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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와 전진 ▣ 1970. 6.14 (일) 전본부교회.

▣ 1970. 6.14 (일) 전본부교회. 정지와 전진

032-012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정지와 전진이 성패를 결정하는 동기가 됩니다. 또한 그것들이 성하게 하느냐 혹은 망하게 하느냐 하는 전체적인 문제를 좌우하는 것을 우리는 생활 주변에서 왕왕 보게 됩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나 흥하기를 바랍니다.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앞으로, 앞으로 발전해 가지고 환경에서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가정도 그러합니다.

 

* 또 우리 인간이 이러하니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류 역사를 움직여 나가시는 데는 그 움직여 나가시는 역사의 실황이면 실황, 상황이면 상황이 정지하는 것을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정지하는 것을 넘어서 전진하거나 발전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032-014 일을 하다가 잠깐 쉰다는 의미에서의 정지는 좋지만 갈 길을 남겨 놓고 가려고 준비도 하지 않고 努力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그대로 停止한다면 그런 사람은 거기에서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잘났다고 하더라도 정지된 자리에서는 모든 만상이나 어떠한 존재 세계와 관계를 맺으려 해도 존재 세계 자체들이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들은 생활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친구를 사귀려 할 때에는 발전할 수 있는 친구냐 그렇지 않으면 소망이 없는 친구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소망이 없는 친구와 관계를 맺으면 맺을수록 자기에게 점점 무가치한 결과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나은 친구와 관계를 맺고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하여 준비하고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그러한 노력을 해 나갈 것이냐?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노력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투입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생명이 투입되지 않고는 사랑이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032-018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더불어 영원한 사랑과 일치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기쁨과 나의 기쁨이 만나 둘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의 기쁨으로 느낄 수 있는 결착점을 찾아 나가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개체가 얼마만큼 전진적 사랑과 생명력을 지니고 사느냐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후퇴는 어느 누구도 환영하지 않습니다. 후퇴하는 자는 어느 누구도 친구가 되어 주지 않고 합하려고 하지도 않는 것입니. 전진하는 자리에서만이 합하고자 하고 친구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자체는 停止하고 있느냐 혹은 前進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後退하고 있느냐? 그 무엇보다도 이것이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도 뜻을 안 그날부터 지금까지의 생활이 어떤 사람은 1년이 되었고 어떤 사람은 10년이 되었고 혹은 반평생을 뜻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도 있을 텐데 그동안의 생활이 정지된 입장이었는가 아니면 전진하는 입장이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후퇴하는 입장이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여러분은 이 중의 어디에 속하는가 하는 것을 반드시 명시하고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아무리 過去에 전진했다 하더라도 오늘 정지해 있으면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력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因緣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전진하면서 무한한 가치와 무한한 생명력과 무한한 사랑의 힘을 지니고 살았다고 해도 현재 정지된 자리에 있다면 하나님과 離別해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 참석한 여러분은 어떠한 자리에 있습니까? 정지해 있습니까, 전진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후퇴하고 있습니까?  과거에는 후퇴하거나 정지해 있었지만 오늘 이 시점에서는 전진하고 있다, 아니면 과거에는 전진하였지만 오늘 이 시간은 정지하고 있거나 후퇴하고 있다고 운명의 저울이 여러분들을 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정지는 후퇴와 가까운 것이요, 전진이라는 것은 목적 지점에 가까운 것입니다. 정지한 자리는 후퇴에 가깝기 때문에 사망선에 가까운 것이요, 정지된 입장을 극복하고 전진하게 될 때는 생명선에 가까운 것입니다. 이 두 경계선에서 생명을 이끌고 자기의 생애 노정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사인 것입니다.

 

032-020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하냐?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시대에 있어서 정지해 있느냐, 전진하고 있느냐, 아니면 후퇴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생명은 무한한 생명이라 할진대 그러한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그 생명과 그 사랑은 정지하려야 정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생명이 정지할 수 없는, 무한히 뻗어 나갈 수 있는, 전진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할진대 하나님의 섭리 노정에는 발전만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 사랑과 생명력이 정지된다면 하나님의 구원 섭리도 한계선 이하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지금까지 발전해 나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에 정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력이 정지되어 있다는 말은 부정되어야 될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역사를 이끌고 나오신 하나님의 섭리도상에는 하나님의 생명력이 정지된 때가 없었던 것이요, 하나님이 생명력이 정지되지 않았으니 하나님의 사랑의 정지된 때가 없었던 것입니다. 

 

* 수천 년 동안 쉬지 아니하시고 생명력과 사랑으로 오늘 우리 자체를 찾아 세워 가지고 목적 세계의 한계점까지 끌고 나가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이 그 손길을 妄却해 버리고 그것을 否定하고 停止한다면 나는 하나님 앞에 용납받을 수 없는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불효라면 그 이상의 불효가 없는 것이요, 불충이라면 그 이상의 불충이 없는 것이요, 악이라면 그 이상의 악이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생명력과 사랑은 정지하지 않는데 어찌하여 나 자신은 정지하기 일쑤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말할 수 없는 회개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爆發的이고도 刺戟的인 힘을 가지고 뜻의 세계를 향하여 끊임없이 가고자 하는 여력이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과 같이 하신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반면에 그런 힘이 없다면 하나님이 여러분과 분리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인가 혹은 지옥에 가야 할 사람인가 혹은 중간 영계에 머물러야 할 사람인가 하는 것을 批判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정지와 전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생명력과 더불어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여 자기 일신을 망각하고 민족과 인류를 사랑한다면 천국을 향하여 갈 수 있는 하늘 백성임에 틀림없고 세계를 향하여 갈 수 있는 하늘 백성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이니 뜻이니 하는 것을 다 망각해 버리고 나를 중심으로 하는, 나를 한계점으로 삼는 사람은 정지상태에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천국은 떠나갈 것입니다. 자기를 위주로 한 한계권내의 천국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자기권 내에 들어오는 천국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권내에, 하나님의 생명권 내에 들어가 살 수 있는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그 천국은 어디까지나 세계를 넘은 천국인 것입니다.

 

자기를 위주한 천국을 모색하는 사람은 자기를 중심 삼은 권내를 주장합니다. 그런 주장대로라면 그 권내에 하나님이 들어와 살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천국은 있을 수 없습니다.

 

032-022 오늘날 우리의 생활권 내에서 어떤 책임자가 "뜻을 위하여 가자"고 명령을 하거나 지시를 할 때 "갑시다!" 할 수 있는 힘이 여러분 자체 내에 없다고 하면 그것은 여러분이 이미 정지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됩니다. 

 

"목적을 향하여 총 진군하자"는 명령이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그 명령 앞에 무감동하고 자기의 생명의 감동이 거기에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정지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지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아무리 勸告하고 아무리 刺戟을 주어도 그것은 나와 相關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하려야 再起할 수 없는 입장에 떨어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는 막대한 消耗戰을 펴야 될 것입니다. 열 만한 힘을 주었는데도 無感動한 사람에게는 100 以上의 힘을 加重시키지 않고서는 움직여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 스스로 움직여 나가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하나님을 중심 삼아 가지고 손해를 입히지 않고는 다시 일어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손해를 입혔기 때문에 그 손해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는 무한히 슬픔을 느껴야 하는 자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있으면서도 슬퍼하는 마음마저 잊어버린 사람은 영원히 소망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 만약에 개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세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연결시켜야 합니다. 나아가 그 마음을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생명에 접촉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타락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권과 사랑권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가 필요합니다. 선조로부터 지금까지 100이라는 양의 죄를 지었으면 그 이상의 노력을 하고, 회개를 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서 회개를 빼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천 대 만 대의 선조들을 통해서 태어났습니다. 

 

그 선조들이 선한 선조들이면 나는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생명권 내에 접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선조들이라면 하나님의 생명권과 먼 거리에 있는 것입니다.

 

먼 거리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권과 인연을 맺으려면 선조들이 악하였던 모든 양을 넘어설 수 있는 회개의 기간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채우지 않고는 자기 이상의 생명력의 세계에 접촉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에는 반드시 회개의 눈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032-024 하나님은 인간이 동반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누구보다 귀한 메시아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류와 접할 수 있는 하나의 대표적인 존재, 친구와 같고 스승과 같고 더 나아가서는 아버지와 같은 입장으로 가장 귀한 하나의 대표적인 존재를 보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표적인 존재가 누구냐 하면 메시아입니다.

 

그 메시아는 우리 인간에게 둘도 없는 친구요 둘도 없는 스승이요 둘도 없는 아버지인 것을 아랑야 합니다. 단 한분밖에 없는 최대의 존재로서 이 땅 위에 보내진 사명자가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메시아를 붙들고 눈물짓고 그 메시아를 위하여 생명을 투입하고 그분을 자기의 생명처럼 사랑하면 세계사적이고 천주사적인 하나님의 생명권과 사랑권내에 돌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사랑의 선물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 여러분 자신들은 메시아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투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자기의 생명뿐만 아니라 자기의 사랑까지 전부 투입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극히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032-026 그러면 오늘 우리 타락한 인간이 가야 할 길은 어떤 길이냐? 회개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의 길을 찾아 나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가 나라를 사랑한다는 말은 있을 수 없고 회개하지 않는 자가 세계를 사랑한다는 말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회개할 수 있는 인연은 어디서부터 찾느냐? 그것은 사람을 통해서 찾습니다. 사람을 통해서 찾으려니 메시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분은 친구 중의 친구요, 스승 중이 스승이요, 어버이 중의 어버이로서 나타나시는 분입니다.

 

그분을 몽땅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사랑할 세계와 그분이 사랑해야 할 하늘땅을 사랑할 수 있는 권내에 突入하는 것이 됩니다. 그분과 인연을 맺지 않고는 사랑하려야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우리 타락한 후손들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 그 메시아를 만나는 것은 타락한 인간에게 최대의 행복이요, 그분을 만나는 자리는 최고의 영광의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를 그곳을 향하여 찾아 나왔습니다. 세계를 찾기 전에 그분을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가정이 그분을 모시고 생활하면 그 가정은 천국권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런 분이 있다면 그분을 얼마나 똑똑히 아느냐? 또 그분이 명령을 하면 그 명령을 내가 얼마만큼 받아들이고 따를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분이 100 만한 가치의 명령을 하면 그것은 백이라는 가치의 자리에서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 만한 가치를 지니고 명령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 명령에는 사랑의 마음과 生命力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못하고 그 명령과 더불어 전진하지 못하면 말할 수 없는 不幸의 要件이 앞길을 막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떤 命令이 내려졌는데 그것을 實踐하지 못한 것이 그와 관계를 맺고 그와 가야 할 모든 길을 막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100만한 가치의 명령을 했더라도 천 만한 가치를 지니고 명령을 했기 때문에 그것을 불신하고, 불순종한다면 크나큰 손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 손해를 메우기 위해서는 그 명령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무한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니 않으면, 그 이상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정당한 이치입니다.

 

뜻길에 들어선 여러분이 지금 어떻게 해서 기진맥진하게 되었으며 정지 이하의 후퇴의 일로에 서게 되었느냐?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선생님이 백 만한 가치의 지시를 할 때는 백 만한 가치를 가지고 지시한 것이 아니라 더 고차적인 천 만한 가치를 지니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배반하게 되면 그 이상의 은사가 막혀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한한 하나님의 생명력은 떠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 선 자신인 것을 깨달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잃어버린 이상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자리를 어떻게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백 만한 자리에서 나에게 명령했는데 내가 실천하지 못하였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하나님께서 백 이상의 자리에서 명령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과거를 회개하고 백 이상의 자릴 ㄹ소망으로 삼아 거기에 자기의 생명과 자기에게 있는 온갖 사랑을 퍼부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세계로 재차 전진할 수 있는 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뜻의 길에 들어섰던 과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맨 처음 뜻을 알았을 때에는 죽을지 살지 모르고 따라 나왔습니다. 그때는 명령이 내리기 전에 갔고 생명을 버려야 할 곳에 향하여 "가라" 하면 생명을 투입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때에는 자기의 생명 이상으로 뜻을 사랑하고 흠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같이하신 것입니다. 생명 이상 뜻을 중요시하지 못하는 입장에 서면 하나님은 떠나십니다.

 

왜? 하나님이 뜻에 영원한 생명을 투입하고 영원한 사랑을 투입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한계선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뜻에 한계선을 넘은 사랑과 생명을 투입하신 것입니다.  

 

* 여러분들 중에 은혜를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먼 거리에 있는 감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옛날에 충성하던 그 시대를 다시 한번 회상하고 정성을 기울이던 그 자리를 다시 한번 회상하고 그 싸움터를 다시 찾아가 그 이상의 정성과 그 이상의 생명력을 투입하고 사랑을 투입해야 합니다. 그런 자리를 찾아가기 전에는 전진적인 생명력과 발전적인 은사권을 차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032-029 뜻길을 따라 나온 여러분은 자기의 생명력과 사랑의 힘을 민족을 넘고 세계를 넘어 그 이상의 자리까지 투입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투입하는 생명력과 사랑의 힘이 교회 발전의 행로를 개척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여기에 협조적인 입장입니까? 아니면 반대적인 입장입니까? 반대적인 입장에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천년만년의 사연을 품고 눈물로 회개해야 합니다. 땅 위의 슬픈 사연을 품고 부딪쳐 가는 통일교회의 운명을 안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서 온갖 정성을 들이고 감사와 치하를 드려도 부족할 텐데도 불구하고 자기를 중심 삼아 비판하고 자기와 관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무관하게 대해 버린다면 거기에서 마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통일교회가 발전하는 사실을 바라보고 무한히 고마움을 느낌과 동시에 자신의 부족함을 느껴 가지고 "오늘은 이렇지만 나에게도 힘을 주소서." 해야 합니다.

 

* 내일의 봄날을 맞이하여 활짝 피어날 수 있는 생명력과 사랑의 힘을 찾지 못하면 여러분이 가는 길은 끝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그런 입장에 있거든 세상에 가장 귀한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불쌍한 자신인 것을 다시 한번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신인 것을 깨닫게 될 때 자식이 죽어 슬퍼하는 것 이상, 혹은 남편이나 아내가 죽어 슬퍼하는 것 이상, 자기 가정이 파탄되어 슬퍼하는 것 이상, 또 국가가 세계가 파탄되어 슬퍼하는 것 이상 슬픔을 느끼고 최대의 것을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안고 "하늘이여, 이 불쌍한 사람을 동정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자리, 그 동정을 구하는 모습이 누구보다 처량하고 비참한 자리에 가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자기가 대하던 기준에서 떠났던 하나님이 다시 찾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032-030 그러면 여러분은 얼마나 슬픔을 느끼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동정을 구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습니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지극을 느끼고 있고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자기 자체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며 하늘과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서 있어야만 생명의 인연권내에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 상태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중간 상태는 폭파시켜야 합니다.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닌 자리는 정지상태에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있으면 스스로 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시록 3장에 "미지근하지 말고 차든지 덥든지 하라."라고 한 것입니다. 뜨거워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연을 맺든지 아주 차가워 가지고 말할 수 없이 냉정한 자리에서 자탄하며 눈물을 흘리고 피를 쏟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극과 극의 자리를 거치지 않고는 하나님의 동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중간 상태는 하늘이 원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정지상태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회개의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기도의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를 중심 삼고 출발하였으며 누구를 중심 삼고 결과되어야 하느냐?"  

 

인간인 나를 중심 삼고 출발하여 나를 중심 삼고 결과를 맺으면 이것은 地獄입니다. 왜? 타락이 나를 중심 삼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나를 중심 삼고 타락했고 죄악의 역사를 엮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개혁하고 혁명하려는 것이 복귀섭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는 이처럼 나를 중심 삼은 것을 打破해 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出發하여 하나님으로 終局이 되어야 합니다.

 

032-031 오늘날 통일교회 신도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중심 삼고 출발해서 나를 중심 삼고 결과를 맺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나로부터 출발하여 나에게서 결과를 맺는 것보다 더 나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서 나에게 끝나는 것이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에게서 끝장을 보는 것보다 더 나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롯 유다에게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다."고 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차라리 몰랐으면 더 좋았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出發은 하나님으로부터 하였다가 自己를 중심 삼고 끝을 보면 자기 一身뿐만 아니라 자기의 一族까지 망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시는 것은 나 개인만을 위해 찾아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민족과 그 나라를 위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와 그 민족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자기를 중심 삼고 찾아오신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은 그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요 그 민족을 팔아먹는 것입니다.

 

타락이 무엇이냐?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끝을 맺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늘을 중심 삼고 끝을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땅 위에 태어난 우리를 보면 출발이 하나님으로부터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땅에서부터, 나에게서부터 출발되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많이 지닌 사람은 그만큼 많은 회개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은 나이가 많이 들어서 하겠다, 죽을 때가 다 되어 가지고 믿고 天堂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래 가지고는 천당 갈 수 없어요.

 

언제 하나님을 중심 삼고 출발을 하겠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죽을 때가 다 되어서 출발했다면 그 전 생애의 대부분은 하나님을 背反한 자리에 있었다는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比例하여 그 以上의 悔改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이 들어서 믿고 천당 가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032-031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이냐? 하나님을 중심 삼고 再出發해야 합니다.  나에게서 출발한 여기에 하나님이 연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길에 들어선 사람들은 자기를 중심 삼고 화내는 것이 제일 무섭습니다. 그러니 화내지 마십시오. 화내지 말아요.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 데 있어서 자기의 욕심을 중심 삼고 화를 냈다가는 몽땅 걸려 버립니다. 여러분은 생애 노정에서 이러한 문제 등으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정지하고 있는가, 전진하고 있는가 아니면 후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고 여러분들이 다시 한번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옛날에 뜻을 중심 삼고 안타까워하며 전진했던 그 이상의 마음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이냐? 그것은 별거 아닙니다. 반대의 자리에 찾아가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생활했던 그 反對의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 삼고 10년 동안 나왔으면 자기를 부정하는 놀음, 자기를 제물로 삼는 놀음을 십 년 이상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자리를 넘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032-034 오늘날 때가 가까운 이 시점에서 여러분들이 새로이 출발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이사의 사명을 하는 사람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의 고충을 나의 고충 이상으로 느끼는 자리, 그의 슬픔을 나의 슬픔 이상으로 느끼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참된 생명과 참된 사랑을 그와 더불어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은 자신을 냉정히 비판해야 합니다. 전진이야 정지냐 후퇴야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뜻길을 가는 우리 통일교회가 전진이냐 정지냐 후퇴냐 하는 것을 언제나 생각해야 합니다. 선생님도 언제나 통일교회가 전진이냐 정지냐 후퇴냐 하는 것을 생각하고 그리고 전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