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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전통

한국의 성지 - 문경새재

◑ 문경새재

● 주 소 :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새재로 932(상초리 288-1) 문경새재 도립공원 |

● 문 의 : 황성수 문경교회장 010-2538-7061 | 김상권 전도소장 010-6409-6708

 

《차량 이용 시》

● 서울에서 출발(1시간 40분 소요) 중부고속도로 → 호법분기점 → 영동고속도로 → 여주분기점 → 중부내륙고속도로 → 문경새재 IC → 문경새재 도립공원

● 부산·대구에서 출발(대구 1시간 20분 소요) 경부고속도로 → 김천분기점 → 중부내륙고속도로 → 문경새재 IC → 문경새재도립공원

● 대전에서 출발(2시간 소요) 경부고속도로 → 남이분기점 → 중부고속도로 → 증평 IC → 국도34번 → 괴산 → 연풍 → 이화령터널 → 문경새재도립공원

● 광주에서 출발(4시간 소요) 88고속도로 → 경부고속도로 → 김천분기점 → 중부내륙고속도로 → 문경새재 I.C → 문경새재도립공원 

 

참아버님 남하 노정 흥남감옥에서 해방되신 참아버님은 1950년 12월 4일 평양을 출발하여 임진강을 건너 서울, 원주를 거쳐 문경으로 남하하셨다. 하반신 골절의 옥중 제자 박정화 씨를 자전거에 태우고 김원필 선생과 함께 문경새재를 넘으셨다.

 

* 김원필 선생 증언 (증언 제1권, 성화사)

한 번은 하루 종일 걸어서 어느 집에 들렀는데 큰 집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먼저 와서 밥을 지어먹고 자고 있었다. 그때 우리도 그 집에서 밥을 지어먹고 자고 있었다. 밥을 먹고 나니 밤 11시가 되어서 피곤하여 쏟아지는 잠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께 여기서 자고 가자고 졸랐다.

 

대개는 선생님께서 쉬어 가시는데 그날은 “가야지.”라고 하셨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여기서 쉬어 가지고 자꾸 졸랐다. 세 번씩이나 간청했지만 선생님께서 좀처럼 대답을 안 하시고 자꾸 가자고 하셨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선생님을 따라서 아주 추운 밤에 걸어서 1시경에 길가에 있는 집에 들러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일찍 떠났다.

 

얼마 가지 않아서 큰 강이 하나 있는데 아침에 날씨가 추우니까 꽁꽁 얼어 있어서 박정화 씨를 자전거에 태우고 얼음 위를 걸어가게 되었다.

 

공중에서는 많은 비행기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포성이 울리고 기총사격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중공군이 가까이 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강 건너 저쪽에는 유엔군이 피난 오는 사람들을 다 중단시키고 최후의 전선을 지키기 위한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때에 비로소 선생님께서 어젯밤에 거기서 쉬지 않고 가야 된다고 하신 말씀의 뜻을 알게 되었다. 내가 선생님의 말씀을 두렵게 생각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p.123-125, 김영사)

12월 2일 밤 남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피난민 무리의 삼십 리쯤 뒤를 김원필을 비롯한 우리 식구들이 따라가는 꼴이었습니다. 제대로 걷지 못하는 식구까지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그는 흥남 감옥에서부터 나를 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감옥을 먼저 나온 그를 찾아가 보니 식구들은 모두 피난을 가 버렸고 다리가 부러진 그만 빈집에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다리를 쓰지 못하는 그를 자전거에 태워 데려갔습니다. 변변한 군사도로는 모두 인민군들이 차지한 뒤라 얼어붙은 논바닥 위를 걷고 걸어 피난길을 재촉했습니다.

 

뒤에서는 중공군이 바짝 뒤를 쫓고 있는 데다 걷지도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험한 논길로 가려니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길이 너무 나빠 절반은 그를 등에 업고 빈 자전거를 끌며 내려왔습니다.

 

나에게 짐이 되는 것이 싫다며 도중에 몇 번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그를 달래기도 하고 호통도 치며 끝까지 함께 했습니다. 아무리 쫓겨가는 피난길이지만 밥은 먹어야 했습니다. 피난민들이 허둥지둥 버려두고 간 집으로 들어가 쌀독, 쌀독 노래를 부르며 찾아다녔습니다. 쌀이나 보리, 감자를 있는 대로 찾아내서 끓여 먹으며 간신히 연명했습니다.

 

밥그릇은 고사하고 수저도 없어서 나뭇가지를 잘라 젓가락 대신 해도 밥은 술술 잘 넘어갔습니다. 궁상이 상팔자라지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 먹지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보리개떡 하나도 상감마마의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맛있었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나는 항상 먼저 숟가락을 놓았습니다. 그래야 남들이 한 숟가락이라도 마음 편히 더 먹을 수 있으니까요. 38선으로 남북이 갈라진 지점에 막 도착했을 때는 한 발은 남한, 다른 한 발은 북한에 딛고 기도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이렇게 떠밀려 내려가지만 곧 다시 올라오겠습니다. 반드시 자유세계의 힘을 모아 북한을 해방하고 남북을 통일하겠습니다." 피난민들에 뒤섞여 걸어가는 내내 그렇게 기도를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