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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아는 자가 되자 ▣ 1971.1.31(일) 중앙수련원.

▣ 1971.1.31(일) 중앙수련원.  때를 아는 자가 되자.

140-142 우리들이 때라는 것을 두고 볼 때 그때에는 하늘의 운세와 때, 개인의 운세의 때, 나라의 운세의 때 등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라는 것은 개인이면 개인, 가정이면 가정, 민족이면 민족, 국가면 국가, 세계면 세계에 豫告를 하고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는 언제나 찾아오지만 연이어 나가기 때문에 즉 어제의 계승이 오늘이고 오늘의 계승이 내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때의 확실한 분기점을 인식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때가 아침이 될는지 낮이 될는지 저녁이 될는지 혹은 밤이 될는지 알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한 시점을 지나가는 그때에 자기 스스로 상대적 기준과 생활적인 기반을 맞춘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 예언자의 대부분은 어느 한 때에 대해서 豫言을 합니다. 그리고 예언한 그때는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오는 것의 중심은 몇 달 며칠 동안이 아니라 하루의 어느 한순간 바로 한때의 焦點을 중심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분수령과 같은 한 시점을 넘어가는데 거기에 정확히 보조를 맞춘다는 것은 심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예언자들이 예언한 것은 대부분 이루어졌지만 거기에 대해서 직접적인 시대에 그때를 알고 거기에 대비하여 상대적인 입장에서 맞이하여 이루어진 사실은 실로 적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때를 지나쳐 버리고 나서야 "아, 그때 봄이 왔었구나. 우리나라에 좋은 운세가 왔었구나. 어느 누가 예언했던 그때가 지나갔구나." 하면서 지나간 때를 회상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언했던 그때를 지나쳐 버리고서 그때를 다시 회상하는 것이 늘 우리 인간이 생활해 온 방식이요 지금까지 엮어 온 인류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 자신들의 일생에 있어서 반드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時點이 어느 한 때를 중심 삼고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날을 중심 삼고 그때가 반드시 찾아와서 고개를 넘어갈 것입니다.

 

040-144 그런데 문제는 그때를 우리가 즉각 발견해서 맞출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시점을 중심 삼고 하나님과 정확히 보조를 맞추어 가지고 그날을 준비해 오신 하나님 앞에 결정적인 자리에 설 수 있는 상대적인 그 시점을 우리가 차지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선물을 준다 할 때 받아야 할 그 사람이 시간에 맞추어 정성을 다해 양손을 내밀어 주시는 그것을 받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번번이 인간에 대해서 섭리의 뜻을 추진시키지만 인간이 그때를 정확히 알아서 섭리에 박자를 맞출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이것은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인간을 일생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하늘의 은사의 때가 오지만 그때를 알지 못하여 놓쳐 버리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때를 바라보고 그때가 언제 올 것인가 하고 기다리면서 하루를 다짐하고 한 달을 다짐하는 가운데 그러한 때가 언제 지나갈 것인가를 마음을 통하여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만일 그때가 지났음을 며칠 후에라도 알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자기 스스로 책임을 다짐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그때를 놓친 것에 대하여 섭섭한 마음으로 지나치셔야 하겠지만 그 모습을 보시고 그 섭섭한 마음을 돌이켜 다시 그때를 연장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연장시켜 주실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비록 그때를 알지 못하고 보냈지만 지나쳐 버린 후에라도 그것을 알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긍휼을 바랄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하나님은 제1차의 때는 지나갔을지라도 제2차의 때를 다시 준비하여 그 길을 개척해 주시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런 하나님이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일생을 중심 삼고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필요 적절한 하늘의 선물을 주시기 위해, 나를 도와주기 위해 얼마나 수고를 하셨는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여러분은 하나님이 나에게 상관하지 않고 나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시지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誤解입니다. 하나님은 몇 번이고 몇수십 번이고 우리를 위해 찾아오셔서 손을 내밀어 무엇이든지 주시려고 하지만 그것을 받아야 할 우리들이 그 박자에 맞추어 가지고 받아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자신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입장이 된다는 것은 심히도 어려운 문제인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조심하고 그때가 언제 올 것이냐, 그때가 밤이냐 낮이냐 혹은 내가 길을 가고 있을 때냐 일을 할 때냐 하는 문제를 수시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040-145 그런데 그때가 왔을 때는 자신 스스로가 기쁜 마음으로 그때를 맞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쾌한 마음을 가지고 맞이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선한 자리에서 그러한 때를 맞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야 될 텐데도 불구하고 악한 자리에서 맞이하여 하나님을 슬프게 하면서 그때를 놓쳐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개인의 여러 사정을 볼 때에 하늘이 마련해 주신 그때를 배반하고 무시하면서 놓쳐 버린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됩니다.  

 

여러분 자신을 중심 삼고 보더라도 그때가 몇십 번 몇백 번 있었지만 그때를 놓쳐 버린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런 자체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다시는 새로운 때를 허락하시지 않고 다시는 준비해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매일매일의 생활이 얼마나 愼重히 해야 하는 생활이요, 하루하루의 시간 시간이 우리의 운명의 힘줄을 당기는 얼마나 중요한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때가 매일매일의 시간을 통해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고로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나오는 사람들은 하루 한 시간도 마음을 놓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놓아 放心하고 자기 마음대로 생활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마음을 졸이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간이든지 어느 때든지 또 어떠한 환경에서 어떠한 상대를 통하여서든지 그때에 대한 것을 가르쳐 주고 인연을 맺어 주기 위해서 움직이신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정성 들여 가지고 스스로가 마음을 통하여 그때를 안다든가 혹은 어떤 사람 어떤 시간권내의 환경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그때와 인연을 맺겠다고 자기 스스로 바라고 스스로 찾는 마음을 갖고 나가는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일생 동안 그때를 적중시킨다는 것은 지극히 힘들다는 것을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서 느끼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시간은 틀림없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중요한 시간은 지나간다는 거예요.  

 

우리에게는 수천 대, 수천만 대의 선조가 있고 그 선조들이 바라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 선조들은 바라던 소원이 그 일대에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반드시 후손 대에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정성 들이며 그때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조들이 정성 들인다고 해서 찾아오는 그때를 그 후손이 맞아 가지고 주인이 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수많은 선조들이 자기 후손들이 잘되기를 바라고 또 그들이 이 땅 위에서 선한 일을 하고 갔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후손을 통하여서 그때를 주려고 하지만 그 후손이 그때를 맞이하여 하늘의 영광의 실체로서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심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040-149 6천 년 역사를 보게 되면 하나님은 개인을 복귀하기 위해 몇백 년 몇천 년을 중심 삼고 나왔습니다. 그 기간 동안 종교를 세워 가지고 싸워 나온 것은 메시아 한 분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그런 남자 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 수천 년 동안 준비해 나온 것이 종교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사명을 해야 할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에 그 중심인물이 와야 한다는 사상이 재림사상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재림주님이란 어떤 분이냐? 하늘땅이 소원하던 전체 운세를 맞아 가지고 그 운세를 어느 한 때에 인간과 더불어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땅 이에 보낸 대표적인 분입니다.

 

그러면 이 땅 위에서 그분을 대표적인 가치의 존재로서 맞이할 수 있고 그때 앞에 있어서 틀림없이 상대적 입장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느냐 할 때 그것은 단정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번번이 하나님의 역사를 놓쳐 버린 것을 후회하며 그것에 대하여 스스로 탕감해 가지고 그때의 인연을 인간과 다시 관계 맺게 하기 위해서 사명을 다하려 하는 것이 그 시대에 있어서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일시에 탕감복귀해야 할 세계적인 사명을 짊어진 교회가 통일교회요 그러한 사람이 이 통일교회를 지도해야 하는 선생님이라 하면 여기에는 개인적인 때를 어떻게 맞추고 또 가정적인 때를 어떻게 맞추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씨족이면 씨족 민족이면 민족 국가면 국가 세계면 세계를 그때에 맞추지 않고서는 이 땅 위에 결정적인 기반을 닦을 수 없습니다. 

 

* 아무것도 갖춘 것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정확히 그때를 중심 삼아 가지고 스스로 준비하고 스스로 정성을 들인다면 그때의 사명을 짊어지고 책임 다하는 그 중심 존재와 더불어 상대적인 입장에 서게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모를지라도 하나님은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을 1차 2차 3차 횟수를 거듭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때의 혜택을 받으므로 하나님이 그 일대의 기반으로서 인정해 주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040-150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복의 줄이라고 할까 하늘의 운세의 줄이라고 할까 줄들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줄을 중심 존재와 내가 서로 잡아당겨 줄이 늦추어지지 않고 팽팽하게 될 수 있는 자리에 선다면 그 자리가 얼마나 복스러운 자리일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교인이라면 통일교회가 가는 길과 더불어 자기의 생명을 걸고 충성을 다하면서 하루하루 시간시간을 그때에 박자와 도수를 맞추기 위해서 정성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은 통일교회의 운세와 더불어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040-152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때에 대해서 더 생각해야 합니다. 아침이면 밥을 먹는 때가 있습니다. 밥을 먹는 시간이라 하더라도 밥을 먹기 시작한 때, 한창 밥을 먹는 때, 밥을 먹는 것이 끝나는 때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때를 매일매일 맞춘다는 것은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늘의 때도 우리의 생활과정을 통해서 지나가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번번이 놓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성을 들이는 데 있어서는 무턱대고 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어느 때일 것인가를 알고 그때에 맞춰 목표를 정해 놓고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세계의 어떤 사람보다도 더 들어야 됩니다. 지구상에 수십억 인류가 살고 있지만 그때 그 순간 그 초점을 중심 삼고 누구보다도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집중해서 정성 들임으로써 그 정성의 도수가 수십억 인류 앞에 으뜸이 되게 될 때 하나님은 그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노정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040-154 여러분이 선생님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고 주일이면 주일의 공식집회에 얼마나 관심을 두고 있느냐 이것입니다. 이런 것을 등한히 하는 여러분의 행동이 스스로가 때를 놓쳐 버릴 수 있는 행동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040-156 여러분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이 한 때를 위해 찾아오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한 때를 맞게 하기 위해 수천 년간 수고해 나오셨습니다. 수많은 역경 속에서 피의 대가 희생의 대가를 치르시면서 탕감노정을 개척해 나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하나님이 걸어오신 한스러운 노정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한스러운 노정을 거치시면서도 삼천만 민족을 대표한 무리들을 천운과 인연 맺게 해서 그것을 온 세계 앞에 연결시키신다는 엄숙한 과제를 붙들고 나오신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여러분은 그 시간이 단축되기를 바라면서 "하늘이여 제가 여기 있으니 저와 더불어 같이 가시옵소서. 저도 그때를 맞게 해 주시옵소서." 하며 아우성쳐야 하고 또 그만큼 수고하시는 하나님에게 보조를 맞추어야 할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꿈도 꾸지 않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으니 여러분은 얼마나 생활을 낭비하고 허비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원통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선조들만큼 수고하지 않아도 그들이 쌓은 공적의 터전으로 말미암아 그들 이상의 혜택을 받을 수 있으므로 영계에서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는 선조들이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여러분을 바라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일대에 맡겨진 사명을 완수해야 함은 물론 과거의 선조들을 해방해야 하고 더불어 세계적인 운세를 연결시켜 이 시대의 인류를 해방시켜야 할 엄숙한 책임을 다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공고한 터전을 갖추어서 선한 후손들 앞에 상속시켜야 할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비록 지금 서 있는 자리는 한 곳이요 서 있는 사람은 한 개인이지만 여러분 개체는 새 시대를 연결시킬 수 있는 종합적인 중심의 가치를 결정지을 수 있는 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생활은 공적인 생활 중에서도 공적인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정성을 들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개인적인 때를 놓쳐 버렸으면 가정적인 때를 맞추기 위해서 가야 합니다. 복귀 노정을 개인적인 때 가정적인 때 종족적인 때 민족적인 때 국가적인 때 세계적인 때로 확대되어 나갑니다.

 

* 그러면 그때가 언제일 것이냐? 지금까지 정성을 들이지 못하여 그때를 놓친 것에 대해 서러움을 느끼고 한스러움을 자탄하면서 이제라도 한 때를 갖추어 가지고 과거에 하나님을 서글프게 했던 모든 내용을 앞으로 오는 그 한 때에 있어서는 몇십 배의 기쁜 마음과 환희의 심정을 가지고 그때를 이어받음으로 말미암아 탕감해 드려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시간시간을 투철하게 생활하지 않고서는 그날이 의의 있게 찾아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대한 일입니다. 

 

040-157 언제나 그 "때"를 맞추기 위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밤에 잠을 자더라도 심령적인 안테나를 그곳을 향해서 맞추어 하늘의 박자에 맞출 수 있는 공적인 입장이 되어 가지고 자기의 고집이나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은은하고 평화스러운 가운데 마음의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느낀 감정을 통해서 가려고 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내 온 하루면 하루의 생활을 총 평가하고 한 달이면 한 달을 총 평가하여 지난날의 때가 오르막길이냐 내리막길이냐 하는 것을 수시로 감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040-159 내 일생의 신앙길에 있어서 나의 때가 어느 때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때가 있는 줄 알았다면 온갖 정성을 다함으로써 선생님을 통해서 특별한 지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지시를 받는 데 있어서는 얼마나 심각하냐, 그 가야 할 길을 대해 얼마나 심각하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일에 대한 책임을 명령받은 사람으로서 얼마만큼 심각하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입장에서 책임 맡은 그 일은 그때의 시점과 더불어 반드시 결정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040-161 하늘의 뜻을 받들고 나가는 사람은 죄인 아닌 죄인입니다. 언제나 남이 모르는 근심을 품고 사는 사람이요, 남이 모르는 외로움을 품고 사는 사람이요, 가고 오는 길 가운데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그때를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의 길은 찾아가는 길입니다. 언제나 찾아가는 것입니다. 

 

* 우리들이 수택리에 수련소를 지은 것은 벌써 때가 올 것을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다" 할 때는 밤잠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때야말로 정성을 다 퍼부어야 할 때인 것입니다. 수십 년 아니 일생을 통해 바라던 그때, 국가와 연결될 수 있는 그때는 틀림없이 오는 것입니다. 오는 데는 크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태풍이 불 때 일시에 폭풍우가 몰아쳐 오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바람이 불기 시작함으로써 태풍의 징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그때의 길잡이 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심각해야 됩니다. 그리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그때를 놓쳐 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하늘땅을 대표해서 그가 세워 놓은 단 하나의 때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때가 오지 않더라도 그때를 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그런 때가 되면 먹고 자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초긴장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일반 식구들은 모릅니다. 그때가 되면 밤이나 낮이나 있는 정성을 다 퍼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를 놓쳐 버리면 다시 오지 않습니다. 때는 한번 지나가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040-164 그때가 오게 되면 먹고 자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심형을 기울이고 생명을 투입해야 합니다. 투입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100을 바란다면 그 이하로 투입해서는 안 됩니다. 110. 120 이상을 투입해야 합니다. 그때에 무한히 정성을 들여 투입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정성을 들이지 않고 무엇을 바라는 사람은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정성을 들이지 않는 사람에게 하늘이 복을 주면 그 복이 그 사람을 치고 가는 것입니다. 그 복은 때와 더불어 보조를 맞추려고 하는데 정성의 기반 없이 그가 복을 붙들고 있으면 그 복이 그를 치고 간다는 것입니다. 

 

복이 치고 갈 때는 그 사람이 지금까지 닦아 놓은 기반까지 다 빼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도의 세계에 이런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개개인에게는 하나님이 바라는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볼 때 저 사람은 어떠한 타입의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렇게 해 주기를 바란다 하는 기준이 있는 것입니다.

 

* 여러분은 이런 내용을 알고 때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때에 보조를 맞출 수 있기만 하면 영계에 가서도 지옥에 가려야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의 종합적인 운세에 맞춰 움직였기 때문에 거기에 해당하는 자리로 아니 갈래야 아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자연히 그 자리로 끌려 올라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계는 "가라, 가지 마라" 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 무엇에 의하여 벌어지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얼마만큼 功臣이 되어 있느냐, 때에 맞춰 얼마만큼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상대적인 여건을 자신의 생애노정에 남겼느냐에 따라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 양에 따라 영계에서 처할 수 있는 자신의 위치를 결정짓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040-165 우리가 자는 시간에 그때가 지나갈지 모릅니다. 노는 시간에 지나갈지 모릅니다. 혹은 여행시간에 지나갈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는 반드시 反省이 필요합니다. 하루를 지내고 나서 "아버지, 오늘은 이렇게 지냈습니다" 하고 하늘 앞에 보고 드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마음도 살과 같이 그런 촉감을 느낄 수 있고 영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생활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혼자 가만히 있는데 말할 수 없는 슬픔이 스며들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심각하고 긴장된 무엇이 스며들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기쁨을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됩니다. 

 

슬픔이 올 때는 자기 스스로 무릎을 꿇고 통회해야 합니다. 그럴 때는 반드시 자기가 해야 할 책임을 중심 삼고 하나님이 나의 때에 대해 섭섭함을 느꼈다든가 그렇지 않으면 하늘의 때에 있어서 크나큰 손실을 보았다든가 하는 때이니,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해결을 짓고 넘어가야 합니다.

 

또 어떤 때는 자기도 모르게 기쁨이 찾아올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기쁨이 찾아오는 것은 내가 기쁠 수 있는 사명을 해서 그런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기쁜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이냐, 그것이 나에게 직접적인 관계로 찾아왔느냐, 간접적인 관계로 찾아왔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조정해 나가야 합니다. 

 

* 신앙길은 매정한 길이요, 냉정한 길입니다. 에누리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사정을 봐주고 도와주는 경우가 있지만 복귀의 길에는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때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를 한번 놓치면 그때는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누구누구에게는 선생님으로서 바라보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어떠한 타입이기 때문에 어떠한 사명을 맡겨야 되겠다고 하는 생각으로 책임자의 입장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 스스로 그때가 어느 때가 될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때를 어떻게 맞추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박차를 맞추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되기를 바라시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짓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출발은 그럴듯하게 했으면서도 하나님이 박자를 맞추려고 하는 때에 다른 놀음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오히려 출발하지 않은 것보다 못합니다. 완전히 이율배반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늘 뜻 앞에 있어서 이미 실패자인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에서는 언제나 조심해야 합니다. 말 한마디라도 조심해서 해야 합니다.

 

자기가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을 종합하여 그때와 어떻게 주파수를 맞춰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절대로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뜻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뜻이 그냥 이루어질 것 같아요? 가만히 두면 뜻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 같으냐 말이에요? 뜻은 어떤 공기가 있어 가지고 관계를 맺고 끌어 주기 때문에 발전하는 것입니다. 뜻은 그냥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냥 된다면 하나님께서 6천 년 동안 수고하시지 않았을 게 아니에요?

 

040-167 이 땅 위에서 그 누군가 이 뜻을 중심 삼고 맺어 주고 끌어 주고 밀어줄 수 있는 발전적인 요인이 되고 그 터전을 마련해 주는 그런 무엇이 있었기 때문에 이 땅의 섭리의 시대권 내로 진척 발전돼 나가는 것입니다.

 

* 환경이 점점 나아진다고 해서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더 긴장해야 합니다. 이제는 옛날 같은 핍박도 없으니 마음대로 해도 되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핍박을 받을 때는 도리어 안전한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시는 때이지만 안전할 때는 내가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을 때는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지만 핍박이 없을 때는 내가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준 때와 내가 하나님을 붙드는 때와는 다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붙들었다 해도 불안한 것입니다. 안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늘이 나를 붙들어 준 때는 안심할 수 있기 때문에 도리어 핍박받고 외롭고 서글픈 때가 신앙길에 있어서는 복된 때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자의 태도가 자기의 인일을 생각하여 자기의 출세를 바라면서 하나님의 터전을 이용하여 자기가 무엇이 되겠다고 바라면 그 모든 것은 허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는 절대 하나님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하나님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자기를 중심한 계획권내에서는 하나님은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이용당하지 않는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