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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노정

1984.7.20. PM 11시 댄버리 교도소에 수감되는 날

◑ 댄버리 고난 

 

* 1971.12.5.~ 제3차 세계 순회 노정.  15개국.

* 1971.12.18. 워싱턴 도착.

* 1972.1.8. 뉴욕 도착.

* 1972.2.3.~3.11. 미국 7개 도시 강연.

* 1972.3.20. 영국 런던 강연.

* 1972.3.28. 서독 엣센 강연.  

* 1973.10.1. ~ 1974.1.29 미국 21개 도시 강연.

* 1973.11.30. 워터 게이트 선언문 발표.

* 1974.2.1. 닉슨 대통령 회담.

* 1974.2.15.~4.21. 미국 32개 도시 강연.

* 1974.9.18. 매디슨 스퀘어 가든 대회.

* 1974.9.18. 미국 8개 도시 강연 출발.

* 1974.10.8. 미국 국회의사당 초청 강연.

* 1975.12.18. 미국 상하의원 합동 초대 기념강연.

1976.6.1. 양키 스타디움 대회.

1976.9.18. 워싱턴 대회.

* 1981.10 탈세 협의로 뉴욕 연방 지방법원.

* 1982.5.18. 유죄 판결.

헌금 160만 달러의 이자 11만 2천 달러에 대한 소득세와 5만 달러에 상당하는 주식 배당금 세금으로 1973년부터 3년간 7300달러를 내지 않았다는 죄목.

"징역 18개월과 벌금 25000달러를 선고한다. "

1982.6.14.(천 윤달 4.23.) 文情進 님 탄생

* 1984.5. 대법원에서 상고를 기각.

* 1984.7.20. 미국 코네티컷 주 댄버리 연방교도소에 입감.

* 1985.8.13. 제네바 세계평화교수협의회. 공산주의 몰락 선포.

* 1985.8.20. 출감

 

▣ 참어머님  자서전

170 1984년 7월 20일은 나의 역사 가운데서 영원히 지우고 싶은 하루였습니다. 문 총재가 집을 떠나 댄버리 교도소에 수감되는 날이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그 순간에도 식구들을 격려하며 희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밤 열 시에 이스트 가든을 출발해 댄버리 교도소까지 여러 식구가 함께 갔습니다. 나는 이미 강하게 마음을 먹었기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171 분노와 슬픔을 쏟아 내는 식구들에게 문 총재는 당부했습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미국을 위해 기도하세요."

 

남편이 이국땅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건만 나는 저들을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 그리고 위하여 살라." 우리 통일운동의 가장 근본은 위하는 삶입니다. 사지의 경지에서 자신을 희생함은 물론 한 발 더 나아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상대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 댄버리 정신입니다.

 

댄버리 정신은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잃어버린 처지에서도 하늘의 뜻에 따라 희생하고 용서하며 더 큰 가치를 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때 남편은 이미 예순을 넘긴 나이였고 미국이란 나라에서 혼자 수감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유색인종에다가 소수 종교의 지도자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박해였기 때문에 내 마음은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또한 나는 막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여서 몸과 마음이 몹시 힘드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남편이 없는 공백 또한 내가 메워야 했습니다.

 

172 문 총재는 다음날 새벽 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에 따라 기독교에 봉홧불을 붙여라. 이 말을 식구들에게 전해 주어요."

 

174 마찬가지로 남편의 댄버리 옥고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우리 부부는 그 일을 승리로 바꿨습니다. 어느 때보다 힘든 시간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가장 설레고 사랑과 연민의 정이 깊어지는 나날이었습니다.

 

남편 역시 애틋한 마음을 나누는 다정다감한 하루하루였습니다. 남편은 새벽 5시 기도를 마치면 교도소 공중전화로 나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하고 부르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습니다.

 

면회 시간이 다가오면 남편은 언덕까지 나와서 나를 기다렸습니다. 어떤 때는 남편이 교도소 안에서 바닥 청소나 식당 설거지를 하다가 초췌한 모습으로 면회실에 들어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느 아내가 마음 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서러움을 억누르고 항상 환한 미소로 맞이했습니다.

 

나는 면회를 갈 때 막내 정진이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막 두 살 난 아기를 받아 안으며 남편은 즐거워했습니다. 잠시의 면회가 끝나면 남편은 밖으로 나와 우리가 탄 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전송해 주었습니다.

 

나는 오픈카를 타고 다녔는데 면회를 가서 언덕길을 오를 때면 남편은 우리가 도착할 시간에 보일 만한 장소에 미리 마중 나와 있곤 했습니다.

 

그때는 그리운 마음에 환한 웃음을 짓고 손을 흔들지만 언덕길을 내려올 때는 눈물이 쏟아질까 봐 바라보지 못하고 손만 흔들어 보이곤 했습니다. 남편도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서 있었습니다. 

 

▣ 1981.11.1(일) 한국인의 영애를 걸고 투쟁할 터. 김포공항 귀빈 대합실. 

- 국제과학통일회의 주재

- 미국 정부가 기소한 탈세사건에 대한 성명서. 

 

115-061 본인은 처음으로 한국에서 개최되는 제10차 국제과학통일회를 주재하기 위하여 미국정부의 따뜻한 양해 이래 다시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11월 9일부터 13일까지 개최되는 세계 최대의 과학자들의 모임을 성황리에 이끌고 또 모처럼 한국에 찾아온 세계적인 석학들에게 한국민이 문화민족임과 남북이 날라져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한국민의 결의를 잘 소개하고 12월 20일경 다시 뉴욕을 향해 출발할 것입니다. 

 

본인이 미국에서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해서는 이미 보도를 통하여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의를 위해 살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해 온 사람들은 반드시 험한 가시밭길을 가야만 했고 당대에 큰 고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분이 예수 그리스도요 그 외에도 세계 역사 시대에 그 실례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본인이 한 생명과 일생을 바쳐서 하나님과 세계 앞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이래 60평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고난을 겪어 왔습니다. 

 

본인은 이번에 미국정부가 본인을 고소한 데 대하여 억울하다거나 노엽다거나 섭섭하다고 생각지 아니합니다. 이 기회가 누구보다도 억울하다면 억울함을 당했고 누구보다도 섭섭하다면 섭섭함을 당했고 누구보다도 외롭다면 외로움을 당하신 하나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오히려 이것이 영광의 시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본인은 양심의 가책이 없습니다. 본인이 걸어온 일생을 돌이켜볼 때 진실로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온 일생이었으며 인류와 세계 앞에 희생 봉사하는 생활을 했다는 확신이 있을진대 본인은 세계 어느 법정도 그 이상의 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본인은 지금까지 10년 동안 미국에서 온갖 심혈을 다하여 미국을 사랑했고 미국의 정신과 도덕의 부흥을 위하여 피땀을 쏟아 온 사람입니다. 역사기 이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섭리로 볼 때 미국이 정신을 차리고 진실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지 않고는 세계를 공산주의의 마수에서 구할 길이 없습니다. 본인은 미국에서 아무것도 얻어 온 것이 없습니다. 본인은 세계 통일교 운동의 총력을 미국에 경주하여 왔습니다. 

 

만일 본인이 미국을 사랑하고 이렇게 해 온 것이 죄라면 본인은 주저 없이 정죄함을 받을 것이며 십자가의 고난도 사양치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아름다운 미국, 위대한 미국에 두 가지 허점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적 편견이요 인종차별입니다. 

 

본인은 정말 미국이 나를 고소한 것을 세계적 무대 위에서 불의와 싸워 용감하고 담대하게 전진하는 전통을 본인 스스로가 세울 수 있는 기회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이라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본인은 이 기회를 통하여 세계 앞에 한국인의 기개와 긍지를 나타낼 수 있게 된 것을 또한 감사하게 생각하며 자나 깨나 한국인의 영예를 걸고 투쟁할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세계 앞에 영광된 나라로 축복해 주실 것을 믿으며 이상으로 간단하게 귀국 인사애 대신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