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을 대해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 1959.9.27(일) 하나님의 가정에서 살 식구들. 전본부교회.
007-265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목표는 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해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참자녀로서 인류 전체가 형제가 되어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그 한날을 맞기 위해 하나님께서 6천 년 동안 복귀섭리를 해 나오셨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그렇고 우리 인간의 마음속의 목적이 그렇다 할진대 그 목적은 기필코 이루어져야 합니다. 기필코 그날이 와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날이 오지 않는다 할진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하늘과의 정적인 인연을 맺을 수 없습니다.
2. 신앙생활은 살아서 죽음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 1968.11.24(일) 하늘나라의 종손이 되자. 전본부교회.
021-254 모름지기 신앙과 종교라는 것은 본래 살아서 죽음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근원으로서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하지 않고는 저나라의 천국 이념을 이 땅 위에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죽어서는 그러한 것들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인은 살아 있는 존재로서 몇 고비 죽음을 극복한 승리적 기준 위에서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주체성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을 건설할 수 있는 것입니다.
▣ 1969.9.14(일) 참된 형제. 전본부교회.
024-328 영원한 세계에 가서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을 때 죽음을 극복해야 됩니다. 죽음을 극복하려면 자기 혼자서는 안 됩니다. 사탄의 반대를 받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정성들여 기도하게 되면 누가 와서 목을 누르고 타고 하는 별의별 일을 다 경험할 것입니다. 그래도 "천 번 만 번 날 죽여 잡수소. 나는 독수리 밥이 되기를 결심했소" 하면서 산골짜기, 평지 등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든지 다니면서 다 극복해야 합니다. 살아서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면 영원한 세계에 못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1968.12.29(일)신앙의 본국인의 자세를 정립하라. 전본부교회.
- 일본식구 방한 소감 후 말씀.
160-020 그렇기 때문에 종교 생활하는 사람들은 죽음 문제가 제일 鬪爭의 癌이에요. 신앙생활은 살아서 죽음 문제를 解決하자는 것이에요.
▣ 1963.8.11(일) 주인이 없는 아버지의 뜻. 전본부교회.
012-337 이제는 나도 40이 넘었습니다. 내가 요즘 이 손을 보면서 "이 손이 참 많이 고생했다. 그런데 이 손이 곧 물이 되어서 뼈만 앙상하게 남아서 해골이 되어 누울 때가 되면 몇 푼짜리나 되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선생님이 나이가 점점 많아지니 갈 길이 바쁩니다. 내 갈 준비가 바쁩니다.
종교인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생활 속에서 시간시간 처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늘의 사명을 책임진 입장에서 나오다가 최종적인 결론에 이를 때 "어떻게 남아질 것인가? 천상 장부에 무엇으로 남아질 것이냐? 上이냐 中이냐 혹은 下냐···. 나는 무슨 일을 했느냐? 하늘 앞에 무슨 말을 할 것이냐?" 그런 일이 곧 닥칠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생각 하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 1973.4.15(일) 오늘과 내일. 벨베디아. 미국 100일 수련회.
066-091 아무리 고통스럽고 아무리 천대받고 어떠한 취급을 받더라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지녀야 됩니다.
받아야 할 심판이 공포의 심판이라 하더라도 감사히 받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심판받는 것은 마땅하지만 당신에게는 나로 말미암아 고통받는 일이 조금도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죽으면서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자기를 중심 삼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당하더라도 그 슬픔을 자기를 중심 삼고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대하는 하나님이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괴롭고 얼마나 고통스럽겠느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 나는 고통스럽고 나는 망하더라도 하나님은 고통받아서는 안 되고 하나님은 망해서는 안 된다는 이러한 갈구와 소망의 기준이 있어야 하늘과 땅, 나와 하늘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준이 되지, 그 가외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두고 보더라도 예수님은 十字架를 앞에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아버지 뜻대로 하라는 것은 나는 천 번 만 번 죽더라도 아버지의 뜻을 남기겠다는 말입니다. 이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부활의 기준이 벌어지는 거라구요.
▣ 1978.2.26(일) 생애노정과 탕감복귀. 벨베디아.
097-064 자, 여러분 언제 죽을지 알아요? 그것에 대해 준비를 못 하고 있다구요. 거 심각한 문제라구요. 선생님은 죽음에 대한 것을 옛날에 이 길을 출발하면서부터 죽음을 생각지 않은 날이 없어요. 지금도 그렇다구요. 지금도. 나는 그렇게 지금 가는 거예요.
▣ 1987.6.14(일) 최후의 제단. 본부교회.
166-328 하나님의 아들딸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되어 있지 않다구요. 자기가 갈 길이 어떤 것인지 다 알고 가는 건데요, 뭐.
▣ 1989.11.15(수) 사랑의 인연을 남겨라. 한남동. 초교파기독교 협회 성녀회.
195-160 죽게 될 때는 사랑의 씨앗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죽게 되면, 영계에 가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요? 영계는 사랑을 중심 삼고 살 수 있는 세계의 확대입니다.
평면적으로 사랑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니라 종적인 사랑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원형적인 사랑입니다. 방대한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통일교회는 죽음을 극복한 교회입니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아요. 우리 같은 사람은 죽음에 대한 모든 공포를 초월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장례식에서는 절대 울지 못하게 합니다.
▣ 1991.1.2(수) 한남동. 애승일.
- 세계 지도자 회의.
212-104 통일교회 교인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심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천국 못 갑니다. 사람은 원래 타락하지 않았으면 천국 갈 걸 다 알고 살게끔 돼 있는 것입니다.
▣ 1998.12.19(토) 생사에 대한 이해.
- 1991년 세계평화종교연합 창설 기조연설문
297-251 인간은 자기를 중심 삼고 볼 때는 소망을 가진 듯하나 죽음의 고개를 넘어설 수 있는 소망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규범으로 삼고 죽음까지도 비웃고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소망을 찾아야 하는 것이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문제라고 봅니다.
297-254 여러분! 세상만사는 다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가정도 지나가고, 국가도 지나가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 혹은 어떤 주의나 사상도 다 지나가고 마는데 최후까지 남아져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죽음과 싸워 승리할 수 있는 소망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인생의 패배자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적인 모든 소망 일체를 거부하고 인간 세상의 소망이 아닌 하늘의 소망 즉 영원한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땅 위의 어떤 소망을 품고 살 것이 아니라 죽음의 고개까지도 넘어설 수 있는 소망을 품고 영원한 소망의 세계를 꿈꾸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젊었을 때에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지 않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는 죽음에 대해 점점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살아 있는 여러분도, 이 자리에 서 있는 레버런 문도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이처럼 죽음이라는 것은 운명의 관문입니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죽음이라는 낱말을 쓴 목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삶의 뜻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삶의 가치는 누가 잘 압니까?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은 모릅니다. 죽은 경지에 들어가 가지고 생사의 기로에서 하늘을 붙들고 삶의 가치를 타진해 본 사람이 아니고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합니까? 우리가 왜 태어났는지 그 목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죽느냐, 왜 태어났느냐 하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에서도 가장 첫째로 묻는 질문이 인생이 무엇이며 인간은 왜 태어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로 태어나는 것인데, 인간 세계에서는 "아이구! 죽는다" 하고 아우성입니다. 그것을 보는 하나님께서는 껄껄 웃겠습니까 아니면 우우하고 놀라 슬퍼하겠습니까? 기뻐하고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제한된 지상의 사랑권 내에서 무제한의 사랑권내로 돌입할 수 있는 기쁨을 맞는 순간이 육신이 죽는 순간 즉 제2의 출생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육신 세계에 태어난 날을 더 기뻐하겠어요 아니면 제2의 무한 확대 세계 사랑을 위해 육신을 벗고 죽음을 통해 새로운 아들로 태어나는 그 시간을 더 기뻐하겠어요? 물론 후자입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여러분이 죽음의 恐怖에서 解脫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기 때문입니다.
▣ 1999.2.4(목) 세계평화와 가정이상. 서울 롯데호텔.
- 1999세계문화체육대전 개막 만찬회.
299-060 우리들은 이 지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계는 지상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영계도 있습니다. 틀림없이 영계는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상과 영계는 전혀 다른 두 세계가 아니고 하나의 세계로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영계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다시 영계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말에서는 재미있는 표현으로 "죽는다"는 것을 "돌아간다"는 말로 사용합니다.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입니까? 이는 단지 공동묘지로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인생이 출발하였던 본래의 처소로 되돌아간다는 뜻입니다. 멀고 먼 역사의 기원을 넘어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 우리 인류 조상의 근원이 되는 그 세계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즉 창조주가 계신다면 그 창조주가 계시는 곳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거기서 출발했으니 거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3. 선한 존재가 되는 것.
▣ 1972.5.21(일) 완전 복귀. 전본부교회.
057-012 우리가 일생을 다 살고 나서 善과 惡을 하나하나 除하고 났을 때 惡이 善보다 많게 되면 惡한 主管圈內에 歸結되는 것이고, 善이 惡보다 하나라도 더 남아질 때에는 善한 主管圈內에 歸結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057-014 신앙생활은 무엇이냐? 악한 분야를 방지하고 선한 분야를 생애 노정에 남기려고 하는 것이 인간들이 믿고 나아가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희망이 무엇이냐? 완전히 선한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 마태복음 5장 48절 하나님의 온전함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 마태복음 5장 소금이요 빛이라(막 9:50; 눅 14:34-35)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오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4.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
▣ 1967.6.9(금) 승패를 결정하는 자리. 전본부교회.
018-223 하나님을 모시는 정성이 나의 생활의 3분의 2 이상의 比重을 차지해야 된다.
▣ 1975.5.1(목) 청평성지. 모심의 생활
078-030 하나님을 모시는 목적은 어디에 있느냐? 결국은 내가 잘되기 위한 것입니다. 잘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으면 아무리 외적으로 자기가 잘되려고 노력해 봤자, 하나님의 사랑이 머물 수 있는 사람이 못 되어 가지고는 잘될 수 없다는 거예요.
*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단체나 사람은 하나님이 보호한다는 거예요.
*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완전한 사랑을 갖고 오느니만큼 우리가 완전한 무엇을 투입해야 되는 것입니다.
"至誠이면 感天"이라는 우리 한국의 格言이 있지만, 참 그건 천리를 통한 말이라는 거예요. "정성을 들인다" 하는 그 정성 들이는 거기에는 안팎을 다한다는 거예요. 또 언행 심사와 모든 실천, 안팎의 모든 우리 양심 생활권까지도 몽땅 합해 가지고 바친다는 것입니다. 그게 정성이라 이거예요.
* 그렇기 때문에 정성을 들이는 입장에 서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구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 1967.1.29(일) 정성의 예물. 전본부교회.
017-231 하나님을 모시는 것도 개인적으로 모실 것이 아니라 가정의 전체 식구들이 하나 되어 모셔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이상이었습니다. 그런 에덴의 이상이 완성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직접 인간의 생활권에 동참하여 일체감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 1968.6.9(일) 하늘 편에 서자. 전본부교회.
- 방한한 일본 식구 환영식.
020-205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기뻐할 수 있고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자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은, 하나님을 모시는 자리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 삼고 자녀의 입장으로 맺어질 인연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런 모든 인연이 끊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인간은 오늘날 하나님을 비참한 자리에 몰아낸 장본인인 것입니다. 이것을 지금까지 인간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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