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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을 따라서 ▣ 1971.1.24(일) 전본부교회.

▣ 1971.1.24(일) 전본부교회. 소명을 따라서.  

040-065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은 많되 하나님의 뜻 앞에 일치되어 그 뜻과 더불어 사는 사람은 적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복귀 섭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 삼고 자녀의 인연을 맺어서 그러한 개인으로 하여금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복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엄청난 과중過重(힘에 겹다. 벅차다)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심정적인 인연을 생애 노정에 남기고 가야 합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가는 사람이 이 땅 위에 얼마나 되겠느냐 할 때 그런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040-066 사람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어떠한 선택을 받게 되면 그 선택받은 자리에서 참된 승리자가 되려고 하고 더 빛날 수 있는 가치를 추구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욕망입니다. 그렇지만 이 욕망이 우리에게 소망을 자극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실천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노력만 하면 누구나 다 성공할 줄로 알고 있지만 성공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있어서 소명을 받는다는 사실도 어려운 것이지만 소명을 받아 가지고 감당한다는 것은 더욱더 어렵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생활환경이 달라지고 시대의 차이가 벌어짐에 따라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길 앞에 있어서 相對가 되는 立場을 결정짓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 노력하며 나가야 할 책임분담 5%의 노정이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을 중심 삼고도 그렇고 교회를 중심 삼고도 그렇고 나라나 세계를 중심 삼고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040-068 선생님 자신도 어떤 일에 대해 보고를 받을 때 그 보고의 내용은 문제 삼지 않습니다. 보고를 받으면서 그 사건 자체에 대해 하나님께서 보시는 感情이 어떻겠느냐 하는 것을 문제시합니다.

 

그 감정이 나와 어떠한 관계를 맺겠느냐? 좋을 것이냐 나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언제나 비교 검도해 가지고 느껴지는 감각이 활용할 수 있는 것일 때에는 전적으로 행동을 개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느껴질 때에는 그 행동을 주저하고 반대적인 입장에서 다시 그것을 비교 검토하는 겁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직접적으로 행동할 문제가 아니라면 기다리는 입장에서 그것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기도하면서 조정해 나가게 되면 반드시 자기가 바라던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그때가 어떤 때라는 것을 전한 사람 즉 보고한 사람은 모르지만 선생님은 어느 정도까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길에서는 소명을 받기도 어렵지만 그 소명을 받아 가지고 따라간다는 것도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신앙길을 가는 데 있어서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되느냐 하면 언제나 圓滿하게 마음의 문을 열어 놓아야 됩니다. 공기를 팽팽히 집어넣은 고무공과 마찬가지로 마음을 둥글게 가지고 누구에게나 치우치지 않고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040-069 마음이 언제나 우그러지지 않고 주체적인 입장에 있음과 동시에 원만한 자리에 서 있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기 스스로 닦아 나가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 격한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그 격함으로 말미암아 다음이 치우침을 받게 됩니다. 슬픈 자리에 들어가면 충격을 받게 되어 자기의 본성과 맞지 않게 마음이 이지러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의 心性을 中央에 位置하게 하면서 자기 心性이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調整할 수 있는 生活態度가 必要하다는 것입니다.

 

* 내려오는 자리에 서게 되면 반드시 더 내려가든지 반대로 밀고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려오는 데는 어느 정도까지 내려와야 되느냐? 밑창까지 내려와야 됩니다. 밑창까지 내려오게 되면 반작용에 의해서 다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압에 자꾸 내려가는 입장에서 어느 기준까지 내려가게 되면 도리어 반작용에 의해서 올라가는 입장에 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내려가는 자리를 지키든가 그렇지 않으면 현재의 입장에서 밀고 올라가는 작용을 하든가 해서 언제나 마음의 기준을 조정할 수 있는 신앙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040-072 신앙생활의 기초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떠한 책임자를 중심 삼아 가지고 그 책임자를 따라가는 입장에 서서 자기의 심정 기준을 그와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지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지도하는 사람이 나에게 명령할 때 좋은 명령도 하고 싫은 명령도 합니다. 그러면 좋은 명령을 받았을 때 자기의 마음의 느낌과 싫은 명령을 받았을 때 자기의 마음의 느낌을 언제든지 감지해 봐야 됩니다.   

 

책임자가 오른쪽으로 가라고 했을 때 그쪽으로 가 본 자기의 마음이 어떠했는가 또 그 명령을 한 사람이 무슨 목적으로 했는가 하는 것을 비교 검토해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뜻 앞에 좋은 목적으로 오른쪽으로 가라는 명령을 했다면 그 뜻을 따라 내가 오른쪽으로 따라갈 때의 마음의 느낌이 어떠하냐, 또 책임자가 뜻 앞에 나쁜 목적으로 왼쪽으로 가라고 명령을 했을 때 그 명령한 사람의 목적이 무엇이냐. 과연 나를 위하고 나의 신앙길에 보탬을 주기 위해서 명령을 했느냐 하는 것들을 중심 삼아 가지고 그것을 실지로 행하여 느껴 보면서 비교 검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내가 그의 명령을 실행하면서 그를 숭배하고 따라가는 마음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를 위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뜻이 지향하는 길이 이렇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심이 없이 공적인 마음으로만 쭉 움직여 봐야 됩니다.

 

움직이기 전에는 판단하지 말라는 겁니다. 움직여 보고 난 다음에 이것이 자기에게 출발할 때와 출발하고 난 후에 어떠한 차이를 가져왔느냐 하는 것을 비교 검토해야 됩니다. 출발하고 난 후가 출발할 때보다도 좋았다 하게 될 때는 가라는 명령을 따라간 그 일의 내용과 내 소성이 맞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상대적인 관계를 중심 삼아 가지고 도전하여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맨 처음 신앙길을 가는 초심자들이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맨 처음 신앙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계시라든가 환상이라든가 혹은 몽시라든가 암시로써 가르쳐 주는 것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즉각적으로 그 누구한테든지 이야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가 가만히 볼 때 그것이 자기의 일생에 대한 문제가 된다고 하면 못 해도 3년 이상의 기간을 실천하고 나서 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가르쳐 준 그 뜻이 이루어지겠느냐, 인 이루어지겠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에 그 가르쳐 준 계시라든가 몽시라든가 하는 것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3일이라고 했던 내용이 3개월 만에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요 혹은 3년 만에 나타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 3개월이나 3년은 두고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기간에 지나기 전에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책임 없이 말하게 되면 기운이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면 그 말씀을 믿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에 명문가에서는 자식을 교육시킬 때 아침에는 될 수 있는 대로 함부로 말을 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아침에는 될 수 있는 대로 먼저 말하지 말고 들으라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신앙생활에서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040-076 소명을 받아 가지고 뜻의 길을 가는 사람이 생각해야 될 것은 언제든지 정성을 들이면서 뜻의 목적을 찾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찾기 위해 노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040-078 내가 흥남 감옥에 있을 때 그때는 내 일생에 있어서 중요한 시련기였다고 할까, 최후의 판결을 해야 할 그런 때였습니다. 그때에는 누가 무엇을 한다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때에는 12시간 이상 17시간까지 일할 때가 있습니다. 밥을 먹는 시간만 빼놓고는 하루 종일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영계에서 힘을 전부 빼 가는 것입니다. 신앙에 대한 모든 의식과 관념까지도 몽땅 빼 가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마음까지 없어집니다. 마음이란 것이 생각조차 안 날 만큼 빼 간다는 것입니다. 순전히 몸만 남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옆사람이 얘기하는 것을 다 듣지만 대답할 기력이 없습니다. 그런 경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경지를 어떻게 극복하고 원상으로 회복하여 넘어가느냐? 그것은 다른 사람이 대신 회복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고빗길을 연장시킬 때는 누구의 힘을 빌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이겨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힘을 어떻게 보충하느냐? 그 자리에서 절대 보충하지 못합니다. 그럴 때는 과거를 회상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까지 이러한 신앙길을 걸어오는 동안 하나님께서 나 하나를 이렇게 인도하셨셨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나름의 체험이라든가 역사 과정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사연들을 생각하면서 그때 느꼈던 감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감정을 어떻게 회복시키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언젠가 남이 모르는 것을 탐구하기 위해선 몸부림치며 기도하던 때에 하나님께서 해결점을 가르쳐 주셔서 기뻐하던 기억을 떠올리든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는 현재의 시점에 있지만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옛날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040-080 이런 문제들을 생각할 때 신앙길을 간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너 무엇을 하라" 하는 소명은 누구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소명을 따라간다는 것은 무척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뒤에서 가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앞서서 가십니다. 얼마나 바쁘게 가시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보조를 맞추지 못하리만큼 앞서서 가신다는 것입니다.  

 

* 이러한 문제들을 볼 때 소명을 받아 가지고 뜻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초조한 마음으로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과 내가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상대적인 관계를 중심 삼고 조정해 나가면서 자기 위치를 찾아 가지고 그때를 맞추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를 적절히 포착해 가지고 행동을 개시하기는 심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틀림없다고 할 때 행동하는 데 있어서 뒤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기회가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총 매진하여 돌진해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때야말로 있는 정성을 다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040-082 우리 집에 온 손님을 푸대접하는 것은 도의 세계에 있어서는 마이너스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디에 가서도 위신을 세울 수 없습니다. 집에 온 손님을 대할 때는 반드시 그 사람의 기준을 알아 가지고 그 기준을 중심 삼고 거기에 내 성심을 다해 가지고 그 사람을 대하게 되면 그 사람이 정성 들인 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내가 세워야 할 조건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040-085 도의 세계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 가지고는 연결이 안 됩니다. 그런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정성과 의리와 참을 통해서 접붙여야 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소명을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소명을 따라가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소명을 따라가는 것도 어렵겠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충효의 도리를 다한다는 것은 더욱더 어렵습니다.

 

040-098 소명의 길을 따라 나오는 데는 내적인 투쟁이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내적인 투쟁을 가려가는 것은 책임자가 잘하지 않고서는 안 됩니다. 책임자가 잘 못하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책임자가 잘못하면 큰 문제가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輕擧妄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보더라도 지나치게 기뻐하지 말고 나쁜 것을 보더라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자기 마음의 자세를 바로잡아 가지고 正否를 가려가면서 조심스럽게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절대로 선두에 서지 않아야 합니다. 일을 해 나가더라도 1차 2차 3차 작전을 펴 가지고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 이와 같은 입장에서 작전을 해 나가게 되면 선생님이 직접 나서지 않습니다. 반드시 식구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문제는 식구를 통해 예고시켜 가지고 그 일을 실천하는데 명령은 내가 하지 않고 식구를 시켜서 명령합니다.

 

이렇게 해 가지고 만일 그 일이 잘못되었다 하게 될 때는 누가 책임지느냐? 선생님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 대신 식구가 잘못될 때 그 식구의 잘못을 선생님이 지도할 책임은 있습니다. 일을 실패해 가지고 선생님에게 보고하게 될 때는 내가 끌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가 그런 작전을 해 나온 것입니다. 선생님이 선두에 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전체의 안전 작전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입니다.

 

* 책임자가 직접 선두에 서게 되면 모든 것이 정면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040-101 여러분들도 이런 경험을 해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벌써 누구라는 감이 들어옵니다. 선생님을 싫어하는 사람은 싫은 감이 들어오고 좋아하는 사람은 좋은 감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들어온 것은 선조의 공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아무나 못 들어오는 곳입니다. 또 선생님이 아무나 만나 주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아무나 만나는 것을 꺼려 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러한 때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들어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소명을 받고 따라가기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교회에 와서 이렇게 모인다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한 나라의 국민에게는 나라를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듯이 여러분에게도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데는 반드시 나라 앞에 새로운 실적이 있어야 됩니다. 사랑은 반드시 상대적인 실적의 조건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사위기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이라도 갖다 주려고 합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그냥 가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갖다 주려고 하느냐? 무엇이든지 주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결부되는 것입니다. 창조 목적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으면 반드시 번식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으면 반드시 번식이 벌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창조의 결과를 가져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를 가져오면 너도 좋고 나도 좋다는 것입니다.

 

* 이것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과 나와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040-105 선과 악은 두 갈래 길이 어디서부터 벌어지느냐? 마음과 몸에서부터 벌어지는 것입니다. 즉 내 자체에 있어서 몸과 마음의 둘 갈래 길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몸을 따라가는 것은 악이요 마음을 따라가는 것은 선입니다.

 

* 선을 위해서 끝까지 나가는 사람은 아무리 고독 단신이 되려 하고 와서 엉기는 것이 싫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따라가서 엉기게 됩니다.

 

* 선을 위해 끝까지 희생한 사람은 반드시 중심인물이 됩니다. 중심인물뿐만 아니라 주관자가 되고 주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그 사람의 지도를 받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움은 물론 모든 것을 그 사람과 의논해 가지고 그 사람이 좋다는 대로 움직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040-107 선생님이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 어떤 사람은 아무 실적이 없지만 잘 대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선조의 공적이 있기 때문에 잘 대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고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이 誤解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처음 들어왔는데 선생님이 잘 대해 주신다"고 하면서 반대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이 틀린 것이냐? 틀린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사람 보는 눈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자기가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은 예약적인 주관입니다. 아담 해와에게 만물을 주관하라고 하신 것도 예약적인 주관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약적인 주관권내에서 실질적인 주관권내로 들어가려면 탕감의 노정을 거쳐야 됩니다. 피어린 투쟁을 통하여 그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길에는 용서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반드시 선한 길을 통해서 가야 됩니다. 이러한 문제가 벌어지는 것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 내가 유 협회장한테도 얘기했지만 선생님이 지금까지 밤을 새워 가면서 사람을 대하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좋아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을 싫어해 가지고는 복귀 역사를 책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도 좋아해야 하고 선한 사람도 좋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왜 모든 사람을 좋아해야 하느냐 하면 모든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타락은 하나님 세계에서 반대되는 자리로 떨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계를 나쁘다고 하는 자리로 떨어진 것이 타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리는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도 이 세계가 나쁘다고 하게 된다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복귀 역사를 못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좋다고 하시면서 지으신 세계인데 타락해서 이 세상이 나쁘다고 하는 입장으로 내려오시게 된다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일도 좋게 대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나쁜 일도 좋게 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뭐냐 하면 원수가 없는 자리에 서라는 말입니다. 원수가 없는 자리에 서라고 하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타락권을 맞이하지 않은 본연의 세계, 본연의 자리로 돌아간 상태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중심 삼고 싸우는 것입니다. 전부가 그렇게 되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맨 처음 사람을 대할 때에는 나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쁘게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감옥에 들어가서도 참 좋은 체험을 했다고 봅니다. 사형수들과 한 방에서 자기도 했습니다. 세상에서 보기에는 그 사람들은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안 그래요? 세상에서 보게 되면 얼마나 무서운 사람들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사형수를 대해 가지고 어떻게 보느냐? 사형수로 보느냐 아니면 한 방에 있을 때는 한 형제로 보느냐? 내가 먹던 밥을 같이 나눠 먹고 그가 먹던 밥도 내가 같이 먹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040-109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여러분은 될 수 있으면 신앙 노정에서 傷心하지 않아야 합니다. 傷心하게 되면 損害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傷心하게 되면 아무리 꿈이 크고 좋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멀리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여러분은 소명받고 가는 데 있어서 잼대를 가지고 전후좌우를 가려 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겠으면 여러분들은 언제나 기도하며 정성 들여 가지고 나가야 됩니다. 진실되고 겸손한 자리에서 "나를 이끌어 주시옵소서." 하게 되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하면서 전체를 모시며 나가는 자리에는 발전이 있으면 있지 타락은 없는 것입니다.

 

*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의 결과에 대해서 3번까지는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3번까지는 다시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쫓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나올래야 나올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그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통일교인 가운데 오래된 사람들이 병이 난다든가 혹은 다른 어떤 문제에 부딪히는 것을 보게 될 때 "저 사람은 저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선생님 쓱 보면 느낄 수 있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말을 해 보면 자기가 지금까지 통일교회를 위해서 희생했는데 뭐 어떻고 어떻고 하면서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자기의 재산 다 팔아먹은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뒤집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하고 원망하는 조로 나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직접적으로 탕감하지 못하면 반드시 그의 아들딸에게서 탕감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탕감이 없으면 아들딸들에게 개구쟁이로 태어나 가지고 자기 속을 태우는 일이 벌어집니다. 반드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에 대한 타격이라든가 그다음엔 심정을 중심 삼고 남편이나 아들딸에 대한 문제가 계획대로 되지 않고 다 틀어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못 받게 될 때는 자기 몸에 대한 문제가 오는 것입니다. 복귀 역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 탕감복귀 원칙에는 용서가 없는 것입니다. 어렵게 산다고 해서 그것을 붙들고 암만 바둥바둥거려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 "이 이상 더 어렵게 살더라도 뜻을 위해서 살겠다." 하는 마음으로 나가게 되면 그것을 뚫고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고 그러한 문제를 중심 삼고 해결하려고 하다가는 그 문제에 붙들려 뜻도 다 놓쳐 버리게 되고 자기 선조들이 쌓아 놓은 공적까지도 전부 다 팔아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 만약에 내가 어떤 사람을 대해서 열만큼 책망을 했다 할 때는 그 사람에게 3배 이상의 축복을 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을 하지 않고 자기 신앙의 위치를 유지해 나간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것을 볼 때 신앙생활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생활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 기도 중에.

 

040-111 사랑하는 아버님, 한 많은 복귀 노정의 앞을 가로막는 사건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가를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와 같은 장면을 대하실 적마다 얼마나 외로우셨으며, 저희들이 이 고비를 넘어 주기를 얼마나 간곡히 바라셨사옵니까?

 

당신의 뜻을 따라 나오던 수많은 인간들이 수많은 고빗길에서 그걸 넘기를 바라시는 당신의 渴望에도 불구하고 넘지 못하고 스스로 흘러가 버린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사람들이 제아무리 모든 것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욕망을 중심 삼은 것이라면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언제나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를 아버지 앞에 바치고 또 바치면서 내일의 소원 앞에 제물의 자리를 끌고 나가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