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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전통

한국의 성지 - 계룡 갑사

◑ 계룡 갑사

● 주 소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번지

 문 의 : 공주교회 041-855-5539 | 장원석 교회장 010-7731-0359

 

《차량 이용 시》

● 서울에서 출발 경부고속도로 → 천안논산고속도로 → 정안 IC → 23번 국도 → 갑사 방면 진입 → 계룡면 사무소 → 계룡저수지 → 갑사

● 부산에서 출발 경부고속도로 → 호남고속도로 → 유성 IC → 32번 국도 → 박정자 삼거리 → 마티터널 → 과학고등학교 지나 우측진입 → 청벽교차로 다리 아래 통과 → 갑사 방면 진입 → 갑사

● 광주, 호남 방면에서 출발 호남고속도로 → 논산 IC → 논산시내 → 23번 국도 공주방향 → 갑사 방면 진입 → 계룡저 수지 → 갑사 《대중교통 이용 시》

● 고속버스 : 서울(남부터미널, 반포·강남터미널, 동서울터미널) ↔ 공주(신·구터미널) 1시간 50분

● 시내버스 : 공주 ↔ 갑사

 

일본 선교섭리의 시발(始發) 1958년 5월 30일, 최봉춘 선교사(일본 이름 니시카와 마사루, 당시 33 세)는 참아버님으로부터 일본 선교에 대한 특명을 받고 계룡산 갑사에서 부산으로 향했다.

 

5월 29일 참아버님과 최 선교사가 묵었던 갑사의 용천각은 지금도 남아 있다. 용천각은 두 개의 방과 부엌으로 돼 있다. 정면에서 볼 때 오른쪽 방은 참아버님이, 왼쪽 방은 최 선교사가 묵었다고 전해진다. 참아버님께서는 대웅전 옆 삼성각(三聖各)에서도 정성을 들이셨다고 한다.

 

그 후 최 선교사는 부산으로 내려갔지만 밀항선이 수배되지 않아 오랜 기간 발이 묶였다. 일본행 밀항선을 탔던 날은 참아버님과 갑사에서 기념촬영을 한 지 46일이 지난 7월 15일이었다. 최 선교사가 일본 선교에 대한 결의를 밝힌 것은 1958년 5월 27일 부산 교회에서였다.

 

그때 참아버님은 “교회에 들어와서 어떤 의문도 없는가?”라고 물으셨다. 이에 최선교사는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참아버님께서는 최 선교사에게 “무엇이든지 끝까지 참고 견뎌라.”라고 말씀하시며 유효원 협회장에게 편지를 써 주셨다.

 

최 선교사는 참아버님의 편지를 들고 상경해 유 협회장님으로부터 신앙을 점검받았다. 5월 29일, 최 선교사는 최창림 씨(최용석, 36 가정), 이기석 씨(36 가정)와 참아버님이 계신 갑사로 가서 용천각에서 묵었다.

 

다음날(5월 30일) 아침 최 선교사는 참아버님을 뵙고 일본 선교에 대한 축복을 받았다. 최 선교사는 이 날의 일을 일기에 “참아버님을 뵙기 위해 산에 들어갔다. 말씀을 많이 하지는 않으셨다. 마지막에 축도를 해 주셨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최창림 형님께 부탁하여 기념사진을 찍은 뒤 인사를 드렸다. 따뜻하고 좋은 날씨였다. 솟구치는 기쁜 마음을 달래면서 산을 내려왔다. 기쁨과 희망의 결의를 하며 길을 떠났다.”라고 기록했다.

 

최 선교사는 1958년 7월 15일 부산에서 배에 올랐다. 배는 7월 17일 오전 전 1시쯤 출항했다. 일본 오쿠라항(후쿠오카현)에 입항했지만 상륙허가를 받지 못해 히로시마현의 구레로 향했다. 최 선교사는 21일 구레 해상보안부에 연행되어 히로시마 야마구치의 형무소에 수감됐다.

 

최 선교사는 송환될 것이 두려워 탈출을 결심하고 단식을 결행했다. 야마구치의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다가 4월 중순경 동경을 향해 탈출했다. 최 선교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이겨내어 1959년 10월 2일, 일본 통일교회를 창립했다. 일본 통일교회가 최초로 창립된 장소는 놀랍게도 참아버님께서 일본 유학시절 하숙하셨던 미쓰하시 씨 집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