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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노정

일본 유학 1941.4.14~1943.9.30 와세다대학 부속 와세다고등공학교 전기공학과(제25회) 2년 6개월.

* 1934. 정주 사립 오산 보통학교 3학년 편입. 5학년으로 월반.

* 1935. 몰음마을 덕흥 장로교회 입교.

* 1935.4.~1938.3.25. 정주 공립 보통학교 4학년 진학.

* 1935,4,17. 소명

* 1938.4.~1941.3. 흑석동 중학시절 -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 수학

* 1941.3.31 14;10 發 경부선 ひかり号 列車를 타고 서울역을 떠났다.

* 1941.4.1. 새벽 2시, 부산 부두 晶慶丸 일본으로 출발.

* 1943.9.30 와세다대학 부속 와세다고등공학교 전기공학과 졸업.

- 애국

- 원리 규명

- 원수 사랑 실천

- 자아 주관 수행. 1일 2식. (1965.2.9. 일본어 宇宙主管願う前に我を主管せよ)

* 1943.10.5. 01:15. 곤론마루 피격 사건.  

* 1943.10 중순 귀국.   

* 1943.12. 맞선. 약혼.

* 1944.2. 만주전업 행 변경. 곽산 방문.

* 1944.3. 가시마구미 경성지점 전기부 취직.

1944.5.4. 최선길 씨와 성혼. 이호빈 목사 주례.

 

▣ 일본 유학시절. 자서전

- 1941년 4월 1일 새벽 2시 부산항에서 관부연락선을 탔다.

- 와세다 대학 와세다 고등 공학교 전기공학과.

 

83 서울에서처럼 도쿄에서도 안 가 본 데 없이 구석구석 돌아다녔습니다. 친구들이 닛코와 같이 경치 좋은 곳을 구경 갈 때에도 홀로 남아 도쿄 시대 곳곳을 걸어 다녔습니다. 겉은 번드레했지만 도쿄 시내에도 가난한 사람들 천지였습니다. 나는 집에서 보내주는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었습니다.

 

그 시절은 모두들 배가 고팠습니다. 유학생들 중에도 苦學生(학비를 스스로 벌어서 고생하며 공부하는 학생.)이 많았습니다. 나는 한 달치 식권이 나오면 모두 들고 나가 고학생들에게 주며 "먹어라, 마음껏 먹어라." 하며 다 써 버렸습니다.

 

나는 돈을 버는 것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아무 데라도 가서 노동을 하면 밥은 먹을 수 있었으니까요. 돈을 벌어서 형편이 어려운 학생의 학비를 도와주는 것도 나의 낙이었습니다. 그렇게 남에게 도움을 주고 밥을 먹이면 온 몸에서 힘이 펄펄 났습니다.

 

내가 가진 돈을 모두 나눠준 다음에는 리어카로 배달하는 일을 했습니다. 도쿄 시내 27개 구역을 리어카로 누비고 다녔습니다. 불빛이 화려한 긴자 사거리에서 리어카에 전신주를 싣고 가다 뒤집혀 사람들이 혼비백산 달아난 적도 있습니다. 덕분이 지금도 도쿄 구석구석을 손바닥 들어다 보듯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나는 노동자 중의 노동자요 노동자들의 친구였습니다. 땀내와 지린내가 진동하는 그들처럼 나 또한 노동판에 나가 진땀을 흘리며 일했습니다. 그들은 나의 형제였고 그래서 지독한 냄새로 싫지 않았습니다. 새까만 이가 열을 지어 기어가는 더러운 담요도 그들과 함께 덮었습니다. 때가 켜켜이 낀 손도 주저 않고 마주 잡았습니다. 땟국물이 흐르는 그들의 땀 속에 끈끈한 정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정이 구수하니 좋았습니다.

 

나는 주로 가와사키 철공소와 조선소에서 막노동을 했습니다. 조선소에서 빠지라고 부르는 석탄을 실어 나르던 통통배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 사람씩 조를 짜서 새벽 1시까지 석탄 120톤을 빠지에 싣는 일을 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사흘 걸려 할 일을 한국 사람들은 하룻밤에 해치웠습니다. 한국 사람의 본때를 보여 주려고 무조건 열심히 했습니다.

 

막노동판에는 노동자의 피땀을 갉아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동자들을 직접 관리하는 조장이란 자들이 흔히 그렇습니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힘들여 번 돈의 3할을 떼어 자기 주머니를 채웠지만 힘이 없는 노동자들은 항의 한번 못했습니다. 조장은 약한 자를 괴롭히고 강한 자에게 빌붙는 인간이었습니다.

 

85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던 나는 삼총사 친구들을 불러모아 조장을 찾아가 "일을 시켰으면 시킨 대로 돈을 지불하라"고 대들었습니다. 하루로 안 되면 이틀 사흘 될 때까지 따지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영 말을 듣지 않자 내 큰 덩치로 발차기를 해 조장을 날려버렸습니다. 나는 본래 말도 없고 유순한 사람이지만 화가 나면 어릴 적 고집쟁이 기질이 살아나 확 걷어차 버리기도 잘합니다.

 

가와사키 철공소에는 유산 탱크가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유산 탱크를 정화하기 위해 탱크 속에 직접 들어가 원료를 쭈욱 흘려 보내는 일을 했습니다. 유산이 얼마나 독한지 그 속에서는 15분 이상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노동자들은 밥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일했습니다. 밥이란 목숨과도 바꿀 만큼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늘 배가 고팠지만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나를 위해 밥을 먹지는 않았습니다. 밥을 먹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매 끼니마다 배고픈 이유를 스스로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진정으로 피땀 흘려 일했는가? 나를 위했는가, 공적인 일을 위했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밥그릇을 대할 때마다 "너를 먹고 어제보다 더 빛나고 공적인 일을 해 줄게." 하면 밥이 나를 보고 웃으며 좋아했습니다.

 

그럴 때 밥 먹는 시간은 무척이나 신비롭고 기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굶었으니 하루 두 끼를 온전히 찾아 먹는 날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86 본래 먹는 양이 적어서 하루 두 끼로 견딘 것은 아닙니다. 한창 젊은 나이라 나도 먹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습니다. 큰 그릇에 담긴 우동을 열한 그릇까지 먹어 봤고 닭고기 계란덮밥 일곱 그릇이나 먹은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식성이 좋은데도 점심을 거르고 하루에 두 끼만 먹는 습관을 서른 살이 넘도록 고집했습니다.

 

배가 고픈 것은 그리움입니다. 나는 배고픈 그리움이 무엇인지 잘 알지만 세계를 위해서 밥 한 끼쯤은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새 옷은 입어 본 적도 없습니다. 아무리 추워도 방에 불을 때지 않았습니다. 몹시 추울 때 신문지 한 장은 비단이불처럼 따뜻합니다. 나는 신문지 한 장의 가치를 잘 압니다.

 

어떤 때는 아예 시나가와의 빈민굴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누더기를 뒤집어쓴 채 잠들고 햇빛이 좋은 한낮이면 이를 잡으며 거지들이 얻어온 밥을 나눠 먹었습니다.

 

시나가와의 거리에는 떠도는 여자들도 많았습니다. 한 명 한 명 사연을 들어주다 보니 술 한 모금 마시지 못하는 내가 어느새 그들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술을 마셔야 본심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공연한 핑계입니다. 술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그녀들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내 마음이 진심인 것을 알게 되자 그녀들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일본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는 정말 별의별 일을 다했습니다. 빌딩의 小使(관청이나 회사, 학교, 가게 따위에서 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고용한 사람.) 노릇도 했고 글을 대신 써 주는 筆生(글씨를 베끼어 써 주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노릇도 했습니다. 노동판에 나가 노동을 하고 현장감독도 했으며 남의 사주를 봐 주기도 했습니다. 궁하면 글씨를 써서 팔기도 했습니다.

 

87 그래도 공부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런 것이 모두 나를 단련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별의별 일을 다 하고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 보았는데 그런 과정을 통해서 사람에 대하여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사람을 척 보면 "아, 무엇을 하는 사람이겠구나." "아, 좋은 사람이구나." 하고 대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내 머리가 이렇다 저렇다 생각하기 전에 내 몸이 먼저 알아 버리는 것입니다.

 

88 나는 도쿄에서 노동자들과 같이 먹고 자면서 또 거지들과 배고픈 서러움을 함께 나누면서 고생 왕초 고생 철학박사가 되어 보고 나서야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서른 살 이전에 고생 왕초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생 왕초, 고생 철학박사가 되는 것이 하늘나라의 영광을 독차지하는 길입니다.    

 

◑ 1941.3.31 14;10 發 경부선 ひかり号 列車를 타고 서울역을 떠났다.

- 1941.4.1. 새벽 2시, 부산 부두 晶慶丸 일본으로 출발.

 

1. 서울에서 부산까지 8시간 기차 안에서 눈이, 코가, 입술이 붓도록 통곡했다.

 

1) "불쌍한 이 민족을 누가 책임지겠는가

 

▣ 1964.10.5(월) 한 많은 하늘땅. 광주교회.

154-346 이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데는 누구보다 그 이상으로 기도하는 사람이에요. 지하운동을 하는 데도 누구보다도 뭐, 내가 일본에 가서 구경을 안 다닌 사람이에요. 친구들이 와 가지고 쓱 이리저리 다니는 걸 좋아한단 말이에요. 그렇지만 나는 일본에 들어가 가지고 원수의 나라에 가 가지고 그 나라의 경치 한번 보지 않았다구요.

 

왜? 내가 내 나라를 돌아보지 못했고 내가 서울을 떠나 일본에 갈 때 下關까지 눈물을 흘리면서 간 사람이에요. "내가 올 때까지 잘 있거라. 누가 너를 눈물로 지켜 주고 누가 하늘 앞에 남모르는 가운데서 눈물과 더불어 기도해 주겠느냐." 하며 울었습니다.

 

어렸을 때 그랬어요. 어렸을 때. 내가 돌아올 때는 멀지 않아 이 나라에 해방이 올 것을 알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랬다구요.때가 가면 참은 남아지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들 부디 지치지 말고 죽지 말고 하늘의 한의 일편이라도 자기 몸에 짊어지고 한 고비 조그만 고비라도 가정적인 고비라도 넘어가고 종족적인 고비라도 넘어가고 민족적인 고비라도 넘어가자는 겁니다.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국가적인 고비에서 이 세계를 향하여 넘어가야 할 사명적인 책임이 있고 힘든 이 모진 길을 가야 할 운명에 있으니 한의 일편을 덜어 주기 위하여 가자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부디 죽지 말고 남아지는 여러분이 되기를 부탁합니다. 알겠지요? 자, 그러면 그러고 싶은 사람, 손들어 보소. 내리세요.

 

▣ 1987.5.1(금) 남북통일의 기수가 되자. 한남동. 한국 지도자.

163-299 내가 동경을 향해 떠날 때 서울역에서부터 부산역까지 달리는 그 기차 안에서 눈에 눈물이 어려 가지고 한강 철교를 지나면서 눈물이 떨어지고 떨어지고 하던 때가 엊그제 같다구요. 

 

"내가 실패의 사나이로 끝나지 않겠다. 대한민국에 있어서 민중의 새로운 정부를, 미래의 하나의 사랑의 도시를 건설하겠다"고 했어요.   

 

2) 서울역에서부터 하관下關까지 오버를 쓰고 통곡을 하고 간 것이 몇 시간이었더냐.

 

▣ 1971.1.10(일) 인생의 갈 길. 수원교회.

039-201 선생님은 애국자였습니다. 왜정 때에는 어느 누구보다도 나라를 위해서 눈물을 많이 흘린 사람입니다. 일본으로 가기 위해 부산 부두로 갈 때에 서울역을 떠나면서부터 통곡을 하며 갔습니다. 지금도 한강의 철교를 지날 적마다 20대 청년시절에 눈물을 흘리며 떠나던 그때의 기억이 어제같이 느껴집니다.

 

불쌍한 이 민족을 위하여 밤을 새우면서 생명을 걸고 기도해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부산 부두를 떠나면서 눈물을 흘리던 일, 일본에 가 가지고도 밤을 새워 가면서 기도하던 그러한 사실들이 생각납니다. 그렇게 하면서 지금까지 나온 것입니다.  

 

▣ 1983.5.1(일) 복귀 섭리의 회고. 리틀엔젤스 예술회관.

127-030 내가 일본 갈 때, 서울역에서부터 하관下關까지 오버를 쓰고 통곡을 하고 간 것이 몇 시간이었더냐.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 나는 "하나님, 뜻 가운데서 당신이 갈 수 있는, 발돋움해 갈 수 있는 굄돌을 놓기 위해 사랑의 정열에 불타는 심정이 녹아나 가지고 흐르는 눈물 자국을 통해야 된다는 것을 내가 알았사오니 그런 길을 가게 해 주소서" 이런 기도를 한 거예요.

 

높은 자리에 안 찾아갔다구요. 빈민굴로부터···.  인간의 말단 자리에서부터 더듬어 갔습니다. 그 세계의 생활고에 허덕이는 인간상을 다 알고···. 어떤 분야든지 다 거쳤습니다. 노동도 해 봤고 농사도 지어 봤고 뱃꾼노릇도 해 봤고 안 해 본 것이 없습니다.

 

"내 일생의 천추의 한과 당신의 서글픈 모든 것을···, 6천 년 한을 품고 온 당신의 심정에 그 무슨 한이 남아 있거든 이 지식 하나 때려놓고 천만 대 때려놓고 풀 수 있다 할진대 그렇게 하시옵소서" 하면서 나온 거예요. 그런 길을 찾아 나온 나를 하나님을 "너를 사랑한다"는 얘기는 좀처럼 안 하십니다.

 

▣1967.12.10(일) 승패는 순간에 결정된다. 전본부교회.

019-029 부산으로 가는 차를 타고 가다가 한강을 바라보게 되면 옛날에 선생님은 큰 뜻을 품고 일본을 향하여 가기 전에 한강을 바라보면서 비장한 각오를 하던 것과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갈 때 바다를 바라보면서 비장한 결의를 하던 것을 잊을 수 없다.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있을 때 동정하며 오버를 덮어 주던 일본 부인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2. 1941년 4월 1일 새벽 두 시에 부산 부두에서 한국을 바라보며 기도

 "내가 지금 비록 떠나지만 너를 더욱더 사랑하고 너를 위하여 더 많은 눈물을 흘려 주마"

 

▣ 1969.2.2(일) 나의 뜻과 신념. 전본부교회.

- 제2차 세계 순회 노정을 떠나시기 앞서.

 

022-120 선생님이 1941년도에 일본에 유학을 가기 위해서 부산을 향해 서울역을 떠날 때 서울 장안을 바라보면서 불쌍한 이 민족을 누가 책임지겠는가를 생각하며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지금도 한강변에 가면 불쌍한 이 민족이 해방되는 한날을 위해 눈물 흘리며 붙들고 기도하던 바위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은 되었지만 이 민족은 아직도 불쌍한 민족으로 남아져 있습니다.

 

022-122 일본에 갈 때는 보통 부산에서 배를 타고 가는데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기차로 8시간 걸립니다. 나는 그때 기차를 타면서부터 오버를 뒤집어쓰고 통곡을 했습니다. 눈물이 끊이지 않아서 눈이 붓고 코와 입술이 붓도록 울었던 것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오늘 새벽에도 그런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 눈물. 하늘을 사랑하고 싶어했던 그 사연, 이 민족에게 심어 주고 싶었던 젊은 시절의 그 하소연이 이 민족 앞에 기필코 남아질 것을 선생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 민족 앞에 남아지지 않으면 통일의 젊은 가슴 가슴에, 통일을 원하는 사나이의 가슴 가슴에 남아 달라고 선생님이 부탁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선생님에 대하여 비판하는 사람은 그 장래가 편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이러한 통일교회를 비판하고 선생님이 가는 길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논란하는 사람들은 큰 회개를 해야 될 것입니다.

 

* 이 민족을 위해 눈물을 흘린 것으로 말한다면 선생님은 어느 애국자보다 더 많이 흘렸습니다. 선생님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던 1941년 4월 1일 새벽 두 시에 부산 부두에서 한국을 바라보며 기도하던 것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비록 떠나지만 너를 더욱더 사랑하고 너를 위하여 더 많은 눈물을 흘려 주마"고 약속했던 것입니다.  

 

022-123 또한 선생님이 일본의 궁성을 지나게 될 때 나라를 잃어버리고 민족을 잃어버린 한을 품은 외로운 사나이로서 그 궁성을 응시하면서 "이제부터 20년 후에는 하늘이 한민족을 중심 삼고 승리의 깃발을 꽂으실 그날이 오리라"는 것을 선생님은 이미 알고 하나님께 기도했었습니다.

 

"지금은 네가 우리 민족을 핍박하지만 앞으로는 반대로 내가 명령만 하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너를 향하여 이 궁성을 향하여 화살을 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그렇게 다짐했던 것이 25년 만인 1965년도에 이루어졌습니다.

 

3. 일본 천황을 잡아치우는 운동을 했다. 지하운동을 했다. 

 

▣ 1965.11.1(월) 소망의 조국의 슬픔. 광주교회.

- 제1차 세계 순회 마치고.

 

155-315 일본 가서도 선생님은 일본 천황을 잡아치우는 운동을 했어요. 지하운동을 했습니다. 南京과 다리를 놓아 가지고, 그런 얘기하면 참 여러분이···. 참 아슬아슬한 무엇이 많았습니다. 마, 그건 그만두자구요.

 

나라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슨 뭐 하늘을 사랑한다구요? 내, 앞으로 이제 전부 다 한번 재심사를 하려고 합니다. 나라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 하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 1970.9.20(일) 통 일신도의 갈 길. 춘천교회.

034-353 선생님은 공산세계에서 감옥에까지 들어가 보았기 때문에 공산세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왜정시대에 선생님은 일본 동경에서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백주에 지하운동을 한 사람입니다. 그때 선생님은 미래에는 그들과 원수 사이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참 서러운 일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들의 아픔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공산주의자들이 원수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에 앞서 일본이 우리들의 원수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별의별 일을 다 했던 것입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이렇게 나온 것입니다.

 

4. 학창 시절에 한국을 바라보며 울 때가 많았다.

 

▣ 1967.8.13(일) 萬民之願 統一世界. 전본부교회.

018-334 선생님이 외국 갔다 와서 김포비행장에 내려서 한국을 바라보며 가슴이 아파 속으로 울었습니다. 선생님은 學窓(배움의 창가라는 뜻으로, 공부하는 교실이나 학교를 이르는 말.)時節에 한국을 바라보며 울 때가 많았습니다. 그때에 이 뜻을 이 민족과 세계 앞에 세워야겠다는 계획이 그대로 되었다면 지금 이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50이 가까워 오는 지금 또다시 가슴이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이 학창 시절에 세웠던 계획대로 되었다면 아마 이렇듯 황폐한 나라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민족이 통일교회를 몰라보니 선생님의 힘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만일 한국에 통일교회가 없었다면 한국의 앞날은 단 하루도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동양에 통일교회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일본이 제아무리 노력해도 공산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현재 통일교회에 속한 여러분에게는 이 민족을 살려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개척자의 사명을 견지해 나가야 되겠습니다. 또 하루하루를 정리하면서 내일의 승리를 위해 달려갈 것을 맹세해 주기 바랍니다.

 

 5. 나라 없는 백성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1971.10.9(토) 중앙수련원.  국가와 우리의 사명.

- 전국 사업소장 수련회.

 

049-159 나라 없는 백성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나라 없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때 내가 원수의 나라 일본으로 떠나면서 대한민국을 바라보고 눈물 흘리던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아요. 한강 다리를 지나면서 눈이 통통 붓고 코와 입술이 아프도록 울었어요.

 

관부 연락선을 타고 일본에 도착한 날이 3월 21일이에요. 그때부터 나라를 중심 삼고 일본에 가 가지고 별의별 일을 다 했습니다.
나라 없으면 못 삽니다. 여러분, 나라가 있어요?  원수의 나라에서 아내를 사랑할 수 있어요? 사랑했다가는 그 길을 망치는 것입니다.

 

6. 이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길이 뭐냐?

 

▣ 1990.2.17(토)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라. 국제연수원.

- 세계일보 과장 이상 간부.

 

199-213 내가 소년 시대 8살 10살 때부터 우리 집안에는···. 우리 증조부가 이승훈 씨, 최남선 씨 같은 3.1운동의 주역인 5인들과 친구입니다. 이 박사도 친구고 말이에요. 그분은 일제와 투쟁하다 감옥살이를 하고 그랬다구요. 그랬기 때문에 일경들이 우리 집을 언제나 주시했습니다.

 

그런 걸 보게 딜 때 "누가 우리 집을 이렇게 못살게 하고 이 나라를 이렇게 못살게 해? 우리 할아버지나 내가 알고 있는 다른 애국 동지들을 보면 누구보다도 나라를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이 왜 나라를 갖고서 사람 행세를 못하고 밤에 몰려다니면서 쑥덕공론을 해야 돼?" 그런 것이 참 의문이었다구요.

 

"이 나라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 이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길이 뭐냐?" 하는 걸 그때부터 생각했어요. "이 나라가 일본보다도 센 나라였다면, 강한 나라였다면 이렇게 안 되었을 것이다" 하는 걸 알았지요. 문제는 그거예요. 약하기 때문에 약한 배경과 약한 기반에 서 있기 때문에 비참한 운명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어요.

 

그때 마음으로 생각한 것이 뭐냐? 세계 제일의 강국이 어느 나라냐? 그건 미국이다. 그때 벌써 미국이란 걸 알았어요. 그러면 미국이 일본보다 다 큰 나라인데 미국도 일본이 하는 놀음과 같이 자기 국권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약한 나라를 점령해 가지고 이런 일을 하느냐 안 하느냐? 마찬가지다. 한다!

 

그러면 정의의 국가, 이 세계를 대표해서 정의의 자리에 서서 강한 나라는 약한 나라를 보호하고 키워 줄 수 있는 그런 정의의 나라는 없느냐? 어릴 적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요. 만약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무엇이 있다 할 때는···.

 

그러나 인간 세계에서는 역자적으로 볼 때 그거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일에 창조주가 있다면 창조주는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그럼 나라를 살리고 이런 압박받는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창조주가 있다면 절대자가 있다면 그 절대자를 잡아서 이 일을 성사시키겠다 한 것입니다. 거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내가 기독교니 무슨 교니 종교를 통해 가지고 주 욱 탐사했어요.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님을 내가 한번 만나야 되겠다 이겁니다.

 

그러면서 10대를 지나고 20대를 향하면서 신앙적 노정에서 여러 가지 고민도 했어요. 그러면서 일본에 가 봐야 되겠다. 일본을 거쳐서 미국을 갔다 와야 되겠다. 현지에 가 가지고 약소민족이 서러움을 당하고 핍박을 받는 것이 어떻다는 것을 체험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있다면 내가 바라는 뜻을 성사시킬 수 있는 모험을 하는 대표자로 등장해야 되겠다고 한 것입니다. 모험해야 돼요. 출세를 바라는 사람은 모험을 할 줄 알아야 됩니다.   

 

7. 나라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늘을 사랑할 수 없는 것다.

▣ 1971.1.9(토) 뜻이 가야 할 길. 강릉교회.

039-962 부산 부두에서 일본을 향해 떠날 때가 1940년 3월 31일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인가? 30년 전이구만. 새벽 2시 40분에 떠났는데 그때의 심정을 나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일본에 가서 지하운동을 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 동지들은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여 김구 선생과 같이 운동하기 위해 관부연락선을 타고 다녔고 부산에서부터 신의주까지 다니면서 항일운동을 했습니다. 선생님도 생명을 걸고 그런 일을 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 와세다대학 부속 와세다고등공학교 전기공학과 입학 

 

1. 와세다 대학에 서클을 많이 만들었다. 

 

▣ 1972.5.10(수) 개척자의 길. 제3차 세계 순회 후. 중앙수련원.

056-018 내가 일본의 와세다 대학에 서클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공산당들이 학생들을 전부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때려치우기 위해서는 서클을 많이 만들어야 하는 거예요. 이것이 들어맞았다고요.

 

法科면 법과에 해당하는 특별한 교수를 추대해 가지고 서클을 만들고 商科면 상과, 각 과별로 전부 다 서클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아이디어를 생각하지 못했는데 서클이 생기니 그 책임자는 열심히 하는 거라구요. 교수도 데리고 다니고.

 

20개 서클만 되면 한 서클에 10명씩만 해도 200명이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대학교 전체 행사 때는 서클을 중심 삼고 "전부 집합!" 명령을 하게 되면 아무 준비도 안 했지만 한꺼번에 수백 명도 모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회합을 만들어 가지고 학교 내의 저명한 교수가 아무 강당에서 이러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강의를 했는데 전교 학생들이 들을 만한 것이라고 해 가지고 교수는 홀딱 반해 들어가는 거라구요. 이름나는 것이 교수들의 제일 욕망이거든요. 일본에서 서클 활동을 강화사키는 것과 같이 여러분도 다방면에서 그런 활동을 전개해야 되는 거라구요.

 

2. 내 머리가 얼마나 큰지 학생시대에 모자가 맞는 게 없었다. 맞는 모자가 일본 전국을 찾아도 없었다.

- 할 수 없이 뒷꽁무니를 칼로 째 가지고 썼어요. 

 

▣ 1972.11.12(일) 기필코 가야 하겠습니다. 중앙수련원.

- 제4차 세계순회 환송집회. 서울, 경기, 강원 식구.

 

064-264 선생님을 보게 되면 머리는 작아 보이지만 일본에서 공부하던 학창시절에 머리에 맞는 모자가 없어서 전국에서 주문해 가지고 제일 크개 해온 모자도 작아서 두 번이나 물러 가지고 썼다구요. 머리가 작은 것 같지만 굉징히 큰 편이라구요.

 

된장 독이 크다면 된장이 많이 들어가는 거라구요. 머리통이 크다면 머리 안에 뭔가? 뭐예요? 뇌수腦髓가 많이 들어갈 거라구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되면 생각할 수 있는 면적이 많아질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별의별 생각을 다한 사나이다 이거예요.

 

▣ 1975.12.28(일) 역사적인 시점을 사수하자. 전본부교회.

081-187 짐승치고 얼굴이 커 가지고 왕초되지 않은 짐슴이 없어요. 생각해 보라구요. 제일 큰 짐승이 뭐예요? 사자, 또 그다음에는 호랑이입니다. 호랑이도 크다구요. 호랑이보다 큰 대가리를 가진 것이 뭐예요? 소는 안 되고, 소는 몸체에 비해 작아요. 그렇기 때문에 머리가 큰 녀석이 왕초 노릇합니다.

 

* 생각해 보라구요. 그렇다구요. 선생님 머리가 대표적이라구요. 머리가 크다구요. 학생 시절에도 큰 모자점에 가서 제일 큰 것을 사 가지고도 두 번, 세 번···. 그래도 안 맞게 되면 째 가지고 떡 이렇게 쓰고 다녔다구요.

 

나쁜 소문만 남기고, 좋지 않은 사람의 이름은 붙었지만 그래도 통일교회 왕초 노릇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눈이 커서 그런 것이 아니라구요. 내 눈은 작다구요.

 

▣ 1986.11.23(일) 하나님과 자녀는 안식하소서. 본부교회.

149-244 내 머리가 얼마나 큰지 학생시대에 모자가 맞는 게 없었어요. 맞는 모자가 일본 전국을 찾아도 없었다구요. 할 수 없이 뒷꽁무니를 칼로 째 가지고 썼어요. 

 

그래, 일본말로 내 별명이 많았어요. 그 모든 것이 생각하기 복잡할 정도예요. 얼마나 많은 일을 한꺼번에 해요? 수만 수천 가지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 1990.12.30(일) 70년대를 보내면서, 80년대를 맞는 경계선에 있어서. 본부교회.

211-213 그래, 문 총재 머리가 나쁘지 않습니다. 학생 시절 때도 모자가 전 일본에서 찾아도 없기 때문에 특별히 주문해 가지고도 뒤를 터서 썼어요.

 

된장통이 크고, 된장이 많이 들어가 있다 그 말이라구요. 내가 하는 게 얼마나 많아요? 수십 수천 가지를 앉아서 사무실 하나 없이, 장부 하나 없이 해먹고 있는 거예요. 이젠 실력을 의심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 미국 정부가 문 총재 책임자라고 잡아다 뒤집어 씌우려고 해도 사무실 하나 없고, 전화 하나 없고, 수첩 하나 없이 해 먹으니 어떻게 갖다 씌워요?   

 

▣ 1994.3.12(토) 탕감복귀의 고개를 넘자. 중앙수련원.

- 일본여성특별수련회. 일본어.

 

256-043 선생님의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해요, 좋다고 생각해요? 너무나 좋기 때문에 사탄이 무서워하고 있어요. 선생님의 머리가 좋게 보여요?

 

학생 시절에 일본의 모자 가게에서 제일 큰 모자도 안 맞으니까 맞추었어요. 그거야 뇌수가 많이 들어가 있으니까, 기록의 내용이 많으니까 이러한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선생을 이론적으로 코너에 몰아넣어 가지고 언제나 골탕먹였다.

- 선생님이 강의하면서 내가 일어설까 봐 언제나 힐끗힐끗 보고 그랬었다. 

 

▣ 1986.11.23(일) 하나님과 자녀는 안식하소서. 본부교회.

149-244 내가 누구만큼 못나서 고생을 했어요? 응? 내가 누구만큼 못났어요, 남자 중에? 지금은 늙었지만 젊었을 땐 미남이라는 통칭이 붙었었다구요. 

 

왜? 누구 때문에? 내가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말을 해도, 일을 해도 누구에게 지지 않아요. 學窓 時代에 내가 선생을 이론적으로 코너에 몰아넣어 가지고 언제나 골탕먹였습니다. 선생님이 강의하면서 내가 일어설까 봐 언제나 힐끗힐끗 보고 그랬었다구요. 이렇게 나온 사람이에요. 똑똑한 사람이에요. 

 

▣ 1988.10.16(일) 자신을 지키라. 한남동.

- 축복가정 자녀. 2세.

 

182-157 선생님은 학창시절에 말 안 했어. 내가 나가는 길을 알기 때문에···. 말은 안 하지만 그런 나를 제일 무서워했어. 내가 질문하면 선생님은 대답을 못 해. 그렇게 되면 오히려 그 시간은 쉬는 시간이야. 자꾸 질문해대는 거야. 그러니까 선생님까지도 나를 무서워하고 변소 같은 데 가면 친구들이 모두 같이 와 몰려들다가도 오줌 눌 자리를 내주는 거야. 감옥에서도 그랬다구. 이번 댄버리에서도 그랬다구.

 

▣ 1988.8.22(월) 학사교회의 역할. 한남동.

- 수도권 카프 학사 교회장. 

 

180-277 내가 학생 시절에는 선생님 골탕먹니는 게 참 재미있었어요. 자꾸 질문하거든요. 물리학 공식 얘기하고, 원리 얘기하는데 "선생님이 그거 다 해 봤어요?" 하는 겁니다. "내가 믿을 수 없습니다. 내가 해 보고 나서야 믿습니다" 하는 겁니다. 그런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겁니다. 선생님이 나 보고는 무서워했다구요. 자꾸 들이 대거든요.

 

▣ 1990.6.28(목) 하나님의 참사랑과 3대 주체사상. 대전 리베라호텔.

- 남북통일운동 충청도 방미 연수단 특별집회.  

 

202-326 내가 학생 시절에 내 질문에 대답을 못 해 가지고 도망간 선생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자꾸 질문하니까, "물리학에서 나오는 공식이나 정의는 누가 내렸소? 나 못 믿겠소. 내가 알게끔 설명해 주시오" 그런 사람입니다. 

 

4. 말 안 하고 살았다. 

 

▣ 1994.1.30(일) 참사랑은 모든 이상의 꽃. 본부교회.

253-269 친구들이 자기 비밀을 나한테 다 보고할 수 있는 학생 시절이 있었습니다. 학생 시절에도 말 안 하고 살았습니다. 말 안 하고 살지만, 입을 열게 되면 선생님도 꼼짝 못 합니다. "선생님이 그럴 수 있느냐" 이거예요. 기분 나쁘면 내가 공부를 해 가지고 선생님이 공부하는 책을 다 읽고 질문을 들이 대는 것입니다.   

 

1) 사람들에게 선생님이 어떤 사상을 갖고 있는지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 친구들도 몰랐다. 선생님은 성서를 연구하기도 하고 종교 관계 서적이나 보통 사람들이 잘 읽지 않는 철학서를 가지고 와서 읽었다.

 

▣ 1965.10.8(금) 와세다 대학 원리연구회. ノカタ학사.  

- 선생님의 동경 유학시절

 

015-180 그리고 선생님은 사람들에게 선생님이 어떤 사상을 갖고 있는지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 친구들도 몰랐다. 선생님은 성서를 연구하기도 하고 종교 관계 서적이나 보통 사람들이 잘 읽지 않는 철학서를 가지고 와서 읽었다.

 

와세다대학 정경과에 다니고 있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공산주의를 공부하고 있어서 그 친구와 격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또 노방에서 큰소리로 연설한 적도 있었다. 벚꽃이 만발하여 많은 사람이 모였을 때 그곳에서도 했다. 그 시대에 대한 비판을 했다. "내일의 청년은 이러이러한 식으로 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외쳤다. 그때 예언했던 것이 지금 다 맞아 나가고 있다.

 

그때 친구들이 어정어정 구경 와서는 "어떤 젊은이가 저렇게 열렬하게 호소하고 있지, 대체 누구야?" 하며 머리를 디밀어 보고는 "어이, 누구 아니야!" 하고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교실에서는 말이 없었다. 말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선생님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동급생들은 학교 선생님보다도 오히려 문 선생님을 더 무서워했다. 왜나하면 평소에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문 선생이 학교 선생님한테 한 번 질문을 시작하면 대답을 할 수 없을 때까지 하는 것이다. 선생님이 한 번 일어서서 질문을 시작하면 학교 선생님의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질문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일어서면 모두 얼굴이 빨개지는 거예요. 특히 이론이나 변론 같은 때는 학교 선생님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친구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5. 저녁때 가끔 변장을 하고 동네에 나가서 "인간은 이래야 된다" 하면서 대강연을 하는 거예요.

 

▣ 1997.4.8(화) 중앙수련원.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시대. 

- 전국 공직자 집회. 

 

283-087  선생님이 그걸 유린蹂躪하면 안 돼요. 다 잘 길러 줘야 돼요. 어머니를 찾는 기반을 닦은 후에는 전부 다 여동생으로 키워 가지고  훌륭한 아내로 삼아 주고 훌륭한 어머니로 삼아 줘야 돼요. 그게 복귀 역사입니다.

 

* 학생 시대에도 말이에요, 언제든지 더벅머리로 해 가지고 30대까지는 머리를 이렇게 해 가지고 냄새나는 옷을 입고 다녔어요. 아침에 어느 골목을 지나가면 조상들이 가르쳐 줘 가지고 지키고 있는 여자를 만나는 거예요. 만나서 "당신, 이런 사람 아니오?" 하는 거예요. 이름까지 가르쳐 주고 기다리게 하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런 여자를 함부로 건드리면 안 돼요. 그 사람을 키워 주고 바르게 지도해야 된다 이거예요. 그러니 복귀의 길이 얼마나 힘들겠느냐 이겁니다. 역사 노정에서 그런 현상이 벌어진다는 건 놀라운 사실이라구요.

 

* 선생님이 학생 시절에는 미남이었다구요. 그런데 전당포에서 졸업생들의 학생복을 사 입은 거예요. 땀냄새가 1미터 2미터 3미터까지 풍기는 그런 옷을 사 입고 다녔어요. 여자들이 못 따라오도록 말이에요. 말도 안 했어요. 말을 한 만한 상대가 없었다구요. 친구들도 모두 다 상대가 될 수 없었어요.

 

가끔씩 선생님과 얘기를 하면, 선생님이 공언하는 것을 곤란하게 하는 그런 챔피언이 된다든가 하는 그런 경우는 많이 있었지만 말이에요. 말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구요.남자로서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내용을 못 가지고 입을 열어서 얘기를 해요? 그러니까 침묵이라구요. 

 

그렇지만 저녁때 가끔 변장을 하고 동네에 나가서 대강연을 하는 거예요. 군중들 앞에서 "인간은 이래야 된다" 하면서 강연을 한다구요. 보통 때는 그렇게 볼품없는 모양을 하고 다니지만 그럴 때는 깔끔하게 차려입고 모자도 쓰고 당당하게 얘기하는 거예요. 

 

누구든지 훌륭한 강연이라고 생각하고 듣는데 강연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요. "아, 이상하다. 저거 문 씨 같은데 정말이야, 아니야? 저렇게 몰라보게 변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하다" 하면서 듣는 거라구요. 그리고 아침에 학교에 오면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학생시절에는 신비한 남자였다구요. 그런 뭐가 있었습니다.  

 

 극장 같은 데 가면 여자들이 옆에 앉아서 자기도 모르게 선생님의 손을 잡는다구요. 그때는 20대의 미남자였어요. 정말이라구요. 선생님이 지금도 사진을 보면 "이야!" 하면서 키스라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그 당시 여자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구요. 일본 여자든 서양 여자든 선생님한테 반하게 되어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거예요.

 

283-090 서양에서도 그렇습니다. 서양 여자들이 선생님의 방문을 노크하는 것은 보통이에요. "선생님!" 하고 부르면 "뭐야, 이거. 12시다" "용건이 있습니다" "무슨 용건이야, 이 녀석?" 하고 문을 잠가 놓고 안 열어 주는 거라구요. 용건이라고 해 봐야 한 가지 밖에 없어요.  선생님이 좋으니까 키스라도 해 주기를 바란다구요. 안 해 주면 자기가 키스해서 선생님의 볼때기를 물어뜯어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생님 주위에 1미터 이내로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를 한 것입니다. 

 

* 어느 누구든지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 여자도 우주적인 어머니의 후보가 될 수 있었다는 거예요. 10대부터 70대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대표한 여자들 가운데서 어머니를 택한 거라구요. 모든 여자들이 사방팔방에서 선생님을 유혹한 거예요. 선생님을 어떻게든 속여서 어떻게 해 보려고 했지만 그렇게 쉽게 안 되는 것입니다. 전부 다 여자가 넘어가 버리는 거예요. 여자가 넘어갔다고 해서 무슨 나쁜 짓을 했다는 말이 아니라구, 이 녀석들! 

 

* 일본 여자들한테 선생님은 당당하다구요. 나쁜 짓을 수많이 할 수 있었던 그런 일본 여자들을 말이에요, 범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그랬지만 당연히 해와 국가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거라구요. 

 

5년, 7년, 10년 전에 영계를 통해서 본 영인체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실제로 땅에서 만나게 되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그런 여자에게 있어서 남자라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구요. 자기도 모르게 끌려오는 거예요. 온갖 일들이 다 있었겠지요? 그렇게 보면 일본 여자들이 통일교회의 문 선생을 숭배하더라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거라구요. 알겠어요?  

 

일본 여자를 만났더라면 큰일났겠지요? 그 여자는 돈 많은 가정의 무남독녀였어요. 선생님이 학생시절에 100엔이면 1년 동안의 생활비였어요. 그것을 매주 선생님의 책상 서랍 속에 넣어 놓은 거예요. 그렇게 두 달 간만 모아 놓으면 엄청난 금액이 된다구요. 선생님이 없을 때 슬그머니 들어와서 넣어 놓아요.

 

그러는 것을 하루는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다가 "이거 네 돈이야? 부모의 허락을 받았어?" 하면서 밤새도록 설득해 가지고 돌려보내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지금이라도 이름을 대면 알지도 모르지요. 그 당시에 그랬던 사람이 통일교회의 문 선생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구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일본 여자들을 대해서 부끄러울 것이 없어요.  

 

◑ 추억 

 

1. 双葉山라는 씨름 대표선수가 있었는데 지금도 살아 있는지? 

- 만약 선생님이 씨름을 했다면 한번 겨뤄 보고 싶었는데 겨를이 없었다.

 

▣ 1965.10.3(일) 하나님의 참된 아들딸이 돼라. 동경교회. 

- 주일 밤 화동회 때.  

 

015-129 선생님 학생 시절에는 일본에 双葉山라는 씨름 대표선수가 있었는데 지금도 살아 있는지? 만약 선생님이 씨름을 했다면 한번 겨뤄 보고 싶었는데 겨를이 없었다. 

 

2.  森永의 캐러멜의 おまけ

 

▣ 1990.10.7(일) 일심 일체 이상. 본부교회.

206-182 おまけ, 일본 森永의 캐러멜을 보게 되면 おまけ라는 게 있다구요. 내가 옛날 학창시절 때 그거 하나 빼려고 몇 통을 산 적이 있어요. 그러니까 おまけ라는 것이 참 귀한 거예요.

 

3. "韓国の人(かんこくのひと)"라고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학생 시절에 선생님은 그렇게 부르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 1990.2.3(토) 통일교인의 길. 한남동.

- 일본 책임자. 일어.

 

198-184 오늘 여기 모인 사람들이 대부분 어디 사람들이에요? "日本人(にほんひと)"하고 하는 것이 듣기 졸아요, "日本人(にほんじん)"이라고 하는 것이 듣기 좋아요? 그것도 생각 안 해 봤지요, 일본 사람들로서? 꾸지람할 때나 강하게 발음할 때 にほんじん이에요, 日本人 にほんひと예요? 어느 쪽이야? 발음만 해도 "진"이라고 하면 안 좋잖아요? 그렇게 보면 "니혼진"이 듣기 좋아요, "니혼히또"가 듣기 좋아요? (ひと가 좋습니다.)

 

여러분이 일본에 있는 한국 사람들을 부를 때는 어떻게 불러요? "韓国の人(かんこくのひと)"라고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학생 시절에 선생님은 그렇게 부르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韓国人(かんこくじん), じん, じん 했다구요.

 

말이라고 하는 것이 무서운 것이지요? 그런 말 뜻을 분별해서 감정적인 박자를 더할 수 있는 판단력이 없으면 세계적인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니혼진보다 니혼히또가 듣기 좋은 것입니다. 

 

4. "지금 급하게 고향에 가야 하는데 차비가 없으니 돈을 좀 빌려 주시오" 

- 주소와 이름를 적어 달라고 해서 알아 놓았다가 돌아가자마자 즉시 그 두 배를 보내 주었다구요

5. 일본에서 말을 가장 빨리하는 사람과 경쟁을 해서 이겼다. 

 

▣ 1990.7.7(토) 본부교회. 위하여 사는 정신.

- 6500가정 일본식구. 일본어.

 

205-067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동경역에서 친구와 후지산에 가기로 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후지산에 가는 것이 재미 없을 것 같아요. 선생님은 그런 무엇이 있지요? 그래서 그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그래서 동경역으로 나갔어요. 후지산에 가려면 기차표를 살 돈은 필요 없어요. 용돈만 조금 있으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나갔기 때문에 돈이 없었던 거예요. 

 

거기서 쓱 보니까 어떤 일본 귀부인이 때마침 거기에 있었어요. 그래서 인사를 하고 "지금 급하게 고향에 가야 하는데 차비가 없으니 돈을 좀 빌려 주시오" 하고 솔직하게 얘기했어요. 어떤 다른 욕심은 없는 거예요. 자연스럽게 얘기했더니 "아, 그래요? 얼마나 필요해요?"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돈을 빌렸다구요. 빌려 가지고 그냥 가면 안 되니까 주소와 이름를 적어 달라고 해서 알아 놓았다가 돌아가자마자 즉시 그 두 배를 보내 주었다구요. 그랬더니 그 부인이 찾아와서 "당신 같은 청년은 본 적이 없소. 집에 가서 식구들에세 청년에 대한 얘기를 했더니 아이들에게 큰 교육이 되었소"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돈은 주고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라고 하면서 돌려주더라구요. 그래서 "그러면 돌아가다가 가난한 사람에게 그 돈을 적선이라도 하시오."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 돈을 그냥 두고 가더라구요. 그런 여자도 있었습니다. 빈틈없이 돌려주는 거예요. 일본사람들한테 신세를 질 일은 절대 안 했습니다.

 

* 선생님의 말이 빠르지요? 나이가 70인 노인이 되어서 혀가 잘 안 돌아갈 때도 있지만 일본 사람들에게 얘기할 때는 후루루루 한다구요. 훈련을 해 놓았습니다. 연구를 했다구요. 

 

앞으로 일본 청년들까지 내 손으로 소화해서 세계를 위해서 써먹겠다고 다짐한 것이 있어요. 보통의 일본 사람들 이상 상식이 있는 변론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 가지고 훈련을 한 것입니다.  

 

선생님이 일본말을 몰랐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한 사람이 그렇게 고생해서 650명의 일본 사람들을 웃을 수 있게 만들고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요? 고생을 해서 가치 있는 것을 찾아 가지고 모두에게 나우어 줄 수 있다고 하는 데는 국가를 초월할 수 있는 희망이 연결되는 거예요. 그 희망은 타락한 세계까지도 넘을 수 있는 거예요.

 

▣ 1992.8.4(화) 복귀 심정권을 어떻게 이루느냐. 중앙수련원.

- 일본 종족적 메시아 수련생. 일본어.

 

234-071 선생님의 학생 시절에 일본 친구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얘기하면서 "네가 한 마디를 하는 동안에 나는 세 마디를 하겠다" 해서 경쟁을 했습니다. 얘기를 해 가지고 질 것 같으면 "후루루…!" 기관총 갈기듯이 말하지 않으면 안 돼요. 

 

여러분, 그렇다구요. 지금 몇십 년이에요? 선생님이 배운 지가 50년 이상이나 된 일본말을 지금도 "줄줄줄" 하지요?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발음이 좀 둔해졌을지 모르지만 못 알아들은 말은 없지 않느냐 이거예요. 九州나 沖縄의 사람들보다 나을지 모른다구요.  

 

▣ 1993.5.9(일) 참사랑의 통일권과 나. 이스트가든.

- 브리지포트 대학생. 일본어.

 

247-291 학생 시절에 일본말을 배우기는 했지만 팔십을 바라보는 선생님의 나이에서 여러분과 같은 청년을 격려하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구요. 선생님이 학생 시절에 일본에서 말을 가장 빨리하는 사람과 경쟁을 해서 이겼습니다. 정말이라구요. 

 

웅변대회 같은 데서는 말을 누가 많이 하느냐에 따라서 승패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같은 기준에서 하더라도 그래요. 우리 같은 사람은 생애를 걸고, 말을 가지고 싸우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는 보통이 아닙니다. 

 

6. "얼마나 먹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보자"

- 서른 살까지는 배고프지 않을 때가 없었다. 

- 닭고기 계란덮밥을 일곱 그릇이나 먹었다. 일곱 그릇 먹고 나서는 목이 돌아가지 않았다. 그것은 배가 고픈 것보다도 더 고통스러웠다. 움직일 수도 없었다. 

 

▣ 1965.10.8(금) 와세다 대학 원리연구회. ノカタ학사.  

- 선생님의 동경 유학시절

 

015-180 선생님은 사람들이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연구했다. "이 입은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가 있을까, 먹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라고 熟考한 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훈련을 하였다. 그래서 서른 살까지는 배고프지 않을 때가 없었다. 언제든지 밥을 가져오면 사발로 서너 그릇을 단번에 먹어 버린다. 그 정도로 배고프지 않을 때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얼마나 먹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보자"고 하게 되었다. 전쟁 시대인 그때에는 식권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식권이 있어서 "몇 그릇이나 먹을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먹어 보자"고 친구들을 데리고 갔다.

 

젊은이들이 모이면 참 재미있어요. 모두들 "야, 10그릇은 문제없다." "오늘은 자네 생일ㄹ이니까 마음껏 먹어라, 내가 한턱낼게"하며 큰소리를 친다. 다카다노바바를 죽 내려가면 절이 있는데 거기서부터 식당이 쭉 늘어서 있어요.

 

거기에서 선생님은 닭고기 계란덮밥을 일곱 그릇이나 먹었다. 일곱 그릇 먹고 나서는 목이 돌아가지 않았다. 그것은 배가 고픈 것보다도 더 고통스러웠다.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런 일도 하곤 했다. 그러나 선생님이 항상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선생님은 항상 배가 고팠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했을까? 결코 밥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자신의 배만을 채우고 있으면 자신으로부터 민족이 멀리 도망가 버리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자기에게서 멀리 달아나 버린다배가 고파서 먹고 싶지만 그 이상으로 민족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진리이며 선생님의 신조였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서른 살까지는 배가 고프지 않을 때가 없었던 것이다.

 

형무소로부터 나왔을 때 아무리 먹고 또 먹어도 계속 먹을 수 있었다. 웬일인지 무엇을 먹고 또 먹어도 배가 불러도 거기에서 過食하여 죽을 정도로 먹고 싶었다. 아무리 채워도 포화상태가 되지 않았다. 그렇듯 언제나 모자랐다. 이렇게 하면서 이 길을 개척해 나왔다. 

 

7. 내가 몇 그릇까지 먹어 봤느냐 하면 열한 그릇까지 먹어 봤어요.

 

▣ 1990.2.15(목) 고생의 철학과 3권 복귀. 한남동.

- 향토학교 간사 및 간부.

 

199-019 그리고 돈이 떨어졌다 하면···, 왜정 때는 식권이 있었는데 한 끼에 하나씩 써요. 그것도 등급이 셋입니다. A, B, C가 있어요. 이 표를 한 장씩 줘야 식당에서 밥을 주는 거예요.

 

그때는 쌀이 모자라던 판인데 젊은 놈들이 가서 먹기 시작하면 한이 없어요. 내가 몇 그릇까지 먹어 봤느냐 하면 열한 그릇까지 먹어 봤어요. 아, 그렇게 먹는다구요. 茶碗 ちゃわん밥공기 같은 것으로 먹기 시작하면 열한 그릇도 금방이에요.

 

그거 냄비로 하면 한 냄비도 못 될 거라구요. 그렇게 11그릇을 먹었으니까 며칠 분을 먹었어요? 4일분, 3일 반 분 이상을 먹어 버렸거든요. 그렇게 먹다 보면 식권이 떨어져요. 그러면 전화를 하는 거예요. "너 식권 얼마 남았니?" 하고.

 

그리고 세상에는 다 사는 수가 있다구요. 내가 식당 아주머니와 친하거든요. 친해 놓고는 쌀을 사 달라고 하는 거예요. 쌀을 돈 가지고 사는 거예요. 돈을 더 주고 말이에요.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거예요.

 

 

◑ 일본 생활. 

 

1. 역사에 부끄러운 일은 안 했다. 

 

▣ 1990.7.7(토) 위하여 사는 정신. 본부교회.

- 6500가정 일본 대원. 일본어.

 

205-074 선생님의 주위에 일본 여자들이 많이 있어요. 물론 선생님 같은 사람이 유혹을 하면 여자들이 안 넘어갈 수 없겠지요. 그렇지만 그런 거 안 하기 때문에, 그래서 당당하다구요. 역사에 부끄러운 일은 안 했습니다.

 

여자들에 대해서도 그렇지요. 정의의 남자로서 나쁜 많은 사람들을 처리한 거예요. 그럴 때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일대일로 교육했어요. 그래서 선생님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자기의 비밀을 선생님한테 전부 가지고 와서 의논하는 거예요. 지금도 통일교회에서는 전부 그래요. 선생님한테 보고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모두 그러면 안심이 되는 거예요. 마찬가지입니다.  

 

2. 아름다운 땅에도 하나님이 보시고 기뻐하고 나서 "저기는 좋은 곳이니 가보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후에야 간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가지 않았다. 

 

▣ 1965.10.8(금) 와세다 대학 원리연구회. ノカタ학사.  

- 선생님의 동경 유학시절

 

015-180 선생님은 일본에 와서 좋은 곳에 구경하러 다니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후지산에도 가지 않았고, 아타미, 하꼬네, 닛꼬에도 가지 않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땅에도 하나님이 보시고 기뻐하고 나서 "저기는 좋은 곳이니 가보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후에야 간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가지 않았다. 이것이 선생님의 주의이다. 

 

 

◑ 누구보다도 일본을 사랑하는 조건을 세우자

 

▶ 학교를 못 나가게 된 학생을 졸업시키기 위해서 내가 몇달 동안 학교를 그만두고 그들의 어머니 아버지 노릇까지 했다.

 

▣ 1969.10.18(토) 체휼적인 신앙인. 대구교회.

026-069 선생님이 일본에 가 있을 때 노동판에 다니던 일과 긴자에 짐수레를 끌고 다니던 그런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밥을 먹기 위해 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게 아닙니다. 젊은 시절에 고생하는 데에 있어서 내가 본이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학교를 못 나가게 된 학생을 졸업시키기 위해서 내가 몇달 동안 학교를 그만두고 그들의 어머니 아버지 노릇까지 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밤이 따로 없었습니다. 새벽 2시에 일어나서 그런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별의별 일을 다 겪어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만큼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회사에 나가서 일도 해 보고 글씨를 써서 팔아 보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회사에서 현장 감독도 해 보았습니다. 지금은 우리 공장에 가도 그런 얘기는 하지 않습니다. 

 

젊었을 때 즉 30세 이전까지는 무엇이든 해 보라는 것입니다. 내 손을 믿고 신념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하게 될 때에는 6개월 이내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신념을 가지고 자기가 자기를 믿어야 됩니다. 자기가 자기를 믿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이 믿을 것 같아요?

 

여러분은 그저 적당히 하려고 하지요? 그렇게 적당히 해 가지고는 하나님이 콧방귀도 안 뀐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그런 도수가 찬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몰아쳐 가지고 그러한 사람을 만들어서 일을 시키려고 합니다. 환영하는 사람 손들어 봐요. 손을 들 때 한꺼번에 들어야 기분이 좋지 이게 뭡니까?

 

1. 노동자의 생활

 

1) 가와사키의 조선소에 가서 석탄 운반 등의 일을 자주 했다

- 회사의 노동자들과 대결했다. "당신들은 이것을 몇 시간에 하겠는가?, 우리들은 6시간 안에 이것을 끝내겠다"

- 4시간에 한다고 했으면 3시간에 전부 해치운다. 그리고 돌아와서 3일 정도는 잠만 잔다. 젊은 때는 그런 것이 필요하다.    

 

▣ 1965.10.3(일) 하나님의 참된 아들딸이 돼라. 동경교회. 

- 주일밤 화동회 때.

 

015-131 선생님이 일본에 왔을 때는 여러분의 나이와 같이 젊은 때였지만 그런 곳에 대단한 관심을 갖고 공장에 가서 노동생활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가와사키의 조선소에 가서 석탄 운반 등의 일을 자주 했다. "하자" 해 가지고 친구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다. 신바람이 나 가지고 그것을 하루에 얼마로 도급을 맡는 것이다. 

 

일할 때는 회사의 노동자들과 대결했다. "당신들은 이것을 몇 시간에 하겠는가? 우리들은 6시간 안에 이것을 끝내겠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젊은 사람들을 모아 "4시간 만에 하자"고 하여 필사적으로 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 하고 죽어도 좋다. "저들에게 져서는 안 된다" 하며 심하게 독려하며 시작한다. 4시간에 한다고 했으면 3시간에 전부 해치운다. 그리고 돌아와서 3일 정도는 잠만 잔다. 젊은 때는 그런 것이 필요하다.    

 

2) 120톤짜리 바지선에 석탄을 싣는 것을 셋이서 떠맡아 가지고 네 시간 만에 다 해치웠다.

 

▣ 1989.7.9(일) 본부교회. 민족을 초월한 메시아의 사명을 하라.

- 6500가정 일본 식구. 일본어.

 

192-284 선생님이 일본에 가서 안 해 본 것이 없어요. 뭐 노동도 하고 말이에요, 가와사키 川崎에 조선소가 있었어요. 그런 곳에 가서 노동도 했어요.

 

석탄을 운반하는 배 같은 데서도 일을 했어요. 120톤짜리 바지선에 석탄을 싣는 것을 셋이서 떠맡아 가지고 네 시간 만에 다 해치웠어요. 그거 죽을 힘을 다해서 땀범벅이 되어 가지고 12시 전에 끝내려고···.

 

거기 가는데 와세다 타카다노바바에서 가려면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려요. 한 시간 반 정도는 걸리기 때문에 새벽 세 시에 나서는 거예요. 학생복은 밀쳐 두고 작업복을 입고 나서는 거예요. 그게 학생 시절이었어요.

 

무엇을 위해 사느냐? 심각했던 거예요. 그렇게 해서 여러 가지를 해 본 거예요. 유명한 사람들의 書體도 배웠어요. 붓글씨. 선생님은 글씨를 잘써요. 여러 가지의 것을 다 해 봤어요. 배후관계의 좋고 나쁜 것을 모두 해 본 거예요.

 

私娼街까지 가 봤어요. 그거 나쁜 것이 아니에요. 일본을 잘 알아요.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모르는 것이 없어요. 빈민굴까지도 다 알아요.

 

3) 1개월 쓸 비용을 3일 동안에 충분히 벌 수 있었다. 

 

▣ 1992.2.11(화) 가야 할 천국 기지. 한남동.

- 일본 간부. 일본어.

 

227-182 선생님은 1개월 쓸 비용을 3일 동안에 충분히 벌 수 있었다구요. 선생님은 원래 건강하기 때문에 가와사키에 가서 석탄 일을 하는데 120톤의 석탄을 세 사람이 오전에 모두 해치워버렸어요. 뭘 그렇게 놀래? 학생 시절에 그렇게 훈련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일도 할 수 있는 거라구. 아무것도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4) 유산 탱크 정화. 

- 그 속에서는 15분 이상 일을 할 수 없다.

- 돈이 없어서 그런 일을 했던 것이 아니다

- 돈이 있으면 전부 친구에게 주었다.

- 누구보다도 일본을 사랑하는 조건을 세우자

 

▣ 1965.10.8(금) 와세다 대학 원리연구회. ノカタ학사.  

- 선생님의 동경 유학시절

 

015-180 休日 같은 때에는 가와사키에 있는 회사 등에 자주 갔어요. 거기에는 硫酸 탱크가 있는데 노동자가 그 유산 탱크 속에 들어가 정화하기 위해 원료를 쭉 내려보낸다. 그리하여 그 장치는 몇 년간 쓰게 되면 못 쓰게 되어 버린다. 硫酸이 스며들지 않는다. 그러면 그것을 교환하기 위하여 그 탱크 속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 속에서는 15분 이상 일을 할 수 없다. 그런 곳에서 싸우면서 일했다.

 

돈이 없어서 그런 일을 했던 것이 아니다. 선생님이 선생님의 형님께 "전 재산을 팔아서 돈을 부치라"고 전보를 치면 형님은 세계 대표적인 가인이어서 곧 보내 주신다. 그런 사람은 좀처럼 없다.

 

선생님의 형님은 선생님이 어떤 남자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선생님의 사명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세계에서 단 한 사람밖에 없고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그런 남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늘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열렬한 신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돈이 필요하여 전보를 치면 곧 보내 준다.

 

선생님은 돈이 있으면 전부 친구에게 주었다. 그래서 그런 곳을 돌아다녔다. 왜 그런 일을 했을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일본을 사랑하는 조건을 세우자, 그런 것을 생각했다. 여러 곳을 돌아 다녔다. 커다란 삼목杉木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운 적도 있었다.

 

선생님은 일본인으로부터 많은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고문한 그 특별 고등형사에게 복수를 계획하고 있는 친구들을 전부 모아 놓고 "불쌍한 것은 패한 일본이다. 이미 주권을 잃어버려 무릎을 꿇고 비는 사람을 때리는 자는 하나님이 벌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한국에서 쫓기고 있는 일본인을 조용히 불러 "고문당하기 전에 빨리 돌아가라"고 말하며 짐을 정리해 주기도 했다. 그런 일이 많이 있었다.

 

5) 집에서 돈 보내 주게 되면 전부 다 못사는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말이에요.

- 노동판에서 리어카를 끌기도 했고 말이에요.

 

▣ 1990.2.15(목) 고생의 철학과 3권 보귀. 한남동.

- 향토학교 간부, 간사.

 

199-019 우리 같은 사람은 안 해 본 게 없어요. 집에서 돈 보내 주게 되면 전부 다 못사는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말이에요. 안 해 본 게 없다구요. 노동판에서 리어카를 끌기도 했고 말이에요.

 

덕문이는 그런 거 할 줄 모르지? 선생님은 안 해 본 게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동경 시내를 훤하게 알아요. 3친구가 있었어요. 나도 덩치가 크지만 말이에요. 다 덩치가 커요. 한번 기합을 주게 되면 이게 죄어 들어온다구요. 선생님을 허투로 보지 말라구. 운동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세다구요. 어쨌든 돈을 벌어야 할 텐데 말이에요. 젊은 놈들, 그때 뭐 혈기 왕성할 때니까···.

 

* 그렇게 혈기 왕성할 때 "자, 우리 하루 벌어서 한 달 먹을 수 있는 것을 찾자" 한 거예요. 학생이 매일같이 노동하러 다니겠어요? "하루 벌어 가지고 한 달 먹을 수 있는 것을 찾아라!" 한 거예요. 우리 떨레가 많거든요.

 

그래 가지고 동경 근처 가와사끼의 조선소를 찾아 갔어요. 가서 무슨 장소를 찾았느냐? 여러분, 유산 알지요? 납을 녹이는 큰 공장에는 유산을 많이 쓴다구요. 유산 탱크가 집채 같은데 말이에요, 일 년에 한 번씩 소제를 해야 돼요.

 

납을 녹이기 때문에 구멍이 뚫어지면 야단이거든요. 그다음에는 벽돌, 무슨 벽돌이든가? 그걸 쌓더구만! 그걸로 꽉 짜 놓았는데 거기에 침투되어서 녹는 거예요. 그걸 1년에 한 번씩 전부 다 끄집어 내어야 된다구요. 그러니까 그것을 손으로 쥐었다가는 다 녹아나는 거예요. 고무장갑을 끼고 방독면을 쓰고 눈에도 보안경을 쓰고 하는 거예요. 유산도 지독한 유산이에요. 닿기만 해도 그대로 나가는 거예요. 옷도 독가스 방지하는 옷을 입고 하는 거예요.

 

가서 일하는데 한 시간 이상 못 해요. 그때 돈으로 하루에 얼마였느냐 하면 18원이었어요. 18원. 한 달 하숙비는 11원이었어요. 아, 이래 가지고 세 녀석이 가서 하루하고 죽을 뻔 했구만! 그거 얼마나 지독한지! 살에는 그 유산이 닿는 데가 없는데 그 냄새가 침투했는지 온몸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몰라요. 일주일 가더라구요. 일주일. 이야, 그거···! 그런 경험도 했어요.

 

그리고 그 세계의 친구들은 돈이 없으면 나누어 쓰고 그래요. 부잣집 아이가 있으면 "너, 얼마 줄래?" 이래서 받아서 썼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받으러 다니고 그러지 않았다구요.

 

그런 면에서 보게 된다면 정적인 면에서 평준화가 되어 있었어요. 수전노 守錢奴(돈을 모을 줄만 알아 한번 손에 들어간 것은 도무지 쓰지 않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후손들 같이 일 푼 줬으면 거기에 이자 붙여서 받겠다는 그런 패들하고는 다르다구요. 情의 세계에서는 배고프면 갖다가 서로 나누어 먹게 되어 있고, 다 그렇지요?   

 

6) 눈 오는 날이나 태풍이 부는 날에는 학교에 가지 않고 하층 노무자들의 밥집에 나가 일을 했다. 

- 노동판에는 조장이 있어서 착취를 하는데 3할은 떼낸다. 그래서 "그렇게는 안 된다"고 하면서 강력히 항거했다. 

 

▣ 1965.10.8(금) 와세다 대학 원리연구회. ノカタ학사.  

- 선생님의 동경 유학시절

 

015-180 선생님은 눈 오는 날이나 태풍이 부는 날에는 학교에 가지 않고 하층 노무자들의 밥집에 나가 일을 했다. 그런 때는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태풍이 불고 있던 때니까 거기서 손이 새까맣게 되어도 비에 맞아서 죽 흘러내려 깨끗하게 되어 버린다. 그런 가운데에서 땀을 흘리며 일한다. 그 기분이 참으로 상쾌하다.

 

그리고 그 가운데 나쁜 사람이 있으면 혼내 주었다. 이런 것을 선생님은 잘 생각한다. 때로는 큰 놈을 해치운다. 그리고 노동판에는 조장이 있어서 착취를 하는데 3할은 떼낸다. 그래서 "그렇게는 안 된다"고 하면서 강력히 항거했다. 선생님은 무서운 자들이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그들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 선생님이 "에잇" 하면 "악" 하며 항복한다. 그런 일을 잘했다.

 

2. 일본에 가서도 굶주린 친구를 만나게 되면 선생님은 굶더라도 그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 1969.2.2(일) 나의 뜻과 신념. 전본부교회.

- 제2차 세계순회노정을 떠나시기 앞서.

 

022-123 일본에 가서도 굶주린 친구를 만나게 되면 선생님은 굶더라도 그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굶주린 苦學生(학비를 스스로 벌어서 고생하며 공부하는 학생.)을 만나면 부둥켜 안고 통곡을 했습니다. 그들이 먹을 것이 없을 때에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주기 위해 학생복을 벗어 던지고 부두 노동을 했고 석탄 짐을 지고 운반을 했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러한 젊은 동지들을 사랑하기 위해 싸워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나를 친한 친구로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선생님이 어떤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선생님을 친구 중의 친구라면서 자기의 비밀을 자백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실을 너한테만은 이야기하지 않으면 못 견디겠다"고 직고하는 동지들을 남겼던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3. 식권. 고학하는 사람들에게 마음껏 먹여 3일에 다 없어졌다.

 

▣ 1965.11.1(월) 소망의 조국의 슬픔. 광주교회.

- 제1차 세계순회 마치고.

 

155-315 여러분이 알다시피 왜정 때에는 식권이 있었습니다. 쌀이 참 귀했다구요. 그때 선생님은 동경에 있었습니다. 

 

* 왜정 때에는 배가 고팠다구요. 그래서 苦學(학비를 스스로 벌어서 고생하며 배움)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너희들, 배고프지? 우리 집에 와라" 해 가지고 식권이 나오면 한 달 먹을 거 전부 다 모아 가지고 "먹어라, 먹어라, 마음껏 먹어라" 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한 3일 되면 다 없어져 버립니다.   

 

그다음에는 또 이상한 작전을 합니다. 밥을 얻어 먹는데 그저 식당 뒷문으로 들어가 얻어먹는 놀음도 하는 거예요. 다음에 오면 준다고 해 가지고 배가 하도 고플 때에는 한번 실컷 먹어 보자 이거야. 그래서 한꺼번에 식당을 일곱 집까지 들어가 봤습니다. 알겠어요? 일곱 집. 

 

여러분들도 그럴 거예요. 감옥에 들어갔다 나오면 여기까지 밥이 차도 목을 요렇게 하고 또 먹고 싶은 겁니다. 감옥생활해 보면 알아요. 영양이 워낙 부족하기 때문에 소화는 못 시키지만 무진장 들여보낸다 이겁니다. 그때는 감옥살이는 아니지만 한번 실컷 먹는 거예요. 

 

155-317 자, 진짜 배부른 것하고 진짜 배고픈 것하고 어떤 게 나으냐 말이에요언제 내가 배고픈 이상 아버지를 사랑했나? 아버지께서는 자녀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배고픈 고개라도···. 자녀가 죽을 길에 있으면 배고픔을 잊고 자기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음길도 지켜 줄 수 있는 아버지인 것을 내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아버지가 배고픈 것을 잊고···. 그런 기준을 알아요? 

 

4. 일본의 飯場 はんば에서도 약자의 편에 서서 많이 싸웠다. 

 

▣ 1991.7.14(일) 책임분담 완성과 참된 사람. 코디악.

- 일본 책임자, 회원.

 

218-140 선생님은 학생 시절 때부터 일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앞으로 일본을 소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악력握力, 日本刀로 할 것이냐? 절대로 힘으로서는 불가능해요.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학생 시절에 빈민굴을 찾아갔었습니다. 가지 않은 데가 없었습니다. 당시에 선생님을 포함한 三銃士가 있었습니다.

 

※ 삼총사

- 프랑스의 소설가 뒤마가 지은 장편 역사 소설.

- 루이 13세 때를 배경으로 검객 다르타냥과 근위병 삼총사인 아토스, 포르토스, 아라미스가 리슐리외 추기경의 음모에 대항하여 왕비를 구하는 武勇談이다. 1844년에 발표하였다.

- 친하게 지내는 세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선생님은 건강체지요? 힘이 있습니다. 손은 작지만 강하다고요. 일본의 飯場 はんば(토목 공사나 광산 등의 현장에 있는 노무자 합숙소. 또 그곳에 노무자를 합숙시켜 놓고 십장이 지배하는 제도.)에서도 약자의 편에 서서 많이 싸웠습니다.

 

일본에 있을 때 일본 여자들의 유혹이 없었던 것도 아니라구요. 선생님은 그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극장 같은 데 가면 본래는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아요.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많이 있었다고요.

 

일본에 있으면서도 나쁜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여자들을 꾸짖어서 교육한 것이 잊혀지지 않아요. 선생님을 짝사랑해서 죽인다고 협박한 일도 있었습니다.

 

* 선생님은 청년 시절에 짝사랑이라든가 편지 같은 것을 쓴 일이 없습니다. 그 반대였습니다. 타락의 기준을 넘어가지 않으면 안 돼요. 여자는 약해요. 바람이 불면 흘들흔들해요. 그렇지만 남자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5. 일본을 하기 위해서는 부모 마음 이상의 심정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 1992.2.11(화) 가야 할 천국 기지. 한남동.

- 일본 간부. 일본어.

 

227-196 일본 땅에서 한국 교포들이 얼마나 괴로움을 받았어요? 사람 취급도 못 받았다 이거예요. 선생님은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구요. 선생님은 학생 시절부터 그런 환경에서 쭉 살아왔어요. 그러니 일본을 구하기 위해서는 부모 마음 이상의 심정을 가지지 않으면 안 돼요. 그러한 심정 기준에 들어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선생님도 그랬다구요.

 

帝政(황제가 다스리는 군주 제도의 정치. 제국주의 정치) 時代에 선생님을 잡아 고문한 고등경찰관을 대해 선생님은 손을 흔들면서 모두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구요. 선생님 말 한마디에 전부 다 매장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입니다.      

 

6. 일본에 가서도 일본 사람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 일본에 가면 내가 싸우는 것은 일본 천황이지 일본 백성이 아니에요. 

 

▣ 1988.7.22(금) 섭리사적 환고향의 시대. 한남동. 

179-093 선생님이 옛날에 일본 가게 될 때 서울에서 부산에 내려갈 때 그랬어요. 19시간이 걸리는데 그 전에도 물론 남도 안 둘러본 데가 없어요. 차에서 눈물을 뿌리면서 이 산천을 하나님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없잖느냐 이겁니다. 만물이 그런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의 주인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내가 그 주인이 될 수 있는 자리에 섰다는 놀라운 사실을 생각하며 하염없는 눈물을 철탑에 뿌리고···. 옛날 한강에 있던 철교가 지금은 없어졌더군. 그때의 일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때는 왜정 치하에 있어서 압제를 받은 민족을 나기고 떠나는 주인 같은 마음, 그러한 마음들이 오늘날 문 총재가 이와 같은 길을 갈 수 있게끔 인도해 준 것입니다.

 

일본에 가면 내가 싸우는 것은 일본 천황이지 일본 백성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싸우는 것이 사탄이지 사탄 휘하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이 확실하다는 거예요.

 

일본에 가서도 일본 사람을 누구보다도 사랑했습니다. 일본은 신을 모르는 나라였습니다. 본연의 주인 아버지의 사랑을 알려 주어야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마음이 복귀 역사에 다 스며드는 거예요.

 

* 그 주인이 주인다운 길을 가는 데는 천태만상의 수난길이 있을 것이고 사랑의 길을 찾아가는 데는 낙망도 있고 절망도 있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사랑의 본향 길을 찾아가는 길이니 죽어서라도 가야 할 길이니 살아서 죽는 길을 대신할 수 있다면 그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죽음의 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이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딴 데는 길이 없어요. 딴 데는 없다구요. 지쳐요. 10년도 못 가서 지치는 거예요. 사랑의 길만이 지치지 않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인간의 쓰레기와 같은 제일 밑에서부터 인간의 최고 영광의 입장까지 모두 연구해 보았다. 

- 일본이 어떻다는 걸 샅샅이 알려고 노력했다.

 

▣ 1964.6.12(금) 정신력과 훈련. 대구교회. 

- 흥남감옥에서 참아버님을 모셨던 손영출씨의 간증 후 말씀. 

 

154-163 이런 놀음을 하면서도 내가 일본의 명승지를 한번도 가 보지 못했어요. 나라 없는 백성이 그런 간판 붙은 데는 안 간다 이거예요.

 

내가 일본에 가 있을 때 집에서 돈을 안 보내 줘서 돈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일본 사람들이 보고 있는 데서 그런 원수들 앞에 자기 위신과 체면을 세우려고 안 하는 거예요. 또 나타나려고 안 했다는 거예요. 그냥 샅샅이, 일본이 어떻다는 걸 샅샅이 알려고 노력했다는 거예요. 학자들은 어떻고 노동자들은 어떻고 전부 다···.

 

이 나라는 언제까지 가면 망한다 이거예요. 실제 조사하기 위해서 선생님은 뒷골목 거리를 많이 다녔다구요. 전부 다 밀사를 보내고 다녀왔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범죄를 하는 게 아니에요. 이 나라는 언제까지 망해야 돼. 하늘의 복귀섭리의 프로에 있어서 이런 때가 오거늘 그때에 해당할 수 있는 기간이 되면 망해야 된다 이거예요.이런 마음을 가지고 이 동경역전에 내릴 적부터 싸워 온 거라구요. 

 

말은 하지 않지만 다니는 길가야, 넌 알 것이다 한민족이 가는 길을. 나는 애국자 원치 않아요. 길을 건너가나 오나, 나무를 바라보나 "이 만물, 원수의 땅에 있는 만물 너는 하늘에 속할 것이어늘 나를 알 것이다." 이러고 다닌 거예요. 그래 가지고 쭉 ···. 그거 지금도 생생해요.

 

1. 빈민굴에서부터 사창굴에 이르기까지 안 가본 곳이 없다. 

 

▣ 1969.2.2(일) 나의 뜻과 신념. 전본부교회.

- 제2차 세계 순회 노정을 떠나시기 앞서

 

022-120 일본 유학시절에 선생님은 빈민굴에서부터 사창굴에 이르기까지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쁜 행동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창굴에 있는 아가씨들의 과거를 캐보니 보통 사람의 과거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습니다. 사회 환경에 몰리고 그 흐름에 따라가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불쌍한 처지가 되기도 했고 혹은 부모와 형제를 위하여 자기 일신을 제물로 삼았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비록 자기 몸이 버린 바 되어 거리에 밝히는 그런 여인이 될지라도, 쓸쓸히 사라지는 불쌍한 아낙네가 되더라도 자기 부모와 형제를 살리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하고 나섰다고 했을 때 그들의 손을 붙들고 통곡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도 순수하고 솔직한 인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선생님은 이런 비참한 인류의 해방을 위해 싸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별의별 인간들이 다 거쳐 나가는 그런 류의 생활 이면을 알지 못하고서는 큰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빈민굴 생활로부터 밥을 얻어먹는 일에 이르기까지 안 해 본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었고 하나님이 길이길이 세우고 싶었던 그 사연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해방될 때까지 기다려 왔습니다. 선생님은 해방의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 일본 여자를 시험해 보았다. 

- "이런 성질이 틀림없을 테지. 해 보자.

- 전차 안에서 비에 젖은 차림으로 앉아 있다, 

 

▣ 1972.5.6(토) 미국에 지지 말라. 일본.

055-123 일본 사람은 정말은 신용할 수 없다. 조금 기분 나쁠 때는 금세 얼굴이 새파래진다. 그렇지 않은가? 선생님도 학창 시절에 많이 보았다. 때때로 일본 여자를 시험해 보려고 일부러 쓱 스치면서 "잘못되었습니다"라고 해 본다. 조금 기분 나쁜 말도 해 본다.

 

전차 속에서 비라도 올 때는 高田馬場로부터 죽 品川라고 하는 곳까지 많이 왕래하는데 밀어붙이듯이 하면서 앉아 있다. 윗저고리는 모두 비에 젖어 있다. 그래도 시침 딱 떼고서 앉아 있다.

 

예쁜 여자들을 만났을 때는 "아아, 저 여자는 이런 타입이겠지. 성질은 이러하며 가까이 갔을 땐 틀림없이 입을 옆으로 하고 떠들어 대겠지. 그리고 조금 다가가면 틀림없이 투덜거리며 기분 나쁘게 주위 사람들이 알아차릴 수 있는 표정을 하겠지" 하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나에서 둘 셋 넷 다섯 사람의 인상을 보고 "이런 성질이 틀림없을 테지. 해 보자." 하고 생각하고 쓱 해 본다.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한 가지 맞고 두 가지 맞고 세 가지 맞고···. 그것이 잘 맞았을 때는 기분이 좋다.

 

"장래 사람을 다룰 때를 위해서 이런 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부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일을 해 본 적이 있다. 

 

그때 선생님은 생각했다. "뭐야 이 아가씨야, 만일 내가 너의 오빠라면, 너의 학자금을 벌어 대기 위해서 이렇게 공장에 갖다가 돌아오는 오빠라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 생각한다.

 

"너는 그 방면에서는 심정적으로 낙제다. 내가 너의 부친이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또한 너 때문에 일생을 바쳐서 괴로운 길을 왔다 갔다 하며 비를 맞으면서 여러 가지 고통을 참으며 노력해 온 부모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눈물을 머금고 옷이라도 벗어 부친에게 덮어 주고 자신이 껴안고 위로해 주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 너의 입장이 아닌가" 그런 일을 때때로 했던 적이 있다. 

 

일본 여자는 게타下駄(나막신)를 신는다. 그래서 깨끗한 일본 보선을 조금이라도 더럽히면 얼굴이 새파랗게 된다. 미국에 가서도 선생님은 그런 일을 해 보았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구두를 신고 지나가다가 발이라도 조금 밟으면 이 편에서 뭐라고 말하기 전에 "Excuse me"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건 벌써 이겨 둔 것이다. 동양인으로서 미칠 수 없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우리가 길에서 급히 뛰고 있으면 "당신에게 무엇 도움 될 일이라도 있겠습니까?" 그렇게 이야기하곤 한다. 그런 것을 보았을 때 미국은 일본보다 순종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축복한 미국 사람을 버리고 싶겠는가?  

 

▣ 1972.4.23(일) 메시아와 우리들. 동경교회.

055-053 선생님은 品川의 빈민가를 휩쓴 적이 있다.

 

* 인간의 쓰레기와 같은 제일 밑에서부터 인간의 최고 영광의 입장까지 모두 연구해 보았다. 어디에 가도 친구가 생긴다. 

 

선생님은 한 끼쯤 먹지 않아도 먹었는지 먹지 않았는지 생각도 되지 않는다. 그런 관념이 강하다. 그런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역시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환경에 부딪쳐 그것을 뚫고 나가 목적점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된다  

 

* 선생님이 다까다노바바에 있었다. 선생님은 시나가와에는 상당히 관계가 있으므로 자주 왕래했는데, 비가 내리는 날 같은 때에는···.  이건 뭐 아가씨들이 새침데기 해 가지고 쑥 빼고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옷이 젖었을 때에는 일부러 아가씨의 옆으로 간다.

 

기분 나쁜 눈짓을 한다. 그것은 나쁜 마음을 해 가지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저 여자는 틀림없이 이렇게 할 것이다, 처음에는 이렇게, 두 번째는 이렇게, 세 번째는 이렇게 몇 % 들어맞는지 테스트해 보는 것이다.

 

어떤 때는 발을···.  그러면 틀림없이 이렇게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얼굴 모습을 보고 저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겠지 했는데. 틀림없이 그렇게 나왔을 때는 기분이 좋다. 그렇게 연구하는 것이다. 

 

3. 여자의 옷을 입고 빌어먹은 때도 있었다. 

 

▣ 1970.12.22(화) 통일교회의 현재의 입장. 전본부교회.

- 제15회 성화학생 총회.

 

037-035 학생 시절에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교복을 벗어던지고 노동판에 가서 일했습니다. 내가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안 해 본 일이 없습니다. 석탄을 나르는 일도 해 보았고 배도 타 보았고 머슴살이도 해 봤습니다. 온갖 일을 다 해 보았다는 것입니다결국 인간의 고락이 어떤 것인가를 다 알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고락을 겪으며 살고 있는 인간들을 해방시키는 책임자가 되어 이들을 완전히 해방시켜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누구보다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자리에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고 부모의 심정권을 초월하여 하나님 앞으로 복귀시켜야 할 책임을 느꼈기 때문에 그러한 자리, 그러한 뒷골목도 찾아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술집 아가씨와 술잔을 나누며 이야기한 적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곳에 오게 되었는가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그녀의 부모 이상 슬퍼하고 그녀의 오빠 이상 통곡할 수 있는 심정을 어떻게 유발시키느냐를 생각하며 나왔습니다.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여자의 옷을 입고 빌어먹은 때도 있었습니다. 알겠어요? 여자도 되어 본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4. 노동복으로 갈아입고 하루 동안 전신주를 끌면서 銀座 거리를 지나던 그때의 일을 지금도 생각할 때가 있다.

 

▣ 1972.4.23(일) 메시아와 우리들. 동경교회.

055-053 학생 시절 학생복을 노동복으로 갈아입고 하루 동안 전신주를 끌면서 銀座 거리를 지나던 그때의 일을 지금도 생각할 때가 있다. 주위에는 늠름한 사나이들과 날씬한 여자가 왕래하고, 향기를 풍기며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실로 한평생 잊지 못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땀을 흘리면서 십자로에 왔을 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스톱" 신호였다. 그것이 가장 원수였다. 그런 기분···. 십자로를 통과할 때까지는 절대로 청색 신호가 꺼져서는 안 되는 거예요. "스톱" 신호가 떨어지면 큰일인 것이다. 그런 때는 신호대를 단번에 때려 부수고 싶은 생각이 든다.

 

* 그런 "스톱"  신호가 나면 선생님은 배를 내밀고 중앙에 왕래하는 사람들을 땀을 흘리면서 바라본다. 그러면 그들은 싫은 표정을 하고 지나간다. 그것은 재미있는 인간의 전람회인 것이다. 그것이 선생님에게 있어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도 그런 생활을 해 보고 싶다.

 

▣ 1970.12.22(화) 통일교회의 현재의 입장. 전본부교회.

- 제15회 성화학생 총회.

 

037-035 선생님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일본 동경에 가면 긴자라는 번화가가 있습니다. 그 거리는 선남선녀들이 아주 잘 차려입고 다니는 일본에서 제일 번화한 곳인데, 선생님이 학생복을 벗어던지고 전신주를 실은 구르마를 끌고 가면서 "너, 이 녀석들, 길을 내주나 안 내주나 보자"는 생각을 하고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5. 빈민굴, 불쌍하고 거지와 같은 생활을 자주 했다.

- 추울 때 신문 한 장이 비단 이불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 1965.10.3(일) 하나님의 참된 아들딸이 돼라. 동경교회. 

- 주일 밤 화동회 때.

 

015-131 선생님은 불쌍하고 거지와 같은 생활을 자주 했다. 추울 때 신문 한 장이 비단 이불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것을 체험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 

 

6. 新宿의 뒷골목 등을 쭉 돌아보곤 했다. 

왜 이런 곳에 왔느냐?"

어디를 가더라도 자신에게 플러스가 되는 것을 취해 온다. 나쁜 곳에 가도 소화할 수 있는 것을 소화한다. 

 

▣ 1965.10.3(일) 하나님의 참된 아들딸이 돼라. 동경교회. 

- 주일밤 화동회 때.

 

015-131 여러분의 나라가 전쟁할 때 선생님은 일본에 와 있었는데, 新宿의 뒷골목 등을 쭉 돌아보곤 했다. 어디라도 들어가 여성들의 과거를 쭉 물어본다. 맥주를 가져오게 한다. 그러면 자꾸 가져온다. 그러나 술은 마시지 않는다.

 

그리고 옆에 앉아 얘기를 한다. "왜 이런 곳에 왔느냐?" 계속 얼굴을 보면서 "부모가 없는가 보군", "어머니가 안 계신 것 아니냐?"라고 하면 점점 마음을 열고 "그렇습니다"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계속 그것을 연구했다. 

 

어디를 가더라도 자신에게 플러스가 되는 것을 취해 온다. 나쁜 곳에 가도 소화할 수 있는 것을 소화한다. 선생님은 그런 주의다. 좋은 환경을 찾아서 돌아다는 사람은 아니다.

 

수양하는 데는 꼭 조용하고 상엄, 장엄한 곳이나 깊은 산과 같은 곳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조용한 곳에서만 공부가 된다는 것은 선생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공장이 몇 백만 마력의 모터나 엔진이 돌아가는 곳에서도 공부한다. 그런 일을 잘한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준비하는 것이다. 

 

◑ 와세다 대학의 高田馬場의 길을 하루에 두 번씩 걸었다. 

- 거기에 있는 굽은 길, 거기에 있는 전신주 등 여러분들이 기억할 수 있는 곳에는 선생님의 눈물이 스며 있다고 생각해도 틀림없다.

 

▣ 1965.10.8(금) 와세다 대학 원리연구회. ノカタ학사.  

- 선생님의 동경 유학시절

 

015-180 와세다 대학의 高田馬場의 길을 하루에 두 번씩 걸었다. 잘 걸었어요. 그것을 생각하니 "아, 가까운 곳에 왔으니까 옛날을 회상하여 "걸으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기도했던 그 기도의 정이 현재 일본의 일각에 성취된 감사의 기도를 하고 가고 싶다"는 마음이에요.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만약 선생님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면 여러분들이 그런 마음으로써 와세다 대학의 戸塚町(토츠카초)를 다카다노바바로부터 걷기를 바란다. 거기에 있는 굽은 길, 거기에 있는 전신주 등 여러분들이 기억할 수 있는 곳에는 선생님의 눈물이 스며 있다고 생각해도 틀림없다.

 

◑ 요주의 인물

 

1) 학생시절에도 항상 뒤를 尾行해서 따라다녔어요. 

- 일본 형사, 헌병! 그들은 선생님을 때려죽이려고 하고 선생님은 그들을 사랑을 가지고 살려 주려고 했다.

 

▣ 1989.7.9(일) 민족을 초월한 메시아의 사명을 하라. 본부교회.

- 6500가정 일본식구. 일본어.

 

192-279 일본 사람은 사실 선생님의 원수예요. 학생시절에도 항상 뒤를 尾行해서 따라다녔어요. 일본의 그거 뭐예요? 일본 형사, 헌병! 그들은 선생님을 때려죽이려고 하고 선생님은 그들을 사랑을 가지고 살려 주려고 했어요.

 

거기에는 천하가 따라와요. 그래서 요즘에 선생님이 실감하는 것은 말이에요, 그렇게 심은 것이 열매을 맺는다는 거예요. 因果法則이라고 하는 것은 우주가 존속하는 법칙이에요. 

 

* 패전 후에 패한 사람들을 전부 돌려보내 주었어요. 원수를 대해서 복수를 한 것이 아니에요. 원수를 사랑을 중심 삼고 품은 거예요. 일본 사람들이 그 빚을 갚고 있는 거예요. 역사에 진 빚을 갚아야 돼요.  

 

2) 일본에서 유학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면 벌써 연락이 됩니다. 

- "미스터 문이 지금 고향에 가니 잘 감시하라"

 

▣ 1969.1.26(일) 하늘을 사랑하자. 전본부교회.

022-096 선생님은 지금도 사진 찍는 것을 싫어합니다. 선생님 뒤에는 항상 꼬리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유학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면 벌써 연락이 됩니다. "미스터 문이 지금 고향에 가니 잘 감시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부두에 내리게 되면 모르는 사람이 "지금 오십니까? 본인은 형사입니다" 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러고 나서는 계속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 1972.10.14(토) 통일의 용사. 구리시 교문동 통일동산.

- 흥남감옥 출옥 기념 예배.

 

063-238 내가 국민학교 졸업할 때 식장에서 대웅변을 했어요. 서장, 군수들을 앞에 놓고 "일본놈들 보따리 싸 가지고 가라"고 하면서 들이 깠어요.

 

국민학교 학생 때부터 그래 놓으니···. 그래서 경찰서장한테 붙들려 가서 담판한 사람이라구요. "이런 이런 내용이 옳지 못한데 이런 경우에 가만있겠느냐?" 이래 가지고 그때부터 레테르가 붙은 거예요. 

 

뭐, 어디 일본에 가더라도 불청객이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거예요. 동경에서 잠시 어디를 가게 되더라도 "미스터 문 어디 간다" 해 가지고 불청객이 언제나 뒤꽁무니에서···. 안전하기야 안전하지요. 그런 놀음을 해 온 사람이라구요.

 

3) 東京에 있을 때에도 한 달에 한 번은 警察署에 불려 갔다. 

 

▣ 1965.10.8(금) 와세다 대학 원리연구회. ノカタ학사.  

- 선생님의 동경 유학시절.

 

015-180 한국이 일본 정권하에 있었을 때, 선생님은 몇 번이나 유치장에 끌려 들어갔다. 이곳 東京에 있을 때에도 한 달에 한 번은 警察署에 불려 갔다. 그 警察署는  高田馬場 거리의 와세다 대학 쪽에서 오른편에 있다. 

 

그때에도 선생님이 한국에 돌아가려고 하면 한국에 연락이 간다. "아무개가 한국에 돌아간다" 라고. 학생이었지만 要注意 人物이었다. 그러나 보통사람은 선생님을 잘 모른다. 

 

4) 일본 천황 유일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투쟁하는 데에 있어서 공동목표 아래 공동전선을 펴나갔다. 

 

▣ 1971.2.11(목) 참된 사람들. 마포교회.

- 서울 9개 지구 야간순회 첫번째 순회지구본부.

 

040-308 내가 학창시절에는 공산주의자하고 친구였습니다. 일본 천황 유일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투쟁하는 데에 있어서 공동목표 아래 공동전선을 펴나갔습니다. 그때는 그들이 친구 중의 친구요, 없어서는 안 될 동지 중의 동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왜 갈라 졌느냐? 그들과 우리가 대하는 방향과 목적이 상반되기 때문에 갈라진 것입니다.

 

▣ 1980.11.17(월) 통일교회 활동과 학자들의 사명. 서울롯데호텔.

- 교수 학자 초청 만찬회.

 

110-163 저도 한국 사람 중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학창 시절부터 한국의 문제를 많이 연구했습니다. 저의 동료들 가운데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많았습니다. 학창시절에는 그들과 많은 토론을 했습니다. 

 

그때도 그들에게서 "너는 결국에는 보수주의의 괴수魁首가 될 것이다. 미래에 틀림없이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원수가 될 것이다" 하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론투쟁을 하고, 일제시대에는 지하운동도 했습니다. 그때 충칭重慶(중국 남서부에 있는 중앙 직할시.)에 있는 임시정부와 연락하던 동지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매일 토론하기를 "신이 있느냐, 없느냐" 나는 "있다" 하고, 그들은 "없다" 하고 그런 논란을 하던 때가 벌써 수십 년이 지난 역사의 한때가 되었습니다.   

 

▣ 1986.2.8(토) 이론을 갖춘 실천자. 한남동.

- 국제승공연합 중앙위원.

 

140-104 공산당 치하의 감옥에서, 벌써 학창시대부터 공산당을 알았어요. 내가 대학시절부터 일본에서 지하운동을 했어요. 그때는 지하운동이지요. 지하운동을 하는 전국의 학생회장들을 중심삼아 가지고 활동도 하고, 별의별 역사를 다 지내온 것입니다.

 

내가 그러한 역사를 거쳐 왔지만, 그때 내 말이 그랬어요. 그때는 공산당하고 민주세계가 합동작전이었어요. 그러면서 친구에게 "너와 나는 가는 길이 달라. 지금은 여기서 같이 싸우지만 멀지 않은 장래에 세계 공산당하고 나하고 싸울 날이 온다" 그랬어요.

 

그때는 내가 학생이었으니까 친구들이 우습게 알았지요. "아이구, 공산당이 이미 전 세계에 陣營을 준비해 가지고 민주세계를 삼킬  수 있는 체제를 당당히 취하고 있는데, 네가 뭐냐, 네가 뭐야?" 했다구요.

 

오늘날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요. 그야말로 세계의 공산당하고 싸우는 데 있어서 최후로 남은 1인자 아니에요? 그건 공인하지요? 또 국제승공연합을 만든 것도 내가 아니에요? 

 

그 동기가 어디에서부터냐? 감옥에서 나와 삼팔선을 넘어서면서부터입니다. 넘어오면서부터 "공산당을 내 손으로!, 남북통일을 내 손으로!" 하고 이 사나이가 하늘 앞에 다짐했습니다. 그때 수의囚衣를 입고 나오다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40년이 되었지만 어디서나,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맹세했으니 이 몸이 가루가 되기 전에 전부 가려 가지고···.   

 

▣ 1987.9.13(일) 최후의 결정. 본부교회.

168-095 나는 공산주의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같은 20대부터 투쟁한 사람이에요. 공산당의 두목들, 이북에 들어가서 장관하는 녀석들 중에서 내 친구도 있습니다. 왜정 때, 학창시절에는 "너하고 나하고 같이 합동으로 투쟁하지만, 미래에는 결렬될 것이다. 이 자식아!" 그러던 것이 실감이 난다구요.

 

내가 오늘날 이와 같이 공산주의를 때려잡는 괴수가 될 줄 그들은 몰랐다구요. 난 벌써 알았어요. 내 손에 의해서, 민족을 하나 만들자, 국가를 넘어 수많은 민족을 하나 만들자고 한 것입니다.

 

▣ 1972.10.14(토) 통일의 용사. 구리시 교문동 통일동산.

- 흥남감옥 출옥기념 예배.

 

063-238 우리 친구 가운데는 일본에 가 있을 때 공산당하고 합작 공작을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때 그들을 보고 "너희들하고 나하고 오래지 않아 싸울 날이 있을 것이다" 하고 선포했다구요.

 

"그렇지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공산당이든 민족주의든 합해야 된다" 이래 가지고 그때 별의별 놀음을 다 했어요. 北京을 중심삼고 下關에서부터 안동현까지 차로 연락하는 데는 차바퀴 밑에서 8시간, 9시간 달리는 그런 놀음까지 했다구요.

 

나라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런 걸 생각해 보면 통일교회 청년들, 아직까지 내 마음에 느낌받는 것이 덜하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 자아 주관

 

▣ 1964.6.12(금) 대구교회. 정신력과 훈련.

- 흥남감옥에서 선생님을 모셨던 손영출 씨 간증 후 말씀.

 

154-165 선생님은 30평생에 옷을 하나도 안 사 입었어요. 전부 다 새 옷을 안 사 입었어요. 왜? 隱身해야 돼요. 隱身. 나타나서는 안 된다 이거예요. 그렇잖아요? 때가 있는데 나타나면 되느냐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저 뒷골목의 고물상에서 제일 나쁜 옷을 사 입으려고 했고 갖고 다니는 모자도 한 곳, 두 곳은 찢어진 것을 쓰고 다녔어요.

 

선생님이 옛날에는 더벅머리 총각이었어요. 이렇게 해 가지고 선생님이 그렇게 밉지는 않았어요. 선생님이 아마 여자들한테 밉지 않은 모양이에요. 아, 이 간나들이 뭐 편지를 하지 않나···. 그거 나하고 원수예요. 어떤 간다들은 뭐···.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그랬다는 게 아니에요. 내가 뭐 눈 하나 깜짝이기나 했나. 뭐 세상에서는 뭐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볼 때 여자처럼 무서운 것이 세상에 없다고 봐요. 에덴동산에서 타락할 수 있는 요소가 100% 있었다 이거예요. 내가 생각할 때 천사장이 껍죽거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천사장, 그 종 녀석한테 해와가 틀림없이 "아이고, 등을 굽혀라. 등을 꼬부려라" 하며 뒷발로 그저 올라가려고 이랬을 거예요. 틀림없이 그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소질이 많거든요. 별의별 유혹을 다 했을 거예요. 별의별 일이 다 있었을 거예요. 

 

1) 고물상에서 옷을 샀다. 옷은 후줄근하게 입고 언제나 머리를 숙이고 다녔다. 

2) 남자들이 주의해야 할 것이 여자이다. 

-  자는 방에 혼자 싹 들어와 가지고 밤새껏 우는 사람

-  별의별 사정을 하는 사람

-  소제해 주고 돈을 갖다 놓고 별의별 유혹. 나중에는 혈서까지 쓰는 놀음이 벌어졌다. 

 

▣ 1989.7.9(일) 본부교회. 민족을 초월한 메시아의 사명을 하라.

- 6500가정 일본식구. 일본어.

 

192-284 일본에서도 선생님이 젊었을 때에는 貸家 かしや가 있지요?  かしや, 알아요? 돈이 필요할 때 시계 같은 것 맡기는 그런 곳을 뭐라고 그래요? 돈을 빌린다든지 옷 같은 것은 쓱 말이에요···. (質屋입니다.) しちや! しちや지요?

 

학생들이 옷을 전당포에 맡겨 놓고 찾아가지 않은 것들 중에서도 제일 낡고 냄새가 나는 것을 입고 머리도 이렇게 했어요. 가는 데마다 여자들이 따라다녔어요. 저 남자는 말이 없는 남자라고 하면서 ···.  저런 추한 남자한테 누가 관심을 갖겠느냐고 했겠지만 그 반대지요. 스스로 그 환경을 수습해 가면서 ···.

 

여러분도 그렇겠지요? 자기를 이긴다고 하는 것이 어려워요. 제일 어려워요. 자기를 이기고 진정으로 한국에 와서 한국을 사랑했느냐고 할 때 어때요?

 

▣ 1965.10.8(금) 와세다 대학 원리연구회. ノカタ학사.  

- 선생님의 동경 유학시절

 

015-180 선생님은 보면 입은 옷은 헌 옷 가게에서 산 싼 것들이다. 그 옷을 보면 반들반들 윤이 난다.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는 기분을 내서 포마드라든가 무엇인가를 바른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러지 않았다.

 

* 또 길을 걸을 때에는 밑에서부터 45도 이상 위를 보지 않는다. 

 

▣ 1965.11.1(월) 소망의 조국의 슬픔. 광주교회.

- 제1차 세계순회 마치고.

 

155-315 학생 시절에도 될 수 있으면 머리도 길게 하고, 될 수 있으면 얼굴도 나타내지 않으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또 왜정 때에는 말이에요, 고물상에서 반질반질한 옷을 사 입고는 땅만 들어다 보고 다닌 거예요. 그렇지만 그것이 나로서는 도를 닦는 거라구요.

 

▣ 1975.10.14(화) 벨베디아. 하나님의 슬픔과 인간의 무지.

080-066 또 젊었을 때에는 머리는 이렇게 하고 옷은 후줄근하게 입고 언제나 머리를 숙이고 다녔다구요. 왜 그랬느냐 하면 유혹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의 유혹이 많기 때문입니다. 타락론을 내가 알기 때문에, 그런 문제에 있어서 위배되면 큰일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저 뭐 후줄근하게 누구도 바라보지 않게끔 하고 이런 놀음을 해 왔다구요.

 

여러분이 타락론에서 배웠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참으로 아름다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사실입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잘생기진 못했다구요. 뭐 잘생겨 보여요? 잘생기지는 못했다구요. 그러한 문제를 놓고 상당히 고민했다구요. 그러한 놀음을 하면서···. 뭐 일화가 많다구요.

 

남자들이 주의할 것이 여자입니다. 여자라는 것은 참 이상하다구요. 남자가 자는 방에 혼자 싹 들어와 가지고 밤새껏 우는 사람이 없나, 별의별 사정을 하는 사람이 없나, 와서 소제해 주고 돈을 갖다 놓고 별의별 유혹을 다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중에는 혈서까지 쓰는 놀음이 벌어지는 거예요. 내가 이런 문제를 상당히 알고 있기 때문에 참으로 빌어먹는 사람같이 후줄근하게 하고 지낸 한때가 있었다구요.  

 

3) 일본을 방문한 손님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남자가 문 선생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 벌거벗은 미녀들 백 명 가운데 들어가서 하룻밤을 자더라도 남자의 봉이 안 일어나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복귀의 길을 못 갑니다. 

 

▣ 1990.2.3(토) 통일교인의 길. 한남동.

- 일본 책임자. 일본어.

 

198-223 선생님이 일본에 있을 때 학교에 가고 나면 방에 와서 청소를 하고 돈도 넣어 놓고 하던 일본 여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그들을 타이르면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세워 준 일본 여자들이 많이 있어요.

 

신기한 것은 내가 영화관 같은 데 가면 말이에요, 학생 시절에는 냄새나는 교복을 벗고 깨끗이 갈아입어요. 교복은 냄새가 나지요? 머리카락은 늘어뜨리고 입은 꼭 다물에서 색기도 없는데 20대 30대 여자들이 앉으면 자기들도 모르게 선생님의 손을 쥐어요. "뭐요? 당신 손이 내 손을 쥐지 않았소!" 하면 "그렇습니까? 앗!" 하고는 얼른 손을 뗍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기한 남자지요? 연구를 해도 모르 남자입니다. 이런 남자가 색을 밝혔으면 그 방면에 제일가는 남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일본에 가서 부끄러운 것 없습니다. 당당한 사람이에요. 일본에 있어서 선생님을 유혹하려고 했던 여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일본을 방문한 손님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남자가 문 선생일지도 몰라요. 그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아무리 일본 여자가 우아하게 꾸미고 향수를 덮어쓴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홀려서 엎어질 남자가 아닙니다. 거기까지 가야 돼요. 벌거벗은 미녀들 백 명 가운데 들어가서 하룻밤을 자더라도 남자의 봉이 안 일어나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복귀의 길을 못 갑니다. 그거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4) 일본 여자들이 선생님을 많이 유혹했다구요. 거기에 말려들었더라면 큰일났겠지요? 여자라고 하는 것은 무서운 거예요.

 

▣ 1990.7.7(토) 본부교회. 위하여 사는 정신.

- 6500가정 일본 식구. 일본어.

 

205-067 일본에 갔을 때 일본 여자들이 선생님을 많이 유혹했다구요. 거기에 말려들었더라면 큰일났겠지요? 여자라고 하는 것은 무서운 거예요. 아, 정말이라구요. 여자가 잠을 자고 있는 데 남자는 혼자 못 들어가지요? 그런데 남자가 자는 데는 여자가 마음대로 들어온다구요. 일본 여자들이 그래요. 일본 여자들이.  

 

선생님의 경험담인데 이것을 얘기하면 전부 이 얘기에만 정신을 팔게 될 거라구요. 어때요? 선생님이 20살 된 미남으로서 일본에 나타나면 일본 여자들이 전부 선생님과 결혼하고 싶어할 거라구요. 사실이 그렇다구요. 프러포즈를 한다구요. 선생님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가지고 오고 돈 같은 것을 가져오기도 하고···. 

 

그렇지만 선생님은 엄격하다구요. 엄격한 선생님이에요. 선생님은 일본 사람을 속인 일이 없어요. 일본 사람을 이용해서 이익을 보겠다고 한 적도 없습니다.  

 

5) 집 떠나서 二食을 한 것입니다. 언제나 배고파야 돼요. 배고픈 것이 救世主입니다. 

- 먹는 것, 자는 것, 금욕하는 것이 3대 사탄의 무기입니다. 그게 직통으로 오더라구요. 그걸 극복해야 돼요.  

 

▣ 1992.2.9(일) 2세들이 세워야 할 전통. 한남동.

- 참부모님 탄신일 경배식 후.

 

226-287 선생님은 자기를 위해서는 안 쓰는 것입니다. 내가 30세까지 옷을 사 입어 본 적이 없어요. 학생 시절에도 전부 다 고물상에 가서 사 입었어요. 왜? 그때는 선생님이 얼굴이 못생기지 않았다구요. 이건 어디 가든지 여자들이 전부 따라다니고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머리를 이렇게 숙이고 다니고 냄새가 나게 하고 다녔어요. 땀냄새가 나게 해서 전부 곁에 오지 못하게 防禦線을 쳤다구요. 

 

그리고 二食입니다. 집 떠나서 二食을 한 것입니다. 언제나 배고파야 돼요. 배고픈 것이 救世主입니다. 배고픈 이상 뜻을 위해야 돼요. 잠자고픈 이상 뜻을 위해야 돼요. 남자로 생겨났으면 사춘기가 되어 가지고 여자를 위하는 것 이상 뜻을 위해야 되는 것입니다. 3대 목표가 그거예요. 먹는 것, 자는 것, 금욕하는 것이 3대 사탄의 무기입니다. 그게 직통으로 오더라구요. 그걸 극복해야 돼요.  

 

6) 부잣집 외동딸, 여자가 알몸이 되어 선생님의 방에 들어온 적도 있었어요.

- 학생시절에 100엔이면 1년 동안의 생활비. 그것을 매주 토요일 선생님의 책상 서랍 속에 넣어 놓은 거예요. 

 

▣ 1992.2.10(월) 복귀 이상권의 완성. 국제연수원.

- 참부모님 탄신일. 일본 책임자. 일본어.

 

227-071 선생님의 학생 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어떤 일본 여자가 선생님한테 반해서 목숨까지 걸려고 한 거예요. 그때 그 일본 여자와 결혼했더라면 큰일난다구요. 젊은 시절에는 선생님이 눈길을 한 번만 주더라도 여자들이 전부 다 호감을 갖도 따라왔습니다. 어디서나,

 

서서 먹는 초밥집에 가더라도 여자가 숨어 있는 거예요. "당신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좋아서 어쩔 수가 없어요.", 이러길래 "뭐가 좋아, 이 간나야!" 이랬어요. 그런 일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날은 여자가 알몸이 되어 선생님의 방에 들어온 적도 있었어요. 보통 남자라면 그게 아무렇지도 않잖아요. 그런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 여자는 부잣집 부인이었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학교에 간 사이에 매번 돈을 놓고 가는 거예요. 그게 100엔이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큰돈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차곡차곡 모아 두었던 거예요.

 

그래 가지고 나중에 타이르면서 일렀어요. "내가 가는 길은 니라를 超越해야 되고 세계를 품고 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렇게 알라"고 한 것입니다. 그때 그랬던 사람이 지금 살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 그런 데 관심을 가지면 안 돼요.    

 

▣ 1992.2.16(일) 본부교회. 천주의 승리자가 되자.

227-380 사탄 세계에서 선생님을 유인하려고 얼마나 애쓴지 알아요? 일본 같은 데 가 있을 때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여자들이 그거 참 신기할 정도라구요. 그런 역사가 참 많습니다. 벌써 하루 이틀만 만나 주면 자기도 모르게 나만 따라오는 것입니다.

 

여자처럼 무서운 게 없습니다. 남자가 방에서 혼자 자는데 발가벗고 들어와요. 남자들은 그런 것을 좋아하는 거 아니냐 이거예요. 그렇지만 그걸 전부 다 극복해야 돼요.

 

* 옷을 가려 입고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게 해서 새로운 여자로 만들어서 돌려보내야 할 책임을 지고 일해 나온 것입니다. 선생님을 농락하려고 별의별 일들이 다 많았지요. 벌거벗은 미인들 100명 가운데 들어가도 사고가 없어야 됩니다.

 

▣ 1988.10.16(일) 자신을 지키라. 한남동.

- 축복 2세.

 

182-174 자, 잊지 말고 너희들을 잘 지켜야 돼. 선생님 몸을 지키기를 얼마나···. 선생님에게 참 어려움이 많았어. 선생님은 어디 가든지 쾌활하다구. 어디에 가든지 친구 잘 사귀고 그런다구. 어디 가든지 말이야 재미있거든. 또 뚱뚱한 남자지만 참 재미있다구.

 

이러다 보니 여자들이 참 많이 따르려고 했어. 어니, 아니야. 지난날에 남자가 자는 그 방에 여자들이 벌거벗고 들어와. 그거 어떡해야 되겠어? 놀라자빠지면 안 되는 거야. 들어오라고 해서 자기 자리를 내놓는 거야. 뭐라고 하겠나. 벌거벗고 들어왔으니 자야지. 자라고 하는 거야. 누가 들어오더라도.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구. 황해도 부잣집 딸인데 일본 가 있을 때 그랬어. 그런 일이 많았다구. 들어와 가지고 "남자가 왜 그러냐"고, "여자의 소원을 간단히 다 이루어 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그래. 내 갈 길은 다르다고 그렇게 훈시해 가지고 그 여자를 달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래 가지고 그 여자가 참 감복한 거야. 그런 사실이 있었어.

 

이상해. 어디 극장 같은 데 가게 되면 아주머니들이 선생님의 손을 쥐는 건 보통이야. 자기도 모르겠다는 거야. 왜 그런지. 세상 사람같이 나쁜 마음을 가졌으면 얼마나 그것을 환영하겠어? 내 갈 길이 달라. 여러분, 그거 알아야 돼.  

 

* 자기의 성욕을 컨트롤해야 돼. 만약에 미인들 틈에 들어가더라도 그것이, 생식기가 일어나서는 안 돼. 컨트롤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돼. 자는 것하고 먹는 것하고 정욕. 그러지 않으면 돌아가지 못해. 그런 길을 가기 위해서 얼마나 선생님이 투쟁했는가를 생각해 보라구. 말뿐이 아니야. 그 길을 간 거야.

 

* 선한 어머니가 되어야지? (예) 선한 아버지가 되어야지? (예) 내가 우리 아들딸 앞에도 누구한테도 부끄럽지 않아. 아버지로서 하늘땅 앞에 당당하지. 어머니 앞에 남편으로서 당당하지. 선생님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 아니야. 말한 대로 하는 사람이지.

 

그래, 통일교회의 뿌리가 깊다는 걸 알고 그 뿌리에 너희들이 접을 붙여 가지고 자라야 푸른 동산에서 너희들이 선생님 같은 나무가 되는 거야. 알겠어.     

 

 

7) 영화관 - 선생님을 손을 잡는다. 

- 자기의 몸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늘 앞에 못 가는 거예요. 

 

▣ 1992.12.27(일) 새 나라 통일과 우리의 반성. 본부교회.

242-068 제일 먼저 여자가 해야 될 것은 몸 마음을 하나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을 봐도 침묵을 지키고 아들딸을 봐도 침묵을 지키고 참된 말이 아니면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왜 해요? 

 

선생님도 30세까지는 말을 안 했습니다. 선생님도 학생시절에는 미남자였다구요. 

 

* 그래, 미남자이기 때문에 어디에 가든지 여자들이 따라붙는 것입니다. 여자처럼 무서운 괴물이 없습니다. 제일 무서운 게 여자라구요. 일본 여자들은 정조 관념이 강하지 않아요. 이것은 어디에 가든지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몸을 수습하지 못하면 얼마나 큰 혼란이 벌어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통일교회에서 여자들을 만나 가지고 내가 색마라는 소문을 듣고 살았어요. 여자들을 유린하고 뭐 어떻고 어떻고 했다고 말이에요. 반대로 여자들이 나를 유린하려고 했지 내가 여자들을 유린한 게 있으면 말해 보라구요. 

 

* 일본에서 공부할 때는 전당포에 가서 그저 반질반질하게 때가 묻은 학생복을 사서 입었다구요. 세탁을 안 해 가지고 냄새가 물컥 나고, 땀내가 나는 그런 옷을 입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왜냐? 그렇게 다니면 여자들이 옆에 왔다가도 도망가는 것입니다. 또 교회에 가더라도 성경을 환히 알면서도 구석에 가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앉아 가지고 천하를 측정하는 거예요.

 

* 또 학생 때 극장 같은 곳을 가게 되면 말이에요, 나는 그때 20대라구요. 그런데 30세 35세 된 아줌마들이 선생님 옆에 앉아 가지고 자기도 모르게 선생님의 손을 붙들어요. 이런 신기한 일들이 많다는 거예요. 벌써 몸뚱이가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이러십니까?" 하면 "아이쿠, 나도 모르게···.  세상이 이럴 수 있나?" 이러는 거예요. 그런 체험이 많다구요. 그러니까 어디 가든지 여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선생님 앞에 여자가 나타나 가지고 길을 가로막고 말이에요···. 그래서 훈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도를 닦으려면 미인 100명이 발가벗고 있는 가운데 발가벗고 들어가더라도 거기에 몸이 동해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은 미인 100명, 천 명이 와서 유혹하더라도 끄떡없습니다. 그런 훈련을 한 것입니다.

 

자기의 몸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늘 앞에 못 가는 거예요.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큰 뜻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 1994.3.11(금) 자매결연. 중앙수련원.

- 제2회 1차 일본여성 특별 수련회. 일본어. 

 

255-249 학생시절에 선생님이 혼자 자고 있을 때 벌거벗고 숨어 들어온 일본 여자들이 많이 있다구요. 선생님을 보면 전부 다 꿈속에서 가르쳐 주는 거라구요. 이상한 거예요. 잠을 못 자는 거예요. 

 

부잣집의 외동딸이 선생님한테···. 그거 뭐예요? 사랑의 별. 그거 뭐라고 해요? 恋煩い(こいわずらい  상사병)고이와즈라이가 아니라 아이와즈라이라구요. 恋煩い가 아니라 愛煩い(あいわずらい)에 걸려서 뭐 죽을 지경이 되어서 공부가 안 되는 거예요. 집에 있을 수가 없어요. 선생님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거예요. 바다에 가 있으면 바다에 가 있다는 걸 다 아는 거예요. 전부 다 보인다구요. 그런 현상이 벌어져요.

 

여러분이 그렇게 되려면 아직 멀었지요? 유치원생과 마찬가지라구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지 않으면 영계와 인연을 맺을 수 없어요. 틀림없이 아는 거라구요. 보인다구요.   

 

▣ 1994.3.17(목) 탕감의 고개를 넘자. 중앙수련원.

- 일본여성특별수련. 일본어.

 

258-202 일본 여자를 보면 학생 시절이 생각이 난다구요. 학생 시절을 이야기하면 완전히 童話 (문학 어린이를 위하여 동심(童心)을 바탕으로 지은 이야기. 또는 그런 문예 작품.)같은 일이 많이 있었다구요.

 

극장 같은 데 가면 선생님이 20대인데 여자는 30대라구요. 앉아 있다가 선생님이 자리에 앉으면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선생님의 손을 잡는다구요. "뭡니까?" 하면 "뭐가 뭡니까?" 하다가는 "아!" 하는 거예요. 자기도 모르게 손이 간다 이거예요. 그건 양심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조상이 좋은 여자는 그렇게 된다구요. 

 

거리를 가다가 스쳐 지나간 여자가 멈춰서 "그동안 계속 꿈에서 본 그 남자다. 그걸 볼 때 우리 선조가 죽어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있구나!" 하고 모르는 사이에 뒤를 따라오는 거예요. 비가 오는 저녁에 집에 갈 길에 비가 많이 오기 때문에 초밥집에 들어가 초밥을 사서 먹으려고 하는데 떡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돈을 내려고 하니까 "제가 내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당신 누구입니까?" 하니까 "계산한 후에 설명하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런 현상이 많이 있었다구요. 

 

그 여자는 알고 보니 재벌 외동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고는 선생님이 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멀리서 미행해 따라온 모양이에요. 그래 가지고 나중에 혼자서 찾아와 가지고 하숙집 아줌마 형제 모두에게 인사하고 선물을 사 놓으면서 "이곳에 이런 얼굴을 한 사람이 있지요? 자기의 가장 그리운 먼 친척이기 때문에 뭔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돕기 위해서 왔습니다." 하고 말을 해 놓고 선생님이 없을 때 늘 찾아왔습니다. 토요일에 틀림없이 온다구요. 

 

그래서 선생님이 시간이 있으면 놀러라도 가자고 생각하고 오는 거예요. 토요일은 틀림없이 선생님은 교회에 가기 때문에 없다구요. 그 당시 100엔이면 1년 하숙비인데 매주 100엔 지폐를 가지고 온다구요. 

 

보통 남자면 그걸 보고 "와, 대단하다" 할 텐데 선생님은 그렇지 않았다구요. 빠짐없이 모아 놓았습니다. 몇 달 지나니 몇 천 엔이라는 목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이상은 안 된다고 하고서 떡 기다리고 있었더니, 틀림없이 또 찾아온 거예요. 그래서 물어봤어요. "이건 허락받고 가져온 돈이에요?" 하고 말이에요. "저는 특별한 저금통장이 있으니까 거기서 빼 왔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면 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했더니 "나쁘게 생각하겠지요." 하는 거예요. "나쁘게 생각하는데 딸로서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했더니 사과를 하는 거예요. 

 

그러나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왜냐 하니까 말을 하는 거예요. 꿈속에서 이렇게 가르침을 받고 자기 남편처럼 알몸이 되어서 결혼식을 하는 그런 모습도 봤기 때문에 무슨 인연이 있다 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행동합니다.    

 

▣ 1994.4.2(토) 참부모와 중생. 중앙수련원.

- 일본여성 특별 수련. 일본어.

 

259-160 일본에서 많은 여자들의 유혹을 받았지만 전부 다 좋은 방향으로 교육해 주었습니다. 그 여자 이름도 안 물어보았기 때문에 모른다구요. 그때 100엔이면 1년 생활비가 됩니다. 그런데 토요일마다 1백 엔짜리를 틀림없이 갖다 놓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렇게 몇 달 동안 갖다 놓는 것을 선생님은 하나도 안 쓰고 불러서 훈시를 하면서 돌려주었습니다.

 

"부모의 허락을 받고 이렇게 했느냐?" 하니까 "아닙니다" 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짓을 하느냐?" 하니까 "나도 몰라요. 쭉 이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니까 "영계가 가르쳐 주어서요 " 그러는 거예요. 

 

영적으로 볼 때 이것은 인간이 아니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 사람을 만나서는 자기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는 거라구요. 그 집을 안 이상 안 가면 발이 움직인다는 거예요. 발이, 발이, 발이. 그러한 현상이 생기는 거예요.  

 

8)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안 쓰고 일부러 비를 맞고 다니는 것입니다. 절반쯤 미친 사람 모양으로 말이에요.  

 

▣ 1994.8.21(일) 축복가정 2세가 가야 할 길. 코디악. 

- 축복2세.

 

263-119 선생님이 혼자 자는데 여자들이 벌거벗고 기어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전부 다 극복해야 돼요. 그래서 그런 역사를 중심 삼고 보면 사탄이 레버런 문이 덜된 녀석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분이라고, 사랑에 있어서 위대한 침피언이라고 사탄이 승낙하지 않고는 복귀섭리의 완성을 볼 수 없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어떤 일까지 있었느냐? 사탄들이 참 많아요. 극장 같은 데 가면···. 선생님이 학생 시대에는 머리를 이렇게 하고 냄새나는 옷을 입었습니다. 전당포에 가게 되면 학생들이 고향에 돌아갈 때는 옷을 전당포에 맡겨 가지고 가는데 그런 제일 싸구려 옷을 사 입는 거예요. 때가 있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옷입니다. 왜? 선생님이 어디 가든지 여자들이 따라요. 

 

* 그러니까 머리를 내리고 옷은 냄새나는 것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옆에 오지를 않아요. 그리고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안 쓰고 일부러 비를 맞고 다니는 것입니다. 절반쯤 미친 사람 모양으로 말이에요.  

 

9) 한 처녀가 선생님을 만나기 5년 전부터 가르침을 받아서 영계에 간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실체 사람이었다 

 

▣ 1995.10.29 (일) 중앙수련원. 재창조 섭리

- 세계일보 조사위원.

 

274-179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4대 심정권을 유린했습니다. 이걸 탕감 복귀하려니까, 한 남자를 대할 때 4가지 심정을 유린했기 때문에 이것을 탕감 복귀해야 돼요.

 

그래, 한 남성을 만난 여자들이 4대 심정권을 체휼해야 돼요. 얘기와 같이, 형제와 같이, 아내와 같이, 어머니와 같이 느끼는 것입니다.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거짓 사랑으로 이걸 전부 다 완전히 파괴시켰기 때문에 그런 심정적 유발을 해야 됩니다.

 

*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나쁜 사람이면 세상에 제일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여자를 유인하게 되면 100% 유인할 수 있어요.

 

이런 일을 책임지게 되면 무슨 일까지 해야 되느냐 하면 말이에요, 자기가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을 몇십 년 만에, 몇 백 년 만에 처음 만나서 발가벗고 품고 사랑하는 자기가 극진히 사랑하는 클라이맥스가 되어 오목 볼록이 합할 수 있는 그 자리에 들어가서도 제로로 돌아갈 수 있어야 돼요. 영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이런 경험과 그런 체휼을 하지 않고는 모든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어요. 쉬워요,, 어려워요?

 

벌거벗은 미인이 천 명 있는 거기에서 남자 선생님을 벌거벗겨 집어던지게 된다면 떨어져 가지고 삼각지대가 말이에요, 오목 볼록이 닿더라도 남자의 홍두깨가 일어서지 않아야 된다구요. 그렇지 않으면 순결한 하늘나라의 전통의 핏줄을 이어받을 수 없다는 거예요. 완전 부정의 기준에서만 이 일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래, 선생님이 언제나 일본 가서도 유혹이 참 많았어요. 비 오는 봄날에 가는데 말이에요, 여자가 따라와요. 따라와 가지고 기분 나빠 가지고 뭣인가? 사시미, 스시를 사고 있는데 따라와 서 있더라구요. 돈을 지불하려고 하는데 서슴지 않고 벌써 재까닥 지불해요.

 

"세상에 이런 실례가 어디 있냐? 당신이 뭔데 기분 나쁘게 이러느냐?" 하니,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걸 내가 안 하면 안 된다" 이거예요. 왜 그러냐 이거예요. 얘기하기를 벌써 5년 전부터 영적으로 당신 같은 사람이 지금까지 교육했다 이거예요.

 

그러나 그 여자는 세상에 이런 남자가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영계에 가 있는 어떤 동양 사람이 와 가지고 나를 지도한다고 생각했지 실제 지상세계에서 만난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가르쳐 준 그 장본인을 만났다 이거예요. 어떻게 해요? 따라오겠어요, 안 따라오겠어요? 따라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가 어떻게 가야 할 것을 다 가르쳐 줬다 그거예요. 그러니 내가 어떻게 안 따라오겠습니까? "그런 건 당신도 알지 않소? 따라오는 게 나쁩니까, 좋습니까?" 물어보는 거예요.

 

나를 언제든지 따라가도 된다고 했기 때문에 ···. "당신은 알지 않소?" 이러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결사적이에요. 결사적입니다. 그것을 "타락 원리 중에서 복귀의 길이 얼마나 險難한지 모른다. 그래 가지고는 이 나라가 망하고 일족이 망한다"고 설득해 가지고 바른 길로 인도하던 그런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또 선생님이 그때로 말하게 되면 고물상이 있지요? 대학교 졸업할 때 벗어 놓은 싸구려 양복을 들고 오면 이것은 1미터 밖에 가도 냄새가 나서 거기에 가지 못해요. 그런 걸 입고 다니는 거예요. 그리고 머리는 전부 다 이렇게 촌사람 같이 하고 고개를 숙이고 말하지 않는 사나이예요. 말하지 않아요. 말하면 걸려들어요. 말하면 전부 따라온다구요.

 

말씀하게 되면 교수들도 질문하게 되면 교수들이 큰일이에요. 못 당한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들어오자마자 나를 바라보는 거예요. 입을 안 여는 거예요.

 

어디 사람 많은 데 나타나게 되면 사람이 많기 때문에 전부 다 변장하고 단에 서 가지고 일대 웅변을 통하는 거예요. 그게 이상한 사람이지요. 그럴 수 있는 소질이 있다고 봐요, 안 봐요?

 

274-181 그러나 내가 하늘의 모든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이 완결되지 않았는데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빚진 자리예요. 빚진 자리라구요.

 

여자가 방해고 친구가 방해가 되니 따라오지 못하게 그렇게 분별해 가지고 30세까지 입을 안 열었어요. 좀 해 가지고는 말을 안 해요. 알겠어요? 그리고 30세까지 배가 고프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7년 동안 자취했습니다. 겨울이 되면 냉방에서 자야 돼요. 여름이 되거든 솜옷 입고 더운 방에서 자야 돼요. 열대지방에서 지옥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 훈련을 해야 돼요.

 

▣ 1998.2.3(화) 성약시대 선포. 중앙수련원.

- 세계지도자 회의.

 

290-095 학생 시대에 선생님을 유인하려는 일본 여자들이 많았다구요. 사탄 세계가 얼마나 搖亂했는지 모릅니다. 별의별 일을 다 경험했어요. 무슨 경험을 안 했겠어요? 극장에 가 있으면 아줌마가 자기도 모르게 와서 영화를 보는 도중에 선생님의 손을 붙들어요. "이게 뭐예요?" 하면 "왜 그래요?" 하다가 자기 행동을 알고는 "악!" 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쥐었다는 겁니다.

 

그런 引力이 있다구요. 선생님에게는 인력이 있어 보여요? 남극과 북극의 指南鐵과 마찬가지로 본성적 플러스가 강하게 나타나니 자연히 그 방향을 따라 끌려오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한 처녀가 선생님을 만나기 5년 전부터 가르침을 받아서 영계에 간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실체 사람이었다 이거예요. 그런 사람을 만났으니 안 따라오겠어요 따라오겠어요? 따라오겠어요 안 따라오겠어요? 얼마나 기분 나쁜지 몰라요. 

 

와세다 대학 早稲田大学에서 다카다노바바 高田馬場에 가는데 한 15분 걸린다구요. 그때 눈발이 날리는 3월 말쯤 되었는데 사뿐사뿐 따라오는 거예요. 내가 가다가 서면 자기도 서고 말이에요. 그다음에 스시바 (초밥집)에 가서 시간에 맞추어 스시를 먹고 나오려니까 돈을 미리 지불했더라구요.

 

그래서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 젊은 여자가 길가에서 지나가는 총각을 대해서 이런 행동을 일본 여자로서 할 수 있느냐?" 하니까, 그렇지 않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 뭐냐고 하니까 얘기하더라구요. 그리고는 "따라가야 되겠소 안 따라가야 되겠소?"하고 묻더라구요. 그거 참 이상하지요. 그렇게 다 가르쳐 준 거예요. 

 

그때 그 사람들을 내가 전부 다 그냥 두었으면 말이에요, 결혼하자고 생명을 걸고 달라붙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내가 나쁜 짓을 하고 키스라도 한번 했으면 문제가 벌어지는 거라구요. 그런 이상한 사건이 참 많습니다. 가는 데마다 여자들이 문제라구요. 

 

밤에 자게 되면 호텔에 가게 되면 처음 보는 아줌마가 이불속으로 들어오는 그런 일도 많았어요.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하면 자기도 모르게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거 이해하지요. 영계가 씌워 가지고 들어왔다는 것을 안다구요. 그래서 여자 때문에 내가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 1998.3.4(수) 남북통일의 방안. 제주국제연수원.

- 여성연합, 청년연합 간부.

 

290-323  내가 학생 시절에는 머리를 내리고, 학생복을 입었어요. 졸업생들의 것으로 4년씩 입었던 거예요. 땀에 절어 가지고 냄새가 나는 옷입니다. 한 발자국만 가까이 가려고 해도 땀내 때문에 못 가는 것입니다. 그런 옷을 입고 다녔다구요. 왜? 이놈의 여자들이 원수입니다. 일본 나라는 사탄 나라입니다.

 

영화관에 가서 아주머니들이 옆에 앉게 되다면 자기도 모르게 내 손을 쥔다구요. 여러분은 그래 봤어요? 좋은 사람이 있으면 그래도 봤겠지요. 아무것도 모르고 잡는 거예요. "이게 뭐예요?" 하면 "뭐가 뭐예요?" 하는 거예요. 손을 들면 "악!" 하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러는 거예요. 발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일본에 있을 때 비 오는 봄철에 아가씨가 따라오더라구요. 얼마나 기분 나빠요. 그런 것을 내가 다 알지요. 차 탈 시간이 멀었기 때문에 스시 가게에 가서 스시를 사 먹고 있는데 와서 서더니 스시 값을 다 물어 줬어요. "세상에 이런 실례가 어디 있느냐?"고 하니까 "내가 그러지 않으면 못 산다"고 하더라구요.

 

세상에 처음 만났는데 그런 말을 할 게 뭐예요. 그러고는 "내가 당신을 만났으니까 또다시 이 길을 찾아올 텐데 쫓아 버리지 말라"고 그런다구요.

 

얘기하는 것이 그거예요. 벌써 5년 전에 나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만나는 것을 가르쳐 준 거예요. 자기는 죽은 사람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영계에 간 동양의 성인의 한 사람이 나에게 와서 가르쳐 준다" 그랬는데 세상에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따라가겠어요 안 따라가겠어요? 내가 낳기 전에 나를 본 사람이 많아요. 그거 이상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타고나야 됩니다. 사람의 인력으로 안 돼요.  

 

▣ 1999.6.14(월) 참부모님 천주 승리 축하 선포식 총평.

- 참부모의 날.

 

302-257 하나님이 2세가 타락한 것을 눈으로 보겠어요? 지옥 밑창에, 지옥의 거름더미에 처넣어야 된다는 거예요. 선생님은 그거 훈련했습니다. 어느 누가 와서, 사랑하는 미인이 와서 유혹해도 극복했습니다. 학생 시절에는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구요. 미인 처녀들이 이불속으로 기어 들어오는 거예요. 발가벗고 "나 살려 달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그거 어떻게 해야 돼요? 어떻게 할 터예요? 혈서를 쓰고 죽어야 됩니다. 자기 몸을 내놓고 내 일신을 마음대로 하라고 하는 겁니다. 이럴 때 딱 정신을 차리는 거예요. 완성한 아담의 혈통 가운데 타락할 수 있는 인연의 심정의 동기가···. 

 

그래 가지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안 되면 그 자리에서 굴복해 가지고 통곡하는 거예요. 영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그런 자리를 거치지 않고는 앞으로 그 핏줄의 고개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 그런 길을 거쳐 나오면서 영적인 유혹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기도를 하면 동서남북으로 여자들이 전부 다 품고 기다리는 거예요. "남자는 여자로서 나 사랑하지요?"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전부 다 무마시켜 나온 것입니다.

 

도인들이 거기에서 전부 다 타락했습니다. 그게 사탄의 사망의 무저갱입니다. 영원히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한번 떨어지면 돌아올 수 없는 것입니다. 밑창이 있으면 돌아올 생각이라도 하지만 무저갱입니다. 영원히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누구도 알지 못한 거예요.

 

▣ 1999.8 영계를 바로 알자. 파라과이 아메리카노호텔.

303-092 옛날에는 선생님이 앉아서 다 통했지만 그걸 다 막은 거예요. 그걸 막아 가지고 몸뚱이 가지고 사탄 세계에 대해 탕감 역사를 해 나온 거예요. 영적으로 통일해서 육적으로 통일하기 위해서 사탄하고 싸우고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간지러운 것도 다 복귀했어요. 아무리 이렇게 간지럽혀도 딱···. 간지럽지만 안 간지럽게 느끼지.

 

자기 사랑하는 사람과 첫사랑을 하여 클라이맥스에 갈 때 딱 제로로 돌아갈 수 있어야 돼요. 처음으로 돌아가야 돼요. 그래야 사탄 혈통을 단절할 수 있는 거예요. 그거 필요해요. 

 

자기 사랑하는 아내를 원수에게 넘겨주고 복을 빌어 줄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심정 세계를 몰라요. 천사장이 그걸 해야 돼요. 오시는 아담 앞에 지금까지 도적질해 간 여자들을 전부 다 원수에게 넘겨줘야 돼요. 넘겨받기 전에 내가 원수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넘겨줄 수 있어야 그걸 받을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는 거예요. 탕감하려니까 그래야지요? 

 

여자들도 그렇지요. 선생님은 좋은 걸 마음대로 할 것 같은데 안 하는 거예요. 마음대로 안 하는 거예요. 딱 경계선에 가면 안 해요. 얼마나 그런 일이 많았겠노? 

 

여자는 무서워요. 꼭 괴물이에요. 세상에서 제일 괴물이 여자 이상 괴물이 없어요. 문평래는 미인이 들어와서 옷을 벗고 자기를 사랑 안 하면 총 가지고 죽이겠다면 어떻게 할 거야? (아버님이 가르쳐 주신 참사랑이면 어떤 경지도 극복할 수 있겠다, 그런 자신이 생깁니다.) 참사랑으로 어떻게 극복해? 싸움하겠나, 뭘 하겠나? (그 시험을 이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몸을 맡겨 가지고 이겨야 돼. 자기 몸을 맡겨야 돼. 별의별 짓을 다 하더라도 그게 동하지 않아야 돼. 그래 가지고 自動 屈伏시키는 거야. 그런 여자들이 무슨 짓을 안 하겠어요? 그래서 우주 주관 바라기 전에 뭐? (자아 주관 완성하라.) 

 

어머니에 대해서도 그래요. 내가 딱 끊는다면 끊는 거예요. 그러니 무서운 사람이지요. 선생님은 학생 시절에 이런 일이 많았어요. 문을 뚫고 들어오고 이불 안에 옷 벗고 들어오고 그랬다구요. 강제로 쫓아버릴 수 있나? 상사병에 걸린 사람이나 마찬가지예요. 죽은 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남자를 誘惑하는 거예요. 심각한 거예요.

 

* 함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구요. 사탄의 뿌리부터 뽑아 버려야지. 그게 얼마나 힘들어요?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눈 깜빡 안 하는 것을 세 시간 이상씩 훈련했어요. 

 

10) 마음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고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 1999.9.10(금) 삼십절선포. 중앙수련원.

304-119 선생님은 이런걸 가지고 간지럽혀도 간지럼 안 탑니다. 그렇게 훈련했어요. 여자의 유혹에도 그렇습니다. 선생님을 누가 간지럽혀도 간지럼을 안 탑니다. 그런 훈련이 되어 있어요.

 

* 자기의 몸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하지 못하면 사탄의 誘惑에 빠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제일 사랑하던 아내와 헤어졌다가 10년 만에 만나서 자기의식을 넘어서 붙안고 사랑하고 키스하고 벗는 줄도 모르고 벗어서 클라이맥스가 될 수 있는 경지에 가서 딱 영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돼요최후의 시험이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여편네 말고 최고의 미인 수천 명이 벌거벗고 있고 나도 벗고 있는데 뛰다가 미끄러져 넘어지다 보니 그 미인 중의 미인의 생식기하고 자기 생식기가 맞닿았을 때 "영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를 알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의 딸들을 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본에 갔을 때도 선생님을 유인하기 위해서 일본 여자들이 얼마나 야단을 했는지 몰라요. 사탄들이 알아요. 선생님이 자는 이불 안으로 벌거벗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죽는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죽어도 할 수 없지요. 그걸 어떻게 수습해요?

 

그래, 자기 몸을 맡겨야 됩니다. 마음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고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아무리 해도 영점이라구요. 不具者라는 것입니다. 그것밖에 그 여자를 살릴 수 있는 길이 없어요.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의 심정을 대표한 아들이 될 수 없고 본연의 사랑의 자리를 넘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걸 참는 것은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주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알겠어요?

 

11) 우주 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 주관 완성하라. 

- "청춘끼리 단 한번 하룻밤을 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거예요. 그런 교차로에서 몸부림친 적이 수십 번이 넘었다.

- 내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당신은 위대한 남자로 잘 골라잡았습니다." 했다.

 

 1986.1.3(금) 제3회 애승일 말씀. 본부교회.

137-287 나는 알았어요. 나는 그랬다구요. 나는 그랬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오죽이나 안타까우면 "우주 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 주관 완성하라"고 하면서 얼마나 몸부림친 줄 알아요? 습관적 타락성이 얼마나 강한지 내가 잘 아는 사람이라구요.

 

그 말은 쉽지만 "우주 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 주관 완성하라"는 말은 쉽지만 그것을 이룰 때까지 얼마나 몸부림친 줄 알아요? 그 청춘시대에 이 사악한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발가벗고 내 침대를 거쳐 가더라도 나는 그거 넘어서지 못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아무리 미남자고 아무리 자유 환경에 대해서 내 마음대로 관계하더라도 여자를 유인해 가지고 타고 앉겠다는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거기에는 뭐냐 하면 사랑의 욕망이 격동하는 사탄의 권 안이에요. 먹는 것, 자는 것, 정욕, 배고픈 걸 극복해야 됩니다. 잠자는 것을 극복해야 돼요. 나는 그런 투쟁, 3대 투쟁 목표를 정했어요.

 

내가 일본에 있을 때 내 방에 찾아 들어 온 여자들이 많았어요. 그렇지만 나는 그에게 동생같이 권고하고 간곡히 눈물을 흘리면서 충고하던 것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청춘끼리 단 한번 하룻밤을 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거예요. 그런 교차로에서 몸부림친 적이 수십 번이 넘었어요. 귀하다면 귀한 분이에요. 역사를 들어 찬양해야 할 귀한 분입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당신은 위대한 남자로 잘 골라잡았습니다." 했다구요.

 

◑ 하숙집

- 젊은 부부의 싸움 

 

▣ 1992.3.27(금)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되는 중심. 동경교회.

228-156 모든 여자들은 "이왕이면 남자로 태어나지 왜 여자로 태어났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일본 여자들은 특별히 그렇다구요. 방의 미닫이를 쓱 열고 남자가 들어오면 무릎을 꿇고 "어서 오세요" 하면서 맞이한다구요. 대단하지요?

 

일본 여자들이 불쌍합니다. 선생님은 학생 시절에 그런 것을 많이 봤다구요.  그것을 보고 일본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이 하숙을 했던 곳에 젊은 부부가 있었다구요. 그런데 매일매일 싸움이더라구요  남편이 술을 마시고 12시에 들어와 부인을 한 대라도 때리지 않으면 잠을 못 잔다고 했습니다. "아!" 하는 비명소리에 선생님이 놀라서 벌떡벌떡 일어나기도 했다구요. 

 

그래서 선생님이 한 번은 남편에게 충고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당신은 아직 결혼을 안 했기 때문에 부부싸움의 깊은 내용을 모른다" 하면서 웃더라구요.

 

그래서 부인한테 가서 "당신은 매일 두들겨 맞으면서 무엇 때문에 저런 남자한테 붙어 사느냐? 젊을 때 해결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한다"고 하니까, 부인도 "그런 것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한테는 설명할 수 없다"고 하더라구요. 거기에 그 나름대로의 비밀스러운 세계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무엇 때문에 태어났느냐? 여자를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동기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남자는 여자를 위해서,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해 두라구요.  

 

▣ 1992.4.11(토) 완성과 해방. 리틀엔젤스 예술회관.

- 기성축복 참가자 및 일본 식구 집회. 일본어.

 

229-138 선생님이 유학 시절에 하숙집에서 지냈는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이 있어요. 하숙집 아저씨가 매일 술을 먹고 늦게 돌아와서 부인을 두들겨 패는 거예요. 그리고 그 부인도 성격이나 기질이 그렇게 순종하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여자도 신경질적이 되어서 "아!" 하고 소리치면 동네 전체가 떠들썩해요. 선생님도 자다가 그것 때문에 깬 적이 몇 번이나 있었어요.

 

그래서 하루는 아저씨가 출근했을 때 아주머니에게 "왜 그렇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이 집에 살고 있고? 젊었을 때 하루빨리 끝장내는 것이 좋지 않느냐?"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 아주머니가 "학생은 결혼을 안 해 봐서 부부관계를 잘 몰라" 하더라구요. 이야, 선생님이 놀랐어요.

 

남자에게 그런 무언가가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도망을 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이거예요. 그게 사랑의 힘이에요. 그 아픔보다 사랑의 힘이 강하면 그 여자는 영원히 도망갈 길이 없습니다. 정말이에요.

 

◑ 전보를 안 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 조그만 선물이나마 양손에 번갈아 가면서 들고 갈 때 "부모가 어떤 얼굴로 대할까?" 생각하면 아주 감상적인 시간이다.

 

▣ 1967.6.11(일) 성신. 전본부교회. 세계순회 환송 집회.

018-242 내가 지방에 있는 여러분들은 오지 말라고 했는데, 차비 없애면서 왔군요. 나는 본래 전송 같은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일본에서 공부하던 학창시절에도 절대로 전보를 안 쳤습니다. 역에서 집까지 한 20리 됩니다. 그런데 될 수 있으며 바람 불고, 추운 날 또는 비오는 날에 걸어가면서 가만히 기도해 보면 "참 휼륭한 분이 세상을 지었구나" 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에 부모나 형제들이 와 가지고 쑥덕쑥덕하게 되면 고향의 맛을 다 잊어버립니다. 그렇지만 해가 기울어 밤이 되었을 때와 또는 힌눈이 내리던 그런 밤의 추억들은 일생 동안 잊혀지지 않습니다. 

 

조그만 선물이나마 양손에 번갈아 가면서 들고 갈 때 "부모가 어떤 얼굴로 대할까?" 생각하면 아주 감상적인 시간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기간이 얼마나 복된 기간이었는지 모릅니다. 

 

▣ 1964.3.23(월) 하나의 세계를 이루자. 대구교회.

- 안토니 부르크의 간증 후에 말씀.

 

154-068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저 사람이 통일교회 문 아무개다"라고 하는 것이에요. 나 이번에 차 타고 가면서는 절대 그런 패들 보고 싶지 않아요. 차 타고 가는데 뭐 통일교회 패들이 수십 명 나와 가지고 선생님 오신다고 …. 여러분은 이제 선생님이 여기 올 때 대구역에도 나오지 말라구요. 알겠어요?

 

내가 옛날에 학창시절에 일본에 있다가 집에 올 때는 집에 전보도 한 장 안 띄우는 거예요. 우리 어머니는 내가 온다고 하면 집에서 역까지 한 20리가 되는데 버선발로 혼자 나온다구요. 그게 멋진 거예요? 고향 집을 찾아오는데 가족과 더불어?  그게 아니에요. 그게 참 귀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마중 안 나와도 괜찮아요. 그런다고 나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 1943.10.4  곤린마루로 귀국 예정

- 1943.10. 중순 귀국 

- 졸업할 당시 태평양 전쟁 중이었는데 병역 문제도 있고 해서 6개월 단축해 9월에 졸업하게 되었다.

: 우리가 졸업할 때는 공학 계통의 학생들은 6개월 먼저 졸업했다.

: 관부연락선 關釜連絡船으로 돌아가게 되어 몇 시에 도착한다고 전보를 쳐 두었다. 그러나 사정이 있어서 표를 무르고 가지 못하게 되었다.

: 1943년 10월 4일 기차를 타려고 도쿄역에 척 들어섰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서 그 가치를 안 탔다. 전송 나온 친구들과 富士山 熱海에 놀러 갔다. 

: 내가 등산 가는 바람에 1주일 있다가 돌아왔다. 그러니 고향에서는 난리가 났다.  

: 시모노세키下関롤 거쳐 서울에까지 오는 표를 끊었다. 그때 타야 할 배가 10월 4일發 곤린마루崑崙丸다.

: 1943년 10월 5일 오전 1시 15분께 오키노시마 沖ノ島 동북쪽 약 10리 해상에서 관부연락선 곤린마루崑崙丸가 沈沒하였다.

 

▣ 1965.10.3(일) 하나님의 참된 아들딸이 돼라. 동경교회.

- 주일 밤 화동회 때.

 

15-146 선생님의 졸업 당시는 대동아 전쟁 중이었는데 병역문제도 있고 해서 6개월 단축해 9월에 졸업했다.

 

關釜連絡船으로 돌아가게 되어 몇 시에 도착한다고 전보를 쳐 두었다. 그러나 사정이 있어서 표를 무르고 가지 못하게 되었다.

 

마침 그 배가 전쟁 때문에 침몰하게 되었다. 고향에서는 승선자 명단을 조사해 보니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다들 죽었다고 생각하여 대소동이 일어났고 부락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자 맨발인 것도 모르고 치마도 입지 않고 20리나 되는 곳까지 달렸던 것이다. 도중에 발뒤꿈치에 가시가 박혔었는데 일주일간 그 아픔도 모르고 있었다. 선생님이 돌아오고 나서야 그때 처음으로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때의 부모의 애정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 정도로 부모는 선생님을 사랑했다. 

 

1. 어떠한 명령을 하더라도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하며 떠났다.

 

▣ 1969.5.2(금) 전 세계는 뜻을 시급히 요구한다. 전본부교회.

- 제2차 세계 순회 귀국 환영식.

 

022-224 선생님이 유학을 마치고 일본을 떠날 때 앞으로 21년 후에는 일본에 다시 와서 어떠한 명령을 하더라도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하며 떠났습니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20년 만에 일본에 가서 명령을 하게 됐으니 무슨 일이든지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2.  "20년 후에 내가 틀림없이 돌아올 것이니 그때 다시 만나자." 

 

▣ 1970.9.20(일) 통일신도의 갈 길. 춘천교회.

034-353 선생님은 일본을 떠나오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20년 후에 내가 틀림없이 돌아올 것이니 그때 다시 만나자. 지금은 일본 천황에게 원수를 갚지 못하여 우리 민족의 한을 풀어 주지 못하고 가지만 앞으로는 너희 나라의 백성, 너희 나라의 청년 남녀들에게 내가 명령하고 가르칠 때가 올 것이다. 그때 다시 만나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후 선생님은 20년 만에 일본에 갔습니다. 가자마자 제일 궁금한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우리 교회에 청년 남녀들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 그들에게 말하기를 일본은 우리 한국의 원수인데 내가 너희들을 살리기 위해서 밑천까지 대 주며 특사를 보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거기에 모인 젊은이들에게 "너희 나라의 죄가 무엇이지 아느냐?" 하고 물으니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했더니,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전부 다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일본도 천황도 다 필요 없고 통일교회와 통일교회 문 선생이 승리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또 선생님이 명령하고 들이 몰면 무슨 일이든 다 할 거냐고 물으니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회입니다.

 

3. 곤린마루의 파손과 김경계 어머니의 사랑.

 

▣ 1971.6.24(목) 그리운 고향. 전본부교회.

045-135 더욱이 어머니께 미안한 것은···. 여러분 중에도 아는 사람은 알 거예요. 왜정 때 관부 연락선 곤린마루가 깨져서 침몰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그 배를 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배를 타고 고향에 간다고 전보를 쳐 놓고 막상 떠나려고 동경역에 나가니까 하늘이 가는 길을 막더라구요. 그때 친구 세 사람이 전송을 해 주려고 나왔었는데 그 길로 돌아서 가지고···. 그 시간에 차를 타고 배를 탔으면 배하고 같이 깨졌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어 가지고 친구네 집에 가게 됐던 것입니다. 고향에 간다고 전보했는데 어떻게 돼서 못 간다고 전보를 해야 할 텐데···. "자, 이렇게 되었으니 며칠 동안 우리와 같이 놀자"고 하는 친구들에게 끌려가서 3일 동안 지내고 보니 전보를 못 쳤습니다.

 

그때까지도 배가 깨졌다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사흘 후에야 그것을 알게 된 거라구요. 그래 가지고 집에 전보를 하긴 했는데 그 과정에 고향에선 큰 난리가 벌어진 거예요. 들리는 소식엔 배가 깨졌지 고향에 온다는 전보는 왔으니 틀림없이 죽었다 이거예요.

 

여자가 치마를 안 입고 속바지 차림으로 다닌다면 그건 자기 정신이 아니지요. 어머니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9월이니까 춥지도 않은데 신발이니 뭣이니 생각할 여지가 있었겠어요? 그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 부모의 사랑이 그렇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선생님의 고향 마음에서 정주읍까지는 20리입니다. 어머니께서는 그 20리 길을 왕발로 뛰고 부산까지 갔다 왔는데 신이고 옷이고 무엇이고 생각할 정신이 있었겠어요? 우리 아들 죽었다고 맨발로 뛰어나와 가지고 부산 수산 경찰서까지 가서 조사를 하니 명단에는 없고 알 수가 있나요?

 

그러니까 어머니는 틀림없이 아들이 죽었다고 이래 가지고 그렇게 골똘한 마음을 가지다 보니 왕발로 뛸 때 그 발바닥에 아카시아 가시가 박혔다는 것을 몰랐다는 겁니다. 그것이 박혀 가지고 곪아 터질 때까지도 몰랐다는 거예요.

 

그때 내가 보름 후인가 하여튼 열흘이 지난 후에 돌아왔어요. 돌아와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아, 내가 너무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어머니였습니다.

 

선생님에 대하여 문중에서는 기대가 컸습니다. 저 사나이가 공부를 하고 학교를 졸업하면 그래도 무엇인가 될 것이라고 말이에요. 또 내가 그 면 일대에서는 문제의 사나이였습니다. 잘되면 충신이 되고 못되면 역적이 된다고···. 

 

성격이 대단했고 그런 소문을 낳고 있던 사나이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선생님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가를 생각하게 될 때 그런 어머니 앞에 효도를 해야 되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전혀 해 보지 못했습니다.

 

045-137 아들이 학교를 졸업해 가지고 그렇게 집에 왔는데 또 가는 곳은 감옥이라는 거예요. 그저 끌려갔다 하면 감옥으로 끌려가니 어머니가 감옥으로 찾아와 가지고 눈물을 죽죽 흘리면서 뭐 용이 될 줄 알았는데 번데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별의별 소문을 다 듣게 되었어요.

 

내가 억울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옥에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대해서 기분 나빠했다는 거라구요. 자식을 대해서 눈물 흘리는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사연이 많겠지만 나는 하나님을 생각한 것입니다.  

 

▣ 1983.3.29(화) 김경계 여사 추념 예배. 본부교회.

- 김경계 여사 탄신 92주년 기념예배.

 

125-310 일본에 가 있다가 왔는데 그때가 1943년이 되겠구만. 그때 곤린마루가 파손되었지요? 그때가 바로 내가 졸업하는 때였는데 6개월 단축시켰어요. 학교를 졸업하고 내가 하관을 거쳐 가지고 한국까지 서울까지 오는 티켓을 끊었는데 그때 타야 할 것이 곤린마루예요. 곤린마루. 그 배를 타기 위해서 기차를 타려고 동경역에 척 나섰는데 아 이거 안 되겠거든요. 기분이 참 이상하다 이거예요. 그래서 그 기차를 안 탔던 거예요.

 

그러니까 집에서는 틀림없이 며칠에 온다고 딱 보고받았다 이거예요. 딱 티켓을 끊고 벌써 몇 시에 간다고 연락을 했기 때문에 고향에서는 그날 그 시간에 딱 올 줄 알았던 거예요.

 

그런데 동경역에서 내가 뒤로 돌아섰다 이거예요. 이래 가지고 그 배를 안 탔거든요. 그런데 그 배가 파선이 됐다 이거예요. 이렇게 되니 집에서는 뭐 명단을 찾아보고 아무리 해야 할 수가 있나요? 이건 뭐 온다는 사람이 안 왔으니까요. 동경에 알아봐도 주소에 없다 이거예요. 어디론지 길을 떠났다 이거예요.

 

내가 어떻게 했느냐 하면 동경역에 친구들이 전송 나왔었는데···. 그때 방학을 맞아 친구들이 "야야야, 자 어디에 놀러 가자" 했는데 나는 가고 싶지 않으니까 너희들끼리 가라고 그랬었다구요. 그랬었는데 동경역에서 그 친구들하고 아다미인가 어디에 놀러 갔었어요.

 

그러니까 사실 얘기를 하면 그건 없게 돼 있다구요. 연락을 해도 없고 온다는 사람이 없으니 이거 죽었지. 그러니 어머니가 미친 거예요. 그래 정주에서 서울이 얼마나 멀어요. 58리 길이니까 기차로는 10시간 걸려야 되는 거예요. 그래 부산까지 오려니 얼마나 정신이 돌았어요?

 

그래 가지고 집에서 출발할 때 부인이 치마를 안 입고 홑바지 걸음으로 나섰다 이거예요. 그걸 몰랐다구요. 이래 가지고 부산까지 갔다는 거예요. 부산까지 갔는데 신발이 언제 벗겨졌는지 알게 뭐예요. 뛰어다니다 보니 아카시아 가시가 발바닥에 박혀 가지고 그것이 굳었는데 그렇게 굳어진 걸 몰랐다 이거예요. 그걸 내가 돌아온 차후에 뽑았다는 말을 듣고 내가 "아, 그렇구나! 부모의 사랑이 그렇게 위대하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 1987.11.15(일) 승리자가 될 것이냐, 패자가 될 것이냐. 본부교회.

- 목회자, 국제승공연합 지부장,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간부 집회.

 

170-206 왜정 때 관부연락선 곤린마루가 깨질 때 내가 학교를 졸업해 가지고 나올 때였어요. 배를 타기 전에 내가 전보를 쳤다구요. 그런데 집에서는 도착 시간이 됐는데도 안 돌아오니 죽었다고 해 가지고 어머니가 정주에서 부산까지 치맛바람이면 또 몰라요. 속곳바람에 맨발로 내려왔다는 거예요.

 

그때는 졸업을 9월에 했으니 춥지를 않을 때입니다. 신발을 버린 것도 모르고 맨발로 뛰어서 차를 타고 왔다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부산까지 가려면 하루는 걸릴 거라구요. 그렇게 미쳐서 달리다 보니 발바닥에 아카시아 가시가 박혔는데도 아픈 줄 모르고 뛰었다는 거예요. 열흘 후엔가 침이 박혔다고 해서 빼 보니 아카시아 가시더라고요.  

 

그걸 생각하면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냐 이거예요. 그러한 어머니에 대해서 버선 한 켤레, 양말 한 켤레 안 사다 줬어요. 손수건 한 장 안 사다 줬습니다. 불효자지요!

 

▣ 1986.10.1(수) 공의의 법정을 향하여. 본부교회.

147-283 여러분 마음에게 물어 보라고요. 내가 효자인가.

 

* 효자, 해 봤어요? 나는 효도 못 해 봤습니다. 선생님이 얼마나 불효자인지 용서받을 수 없는 불효자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몰라요. 세상 부모 중에 우리 어머니가 날 사랑하던 것만큼 사랑하는 부모를 내가 보지 못 했어요. 진정으로 나를 사랑했습니다.

 

내가 동경에 가서 학교 졸업하고 그때는 학병에 나가고 그러기 때문에 반년을 단축해서 졸업했습니다. 졸업하고 돌아올 때 며칠 몇 시 배로 돌아간다고 전보를 쳤습니다. 그런데 동경에 가서 차를 타려고 하다가 뒤로 돌아섰습니다. 그런 뭐가 있다구요.있다고요. 선생님은 남이 안 가진 안테나가 있다고요.

 

* 발이 가려다가 가만히 보니까 안 되겠다 이거예요. 벼랑에, 깊은 곳의 벼랑에 떨어지겠다 이거예요. "야, 이거 큰일이 생기겠구나" 알거든요. 그래서 전보를 쳐 놓고 돌아서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곤린마루라고 하는데 그 배가 어뢰를 맞아 침몰당해 버렸습니다.

 

* 전보를 받았는데 온다는 배가 침몰된 것이 천하에 다 알려졌는데 동경에 연락해도 연락이 안 돼요. 내가 그 집에서 인사하고 나와 벌써 딴 하숙집에 들어 있으니 전화를 하고 전보를 해도 통할 게 뭐예요. 그러니 난동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난장판이 벌어진 거예요. 틀림없이 죽었다고 말이에요. 지서 가서 물어보고 경찰서에 가서 물어봐도 "그 이후 전보가 안 왔으니까 그리고 그 배가 깨졌으니까 틀림없이 죽었소" 했다는 거예요.

 

* 이름 있는 집안의 맏며느리인데 말이에요, 한국 풍습으로 말하면 부인들이 속곳 바람으로 나서게 되면 그거 뭐예요? 미치광이예요. 미치광이. 미치광이이면 그거 쌍년이라구요. 치마 두를 것도 모르고 속곳 바람으로 그저 부산까지 달려간 거예요. 그때가 9월달쯤 될 텐데 달려가는데 버선도 신지 않고 고무신 신고 가다가 신발이 다 벗겨진 줄도 모르고, 아카시아 가시가 발바닥에 박혔는데 아픈 줄도 모르고 돌아다녔다는 거예요.

 

* 그러다 보니 내가 연락할 때까지 3주일이 지났습니다. 나야 뭐, 우리 동무 녀석한테 연락하라고 했더니 이놈의 자식이 어디 가다가 연락하지도 않고 그래서···. 오랫동안 그러고 다니다 보니 어떻게 됐느냐 하면 발바닥에 아카시아 가시 박힌 것이 굳어져 버렸어요. 그 아카시아 가시를 나를 만나 가지고야 뺏다는 것입니다. 그런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얼마나 날 사랑했어요? 그렇게 사랑한 어머니께 내가 선물이라는 것을 하나 해 드리지 못했어요.

  

▣ 1989.1.3(화) 한남동.  참사랑을 중심한 인류의 조국.

185-108 내가 일본에 가 있을 때, 그때가 왜정 때라구요. 그때 곤린마루라고, 곤륜환이라고 하는 배가 침몰이 되었어요. 바로 그 배를 내가 타게 되어 있었어요. 그때가 10월 4일인가 되는데 그 배를 딱 타게 된 거예요.

 

동경에 척 나가 배를 타러 가는데 하, 이거 기분이 좋질 않아요. 그런데 한 친구가 따라 나와 가지고 자기가 후지산을 가는데 내가 없으면 안 되겠다고 자꾸 같이 가지고 그래요. 거 이상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래, 집에 간다고 전보를 쳐 놓고 그리 갔다구요. 그러니 전보는 왔는데 난 안 왔으니 틀림없이 죽었지 뭐. 그럴 것 아니에요? 그 배를 타게 돼 있고 몇 시에 도착하게 돼 있는데 딱 그 배가···. 

 

그러니까 어머니가 부산 수상경찰서까지 찾아오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세상에···. 그 어머니는 정신이 반 나갔지요. 치마도 안 입고 거기까지 갔어요. 치마도 안 입고 홑바지만 입고 여자가 홑바지만 입고 갔으니 그거 미친 거 아니에요?

 

그리고 그때가 가을 아니에요? 가을인데 신발도 신었는지도 모르고 뛰다 보니 아카시아 가시가 이렇게 박히게 됐어요. 그것이 박혀 있는데 아픈 줄도 모르고 거기까지 갔다 와서 그저 몇 주일 지나다 보니 발바닥이···. 

 

내가 돌아오고 나서 보니 발바닥에 티눈이 박혀 가지고 걸을 때마다 자꾸 마친다 (1. 어떤 일이나 과정, 절차 따위가 끝나다. 2. 말뚝이나 못 따위를 박을 때 속에 무엇이 받지다. 몸의 어느 부분에 무엇이 부딪는 것처럼 결리다.) 이거예요. 그래서 보니 아카시아 가시가 들어 가지고 티눈 둥지가 되어 아팠다 이거예요.

 

내가 그걸 보고 아 이 세상에 용서 못 받을 죄인이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 어머니에게 내가 손수건 하나 안 사 줬어요. 선물 하나 안 사다 줬어요. 그런 모든 심정을 인류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