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진님 탄생 1946.4.2(음 3.1.)
* "38선을 넘어가라!" 1946.5.
* 평양 도착 1946.6.6.
* 평양 대동보안서 1946.8.11.~1946.11.21. 석 달 만에 석방.
- 1946년 8월 11일 나는 남한에서 올라온 스파이라는 죄명을 쓰고 평양 대동 보안서로 끌려갔습니다. 이승만이 이북 정권에 욕심을 내고 북한에 밀파한 첩자라고 옭아맸습니다. 소련 조사관까지 나서서 나를 심판했지만 죄가 없는 걸 어쩌겠습니까. 결국 석 달만에 무죄로 석방되었습니다만,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고문으로 피를 너무 많이 흘러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지만 교회 식구들이 거둬주었습니다.
* 기성교회 목사 80명이 경찰서에 투서.
* 북한 내무서 구속 1948.2.22.
- 1948년 2월 22일 나는 이승만의 스파이자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했다는 협의로 또다시 공산당에게 잡혀갔습니다. 쇠고랑을 차고 끌려간 지 사흘 만에 머리를 깎이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 공판 5년 형 선고. 평양 형무소 수감. 1948.4.7.
- 1948년 4월 7일 공판(구금 40일 만) 5년 형
* 1948년 5월 20일 함경남도 흥남 본궁 특별노무자 수용소에 이송
* 흥남 덕리 특별노무자 수용소 이감. 1948.6.21. ~ 1950.10.14.
- 1948년 6월 21일 함경남도 흥남 덕리 특별 노무자 수용소에 이감 ~ 1950.10.14
▣ 거역할 수 없는 명령
-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누구와도 마음을 터놓게 됩니다. 자서전 106
99 광복 직후 우리나라 실정은 말할 수 없이 혼란스러웠습니다. 돈이 있어도 쌀을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마침 집안에 쌀이 떨어져 사놓은 쌀을 가지러 황해도 백천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 "38선을 넘어가라! 북쪽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으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즉시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향했습니다.
첫아들이 태어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애타게 나를 기다릴 아내가 걱정되었지만 집에 드를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엄중한 것이니 받는 즉시 순종해야만 합니다.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수십 번 밑줄을 그으며 읽고 깨알 같은 글씨로 새까맣게 메모해 둔 너덜너덜해진 성경책 하나만 들고 나는 38선을 넘어갔습니다. 그때는 이미 공산당을 피해 남으로 넘어오는 피난민이 줄을 잇고 있었습니다. 특히 종교를 반대하는 공산당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100 공산당은 종교를 아편이라고 하면서 아무도 종교를 갖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 곳으로 나는 하늘의 소명을 받고 간 것입니다. 목사라면 질색하는 공산당 세상을 향해 제 발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피난민이 늘어나자 북쪽의 경계가 삼엄해져 38선을 넘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20리 길을 걸어 38선을 넘고 평양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도 내가 왜 이 험난한 길을 가야 하나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1946년 6월 6일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본래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만큼 기독교 뿌리가 깊은 곳입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때에는 신사 참배는 물론이고,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경례를 강요받는 동방요배 등 별의별 탄압이 자행되던 곳입니다.
나는 평양 서문에서 가까운 경창리 나최섭 씨 집에서 전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남한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교회 집사였습니다.
처음에는 동네 어린아이들을 모아 돌보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어린이들이 오면 성경말씀을 곁들인 동화를 들려주며 함께 놀았습니다. 비록 어린이들이었지만 반드시 敬語를 쓰면서 정성을 다해 돌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전하는 새로운 말씀을 누군가 들으러 와 주길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은 온종일 문밖을 내다보며 사람을 그리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자 篤實한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이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밤을 새워가며 새로운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101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라면 세 살배기 어린애든 허리가 굽고 눈이 먼 노인이든 사랑하는 마음으로 경배하며 하늘같이 섬겼습니다.
* "어이구, 나이 많은 노인네라 싫다."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전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귀하디 귀합니다. 귀한 것에 남녀노소 차별이 없습니다.
* 나는 한번 聖經 講解를 시작하면 교회 식구들이 볼 일이 있다며 먼저 일어서지 않는 한 멈추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熱情을 다해 가르쳤는지 온몸이 땀이 줄줄 흘렀습니다.
사람들 몰래 밖에 나가 옷을 벗어서 짜면 옷에서 물이 뚝뚝 흘렀습니다. 여름에만 그런 게 아니라 엄동설한 추운 겨울에도 그랬습니다. 그렇게 열을 내어 가르쳤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는 모두 깨끗한 흰옷을 입었습니다. 찬송가를 수십 번 되풀이해 부르며 열정적인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찌나 감동에 젖어 울부짖는지 우리 교회를 가리켜 "우는 교회"라고들 했습니다.
102 예배가 끝나면 각자 받은 은혜를 간증했습니다. 간증하는 동안 모두들 은혜에 취해 몸이 하늘로 떠오르는 體驗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입신하는 사람, 방언하는 사람, 또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같이 영통한 이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때로 우리 교회에 합당치 않은 사람이 와 있으면 영통한 사람이 눈을 감은 채 그에게로 가서 어깨를 탁 쳤습니다. 그러면 어깨를 맞은 사람이 갑자기 눈물 콧물을 흘리며 회개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럴 때면 뜨거운 성령의 불길이 "휘익" 하고 지나다니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 불의 역사가 일어나면은 오랫동안 속을 썩이고 있던 병들이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특히 내가 남긴 밥을 먹고 위장병이 나았다는 사람의 이야기가 주변에 퍼지자 "교회 밥은 약밥"이라며 내가 남긴 밥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 같은 성령 체험들이 알려지면서 교회 문을 닫을 수 없을 정도로 식구 수가 늘어났습니다. 지승도 할머니와 옥세현 할머니는 꿈속에서 "젊은 청년이 이남에서 올라와 만수대 건너편에 있으니 가서 만나라"는 말씀을 받고 찾아온 경우였습니다.
104 큰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자꾸만 빠져나오자 기성 교회의 목사들이 나를 猜忌시기해서 경찰에 고발했습니다. 그러자 가뜩이나 종교를 눈엣가시로 여겨 없애려고 하던 공산 당국은 "옳다구나" 하고 나를 잡아들였습니다.
1946년 8월 11일 나는 남한에서 올라온 스파이란 죄명을 뒤집어쓰고 평양 대동보안서로 끌려갔습니다. 이승만이 이북 정권에 욕심을 내고 북한에 밀파한 첩자라고 옳아맸습니다.
소련 조사관까지 나서서 나를 심판했지만 죄가 없는 걸 어쩌겠습니까. 결국 석 달만에 무죄로 석방되었습니다만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拷問으로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목숨이 危殆위태로운 상태였지만 교회 식구들이 거둬 주었습니다.
* 기성교회에 다니던 신도들이 점점 더 많이 우리 교회로 몰려오자 나를 반대하는 기성교회 목사 80여 명이 경찰서에 투서를 넣었습니다.
1948년 2월 22일 나는 이승만의 스파이자 사회 질서를 문란하게 했다는 혐의로 또다시 공산당에게 잡혀 갔습니다. 쇠고랑을 차고 끌려간 지 사흘 만에 머리를 깎이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105 교회를 꾸리는 동안 길렀던 머리카락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던 것이며, 내 머리를 깎던 이 아무개의 모습까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죄를 자백하라며 무수히 때렸습니다. 그렇지만 피를 토하고 쓰러져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순간에도 정신줄을 놓지 않고 버텼습니다. 고통이 너무 커서 허리가 "퍽" 하고 꺾이면 "아버지, 나 좀 구해 주시오!" 하는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면서 "아버지, 걱정 마이소. 문선명이 아직 안 죽었습니다. 이렇게 형편없이 죽지 않습니다" 하고 배짱을 내밀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 고통이 너무 심해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면 영락없이(조금도 틀리지 아니하고 꼭 들어맞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숨이 끊어질락 말락 하는 순간에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106 구금된 지 만 40일 만인 4월 3일에 공판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나흘 연기되어 4월 7일에 공판이 열렸습니다. 공판정에는 이북에서 내로라하는 유명한 목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나에게 별의별 욕을 다 해댔습니다.
종교는 아편이라며 공산당도 나를 비웃었습니다. 공판을 보러 나온 식구들은 한쪽에서 구슬프게 울었습니다. 마치 자식이나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라도 한 것처럼 애절하게 울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나를 보고 몸부림을 치며 울어 주는 식구들이 있으니 하늘길을 가는 나는 조금도 외롭지 않았습니다. 나는 불행한 사람이 아니니 울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판결을 받고 공판정을 떠나면서 교회 식구들에게 수갑 찬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수갑에서 짤랑짤랑 종소리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 바로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감옥살이는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한두 번 해 보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게다가 나는 감방장하고 친해지는 데 선수입니다. 몇 마디만 이야기를 나누면 어떤 감방장이라도 금세 친구가 됩니다. 나는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누구와도 마음을 터 놓게 됩니다.
며칠이 지나자 제일 구석진 곳에 앉아 있는 나를 감방장이 윗자리로 끌어올렸습니다. 변기통 옆의 비좁은 구석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자리인데 자꾸 더 높은 자리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싫다고 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107 감방장하고 친해진 다음에는 방안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핍니다.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말해 줍니다. "아, 당신은 이렇게 생겼으니 이럴 것이고 또 당신은 저렇게 생겼으니 저럴 것이오"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모두들 놀라워했습니다. 처음 본 내가 자기 속을 알아맞히니 내심으로는 싫어하면서도 인정할 수밖에요. 누구 하고도 마음 터 놓고 사랑의 마음을 나누니 감방에서도 친구가 생겨 살인수 하고도 친해졌습니다. 억울한 감옥살이였지만 내게는 나름대로 뜻이 있는 단련 기간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 뜻 없는 시련은 없습니다.
감옥에서는 이나 벼룩도 다 친구입니다. 감옥 안의 추위가 얼마나 혹독한지 죄수복의 시침질한 곳으로 줄을 지어 기어 다니는 이를 잡아 한 곳에 늘어놓으면 이들끼리 서로 달라붙어 동그랗게 됩니다.
그걸 말똥구리처럼 데굴데굴 굴리면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이는 본래 파고드는 성질이 있어서 서로서로 머리를 들이대고 뭉쳐서는 궁둥이만 내밀고 있는데 이 광경을 보는 것도 그렇게 재미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이나 벼룩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감옥에 있다 보면 이나 벼룩도 소중한 이야기 상대가 됩니다. 빈대나 벼룩을 보는 순간 문득 깨닫게 되는 묵시가 있는데 그걸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언제 무엇을 통해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니 벼룩이니 빈대니 하는 것들도 귀하게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1. 속사정,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알아 그것을 붙들고 위로해 주어야 찬구가 된다.
▣ 1959.10.11(일) 전본부교회. 사랑하는 자녀를 내세우려는 하나님의 수고.
007-305 친구가 되고 누구보다 가까이 사랑받는 사람이 되려면 그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알아 가지고 그것을 붙들고 위로해 주어야 됩니다. 그래야 그의 친구가 되고 그를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정을 통하고 사랑으로 인연을 맺는다면 그 사람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고, 나도 그 사람 마음대로 움직일 있다는 것입니다.
▣ 1957.3.17(일) 천국의 열쇠를 우리들은 가져야 한다. 전본부교회.
002-139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하면 모든 사람의 속사정을 잘 알아주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라도 용서해 주십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이런 내적 심정 기준에 도달하게 되면, 모든 사람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즉 악인이라도 그 사람의 사정이 여러분의 마음이 비쳐지면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체의 본성을 닮으려면 우리의 몸 마음이 이 땅의 어느 누구와도 화합할 수 있어야 됩니다. 만일 몇 사람이라도 우리와 화합될 수 없다면 우리는 천지의 직책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어떤 분인가? 예수님은 이 땅, 이 악한 세상에 하나의 누룩으로 오신 분입니다. 누룩이란 무엇인가? 여러분이 성경 말씀을 통하여 많은 내용을 알고 있겠지만 누룩이란 어떤 것을 화합시키고 변형시키는 하나의 원료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예수님이 누룩으로 오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타락성을 갖고 있는 인간들을 본성의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사명을 갖고 오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화합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 마음을 움직여 모든 사람에게 100% 맞춰 줄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을 수련해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은 끝날에 여러분을 심판대 위에 세워 놓고 "아무개야, 너는 이런 미비한 조건이 있지 않으냐?" 하며 그렇게 하지 못한 점을 들어 참소할 것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우리는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없고 다른 어떠한 소망도 이룰 수 없습니다.
2. 率直해야 된다.
▣ 1991.1.21(월) 본향인 집회. 국제연수원.
- 6500가정 일본 부인. 일본어.
213-289 어디에 가더라도 누구와도 금방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솔직해야 돼요. "저는 일본에서 왔습니다. 언제 한국에 왔습니다. 그래서 한국말을 잘 못하니까 봐 주세요."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요. 한국 사람처럼 할 필요 없습니다.
3. 인간의 심정을 연구하여 누구와도 친해질 수 있게 하라.
▣ 1971.11.8(월) 전도자의 사명과 하늘의 심정. 중앙수련원.
- 제3차 세계 순회 떠나시기 전.
050-299 여러분이 길을 가다 몸이 불편해서 길가에 누워 있는 거지가 있거든 거기에서 그 거지를 붙안고 자기 어머니를 아버지가 자기 때문에 병석에 누워 있는 것과 같은 심정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 심정을 어떻게 발견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예요.
이것은 질서적인 문제입니다. 아무리 나와 관계없는 세상의 할아버지라 해도 나의 어머니 아버지와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 할아버지가 나를 찾아오시다가 피곤해서 쓰러진 내 아버지가 아니더냐. 이분이 비록 남이지만 만일 내 아버지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제일 가까운 사람으로서 그를 섬길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헤매는 일을 해야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050-300 선생님이 옛날에 일본에 있을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赤坂에는 비가 자주 옵니다. 어느 날 축축하게 젖은 옷을 입고 전차에 올라탔습니다.
선생님 노동판에도 곧잘 갔다구요. 학생복을 벗어던지고 노동복을 입고 얼굴에는 검정칠도 쓱 해 가지고는 전차를 타고 일부러 아가씨 옆으로 자리를 옮겨 갑니다. 그래 가지고 옆에 아가씨에게 쓱 "어디까지 가요?" 하고 물으면 가당찮게 쳐다봅니다. 선생님은 좋은 옷을 입은 아가씨의 마음이 가짜인지 진짜인지를 많이 테스트해 봤었습니다.
전차가 흔들흔들할 때 옆에 다가섰다가 그저 하이힐이고 뭣이고 없이 내가 알게 뭐냐 하면서 꼭 밟는 거예요. 그러면 "아야야"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야단입니다. 그런 걸 곧잘 해 봤다는 거예요.
그건 탕감 복귀하는 거예요. 어떤 때는 참으로 선한 아가씨들이 있습니다. 도리어 그 아가씨가 미안해합니다. 그러면 내가 반대로 미안해하는 거예요. 또 잘생긴 남자가 있으면 그런 남자 골라 가지고 곧잘 그 놀음했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심리를 분석 비판하는 일을 많이 한 거예요.
어떤 때는 줄 것이 있으면 말이에요, 좋은 것을 줄 때는 찾아가서 공손히 주는 것이 아니라 획 던져 주는 거예요. 딱 기분 나빠하게 할 수 있는 입장에서 던져 주는 거라구요. 던져 주는 데도 원수 같은 표정을 하고 주는 거예요.
그게 전부 다 연구한 거라구요. 지금까지 선생님은 그런 생활을 해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어디를 가든지 밀려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노동판에 가더라도 30분만 지나면 거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전부 내 친구 만드는 거라구요. 아무리 우락부락하게 생겼어요 내가 그 사람의 성격을 알거든요.
"이 사람은 이런 성격이 있어서 고약하겠구나" 그러면 배통을 확 찌르면서 "너 이런 욕심이 있구만" 그럽니다. "히히, 그걸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어떻게 알아. 네 여편네하고 나하고 친척 되는지 알아?" 이런 식으로 나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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