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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전통

한국의 성지 - 범냇골

◑ 범냇골 

- 《대중교통 이용 시》

● 버 스 부산역 앞 정류장에서 87번 버스 승차 → 안창마을 입구 정류장 하차(20분 소요)

● 지하철 ⑴ 범내골역 5번 출구 춘해병원 앞 마을 버스정류장(마을버스 1번 승차) → 안창마 을 입구 정류장 하차 ⑵ 범내골역 7번 출구 시내버스 정류장(시내버스 29번 승차) → 안창마을 입구 정류 장 하차 《차량 이용 시》 범곡 교차로(구 교통부 로터리) → 범일초등학교 → 안창마을 입구

 

* 원리원본 집필과 전도

북한의 흥남 특별노무자수용소에서 옥고를 치르시던 참아버님께서는 6·25 전쟁으로 하늘의 보호와 인도하심 속에 극적으로 출감하시게 되었다. 출감 후 남하하신 참아버님은 1951년 1월 27일 제자 김원필 선생과 함께 부산 초량역에 도착하셨다.

 

이후 곽노필(서울 흑석동 시절 친구) 선생, 엄덕문(일본 유학시절 친구) 선생과 만나 그들 집에서 잠시 머무시다가 제3 부두에서 노동을 하며 생활하셨다. 4월 하순부터는 흥남감옥 옥중 제자 김원덕 씨 집에서 20여 일간 머무르셨다. 참아버님은 이곳에서 『원리원본』 집필을 시작하셨다. 5월 중순부터는 김원필 선생과 나가야(長屋, 일제강점기 전기회사의 사택, 범냇골 입구)로 옮겨 하숙하셨고 1951년 8월에 범냇골 토담집을 손수 지으셨다. 이곳에서 는 1953년 1월, 수정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1년 6개월간 생활하셨다. 참아버님께서는 1952년 5월 10일 『원리원본』 집필을 마치셨고 이날 토담집으로 찾아온 강현실 전도사를 만나 전도하셨다.

 

지금 토담집 자리에는 범냇골기념관(범일전, 1976년 12월 23일 개관) 이 세워져 그 시절을 기념하고 있다. 기념관에는 토담집에서 사용하던 램프 (진품은 별도 보관), 좌식 책상, 참아버님께서 쓰신 휘호 ‘범일전(凡一殿)’, ‘일도지원 일심일념(一道之源 一心一念)’(1976.12.23.), ‘부원지성도 성도 지복음(釜源之聖道 聖徒之福音)’(1965.1.26.) 등이 전시돼 있다.

 

한편, 참아버님께서 미국 댄버리 형무소에 수감되신 다음 해인 1985년부터 1987년까지는 미국의 성직자 약 7,000명이 범냇골 성지를 순례하며 정성을 들였다. 범냇골 기념관에서 도보로 10분가량 오르면 눈물의 바위가 있다.

 

눈물의 바위 옆 안내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본성지, 이곳은 인류 구원과 세계평화 그리고 남북통일을 위하여 문선명 선생께서 눈물로 기도하셨던 곳으로서 세계 40여 개국의 돌을 가지고 오셔서 묻고 본성지로서 축복하신 자리입니다.”

 

눈물의 바위에서 조금 더 오르면 참아버님께서 명상하시고 쉬셨던 바위가 있고 위로 더 가면 제1성지에 오를 수 있다. 제1성지에는 참부모님을 상징하는 두 개의 탑이 있다. 2001년 7월 3일 참어머님께서는 이 산을 "천부산"이라고 명명하셨다.

 

비석에는 "천부산 천주 제1성지(天父山 天宙 第一 聖地), 이곳은 문선명 선생께서 1951년 1월 27일 부산에 오시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특별 사명을 수행하시던 중 기도하시던 장소입니다."라고 새겨져 있다.

 

*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p.131-137, 김영사)

범일동에 있는 범냇골로 올라가 집을 지었습니다. 범냇골은 공동묘지 근처라 돌투성이 골짜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내 땅이라고는 가 진 게 없으니 산비탈을 비스듬히 다져 집터를 만들었습니다. 삽도 없어 남의 집 부엌에서 부삽을 몰래 꺼내 쓰고는 주인 모르게 가져다 놓았습니다.

 

김원필과 함께 돌을 쪼개고 땅을 파고 자갈을 날랐습니다. 흙과 짚을 이겨 만든 벽돌로 벽을 쌓고 미군부대에서 얻은 레이션 박스의 네 귀퉁이를 뜯어 지붕을 얹고 방바닥에는 검은 비닐을 깔았습니다.

 

바윗돌에 기대어 지은 집이라 방 한가운데 바위가 툭 솟아 나와 있었습니다. 비가 오면 방에서 샘이 솟았습니다. 앉은자리 밑으로 물이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아주 낭만적인 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향해 가는 길이었기에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희망만이 가득했습니다. 김원필이 미군부대에 출근을 할 때면 산 아래까지 따라 나갔습니다. 저녁이 되어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도 마중을 갔습니다. 그 외의 시간엔 잠도 안 자고 연필을 깎아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원리원본을 썼습니다. 쌀독에 쌀은 없어도 방안에 연필은 가득했습니다.

 

원리원본을 탈고하던 날 나는 연필을 내려놓으며 "이제는 전도할 때이니 전도할 성도를 보내주십시오"’라고 기도를 드린 뒤 우물가로 나갔습니다. 그때 한 젊은 여자가 이마에 맺힌 땀을 씻으며 우물가로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녀는 내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인사를 마친 뒤 집에 들어온 그녀가 누추한 방안을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둘러보더니 앉은뱅이책상 위를 눈여겨보고 물었습니다. "웬 몽당연필이 저리 많은가요?” “제가 오늘 아 침까지 우주의 원리를 밝히는 책을 썼습니다. 그 말씀을 듣게 하려고 하나님이 전도사님을 여기까지 보내신 거지요”

 

나는 방석을 내어주며 그녀를 앉으라 하고 나도 앉았습니다. 우리가 앉은자리 밑으로 샘물이 졸졸 거리며 흘렀습니다. “한국 땅은 앞으로 온 세계의 산봉우리와 같은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한국인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할 때가 올 겁니다.”

 

내 말에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습니다. “앞으로 예수님은 엘리야가 세례 요한으로 나타난 것처럼 육신을 쓰고 한국 땅에 오실 것입니다.”라는 말에 급기야 그녀는 발끈 화를 내며 “예수님이 오실 데가 없어서 이 비참한 한국에 오신단 말이에요” 하며 대들었습니다.

 

강현실은 신학을 공부한 사람답게 성경구절을 줄줄이 외며 나를 공격했습니다. 얼마나 야무지게 대드는지 나도 기차 화통 같은 소리로 일일이 응대하기 바빴습니다. 토론이 길어지고 밖이 어두워지자 내가 저녁밥을 지었습니다. 반찬이라야 시어 빠진 김치뿐이었지만 물소리가 졸졸 나는 방에 앉아 그 밥을 둘이 다 먹고 또다시 토론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또 다음날도 계속 올라와 나와 토론을 벌이더니 강현실은 마침내 범천교회를 떠나 우리 교회의 식구가 되었습니다. 

 

 자네가 내 인생의 큰 스승이네. 자서전 131

임진강을 건너 서울, 원주, 경주를 거쳐 부산에 도착한 날이 1951년 1월 27일이었습니다. 부산 바닥은 피난 내려온 사람들로 북새통이었습니다.

 

조선 팔도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는지 사람이 살 만한 데는 처마 끝까지 다 들어차서 궁둥이 하나 집어넣을 곳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밤에는 숲 속으로 들어가 추위를 피하고 낮에는 밥을 얻으러 시내로 내려왔습니다.

 

그새 감옥에서 깎은 머리가 수북이 자라 있었습니다. 안쪽에 이불솜을 대고 꿰맨 바지저고리가 너덜너덜했고, 옷에는 기름때가 배어 비가 오면 빗방울이 또로록 구를 지경이었습니다. 신발도 뚜껑만 달려 있을 뿐 바닥은 거의 남지 않아 맨발로 걷는 것과 같았습니다. 

 

* 밥을 얻어먹으면서도 나는 항상 당당했습니다. 눈치도 빨라서 한눈에 밥을 안 줄 것 같은 사람에게는 "이봐, 우리 같은 어려운 사람을 도와줘야 나중에 복을 받는 거야" 하고 도리어 큰소리를 치며 밥을 얻어냈습니다. 그렇게 얻어 온 밥을 양지바른 데 빙 둘러앉아 수십 명이 나눠 먹었습니다.    

 

* 엄덕문의 단칸방을 나온 나는 부산 4부두에서 밤에만 하는 막노동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일한 돈을 받으면 초량역에서 팥죽을 사 먹었습니다.

 

뜨거운 팥죽이 식지 않도록 팥죽통은 하나같이 누더기 이불로 꽁꽁 싸여 있었습니다. 나는 팥죽 한 그릇을 사 먹으면서 그 통을 한 시간도 넘게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부두에서 밤새 일하느라 꽁꽁 얼어붙었던 몸이 사르르 녹았습니다. 

 

* 그 무렵 나는 초량의 노무자 수용소에 숙소를 잡았습니다. 방이 어찌나 작은지 對角線으로 누워도 벽에 발이 닿았습니다. 그래도 그 속에서 연필을 깎아 정성스레 원리원본의 초고를 썼습니다. 생활이 구차하다는 건 아무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비록 쓰레기 구덩이 속에서 살아도 뜻이 있으면 못할 것이 없는 법입니다. 

 

* 그러던 중 범일동에 있는 범냇골로 올라가 집을 지었습니다. 범냇골은 공동묘지 근처라 돌투성이 골짜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내 땅이라고는 가진 게 없으니 산비탈을 비스듬히 다져 집터를 만들었습니다. 삽도 없어 남의 집 부엌에서 부삽을 몰래 꺼내 쓰고는 주인 모르게 가져다 놓았습니다. 김원필과 함께 돌을 쪼개고 땅을 파고 자갈을 날랐습니다.   

 

* 판잣집도 그런 판잣집이 없었습니다. 바윗돌에 기대 지은 집이라 방안 한가운데 바위가 툭 솟아 나와 있었습니다.

 

* 비만 오면 방에서 샘이 솟았습니다. 앉은자리 밑으로 물이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아주 낭만적인 방이었습니다.

 

비가 새고 물이 흘러가는 냉방에서 자고 나면 콧물이 질질 흘렀습니다. 하지만 단 한 평이라도 그렇게 마음 편히 낸 몸을 누일 곳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데다가 하나님의 뜻을 향해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희망만이 가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