겨서 원수와 하나되어 죽자 살자 하며 살고 있는 그 모습을 담 너머로 바라보고 계시는 신세가 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신세가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면 사탄은 이것을 보고 뭐라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왜 저렇게 되었노?" 하면서 "당신의 아들이 이렇게 되었소. 나와 이렇게 같이 있소." 하고 비웃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환경 그 자체가 사탄이 하나님을 조롱할 수 있는 재료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전부 다 끊어 버리고 청산 짓지 않고는 나에게 올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지 않고는 나에게 돌아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효와 충의 도리를 다하겠다고 몸부림쳐 봤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그저 습관적으로 살아왔습니다. 생활무대에 젖어 있는 우리의 내적인 심정은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할 수 있는 재료가 되었습니다.
020-232 오늘날 우리가 아버지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에는 목이 메이고 가슴이 저리는 심정으로 아버지를 불러야 되겠습니다. 6천 년 전에 잃어버렸던 아버지, 나로 인하여 수많은 곡절과 한을 품어 오신 아버지, 수많은 상처와 수많은 억울함과 수많은 원수들 앞에 농락을 받으면서도 참고 나오신 아버지, 수많은 상처 수많은 비참한 사연이 엉클어진 아버지이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뜨거운 불덩이가 되어서라도 아버지의 가슴을 녹여 드릴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는 탄식과 저주의 자녀인 것을 생각할 때 무엇으로 그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것인가. 밤을 새워 몸부림치고 통곡하여도 원통함이 풀리지 않아야 될 우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마음들은 다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숱한 역사를 거쳐오면서 통일의 깃발을 꽂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수많은 억울한 과정을 거치셨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무수한 날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문전에서 박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몇십 배 이상의 처량한 사정에 부딪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 우리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참지 못했습니다. 7년 노정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고도 하나님을 이러쿵저러쿵 평하기에 급급하였던 이 저주받을 입술을 가진 무리들입니다. 이처럼 부끄러움을 모르는 우리 자신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제라도 저주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020-234 선생님은 홀로 기도하는 날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정을 통고하시며 선생님을 붙들고 사정하시던 그 사정을 모릅니다. 그것은 나만이 알 수 있는 사정입니다.
그렇게도 간곡히 그렇게도 초조히 그렇게도 뼈에 사무치게끔 부탁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하나님, 광대무변한 이 우주를 창조하신 능력의 주체되시는 하나님이 어찌하여 미미한 한 사람 앞에 찾아와 당신의 처량함을 사정하는 하나님이 되었던고!
체면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손이 발이 되도록 사정해서라도 하나님의 아들딸을 만들기 위하여 수고하고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중심 삼은 아들, 천년만년 믿을 수 있는 아들, 억만년 찬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마음을 졸여 가면서 아담이 살아나기를 고대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020-236 여러분이 죽었을 때 그 무덤 앞에 꽃을 안고 와서 "아버지여! 당신이 사랑하는 아들이 갑니다. 당신의 아들이 사랑하던 이 땅을 누가 사랑하고 이 민족을 누가 살리고 이 제단을 누가 살리옵니까?" 하고 몸부림칠 수 있는 동지나 아들딸을 남겨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습니다.
어떤 여건 하에 있더라도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를 위로해야 할 인류인 것을 여러분은 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하나되어 하늘 편에 서서 죽고 살고자 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부모를 이 땅 위에 모시고 천년만년 안식하실 수 있는 터전을 아버지 앞에 마련해 드리겠다고 몸부림치다가 죽어 간다 해서 그것이 한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향하여 나가는 그 길 앞에서도 절개를 세우겠다고 다짐하여 몸부림쳤던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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