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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강좌

신앙생활의 본질은?

◑ 신앙생활의 본질은?

 

1) 하나님의 임재점에 일치.

 

▣ 1969.1.19(일) 하늘이 임재할 수 있는 내적 자아. 전본부교회.

- 밤예배 후의 말씀.

 

022-038 선생님은 지금까지 이 뜻을 세워 나오면서 어디에 가장 중점을 두었느냐?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 즉 하나님이 임재할 수 있는 기점이 어디냐? 여기를 중심 삼아 가지고 어떻게 일체가 되느냐? 어떻게 동화되느냐? 여기에 하나님이 공인할 수 있는 일체점의 기반을 어떻게 세워 내적으로 적응시키느냐, 이런 것에 가장 중점을 두고 지금까지 싸워 나왔습니다.   

 

022-042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되는 그곳이 하나님이 임재할 수 있는 기점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 기점의 도리를 접해 가지고 일치화될 수 있느냐, 즉 동화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 삼고 싸워 나온 것입니다.

 

그곳과 일치되기 위해서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어떠한 승리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했댔자 그것은 헛수고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임재할 수 있는 임재점에 일치되기 위해서는 "내가 국가를 위해 충성만 하면 됐지···. 중심이 어떻고 임재점이 어쨌든 ···" 하는 그런 사고를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국가를 위해 충성하기 전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그 임재점에서 충성하겠다는 다짐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회를 위해서 봉사하기 전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에 들어와 가지고 봉사하여 인정을 받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의 내적인 인연이 결과인 외적 세계에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2)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 1970.3.14(토) 아버지의 목전에서. 구리시 수택리 통일산업.

- 제2회 협회 간부 수련회.

 

029-338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수고하신 것은 결국 나를 위해서 한 것이요 이제부터 가야 할 세계적인 개척 노정의 95%의 사명도 나를 위해 하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본질은 무엇이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있을 때에 그것이 하나님과 내가 타락한 인연을 넘어 하나의 인연으로 맺어질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3)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라.

 

▣ 마태복음 10장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 1971.11.4(목) 하늘이 가는 길. 전본부교회.

051-025 하나님과 더불어 가는 길은 두 길이 아니라 하나의 길입니다. 그 하나의 길은 어떠한 길일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가 찾아내려면 쉽사리 찾아낼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이 시대에 있어서 어떠한 종교보다도 하늘이라는 명제를 앞에 놓고 고생하고 수난길을 즐거이 가겠다고 나선 무리가 있다면 그게 일체 된 것이 아닐지라도 그래도 종교 가운데 제일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겠다고 뒤넘이치는 무리가 아닐 것이냐. 만일 지상에 하나님이 인연을 두고 생각할 수 있는 단체라면 그러한 곳 외에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래서 성경에도 끝까지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끝까지 참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 죽고자 하는 자가 사는 것입니다. 죽고자 하는 자만이 산다는 것입니다.

 

051-027 적병을 뒤에서 맞아 싸워야 하는 하나님의 입장인 것을 알고 "하늘이여,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내가 앞장서서 싸우겠나이다. 정면에서 나를 돌봐주시지 않더라도 저는 당신이 가시는 길을 당당코 가겠나이다. 어서 이 길을 갑시다" 하고 재촉하고 권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나에게 대드는 원수를 방어해 주고 대신 싸워 줄 수 있고 또 내가 거기에 보조를 맞추어 행동을 같이함으로 말미암아 원수 세계에서 탈피할 수 있고, 사탄의 포위망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이 데리고 가지 못해요. 

 

이렇게 볼 때에 "하늘이어,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하는 그 자체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가. 위험천만한 자리, 자기의 생명이 다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하늘이여, 나를 돌보지 마시고 당신이 가셔야 할 이 이상 심각한 자리로 어서 가시옵소서"라고 하게 된다면 그 자리는 하나님이 적진을 향하여 전진해 나가기 전에 이 무리를 끌고 가는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지리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가야 할 길 앞에는 원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조금만 방향이 틀어지면 언제든지 공격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늘이 나를 피해 주고 나를 돌보지 말고 전진하기를 바라는 것이 신앙자가 가야 할 길이요, 신앙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오늘날 기독교 교인들 혹은 목사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 전부 다 하나님에게 뭘 해 달라고 합니다. 자기 아들딸 중심 삼고 "뭐 해 주십시오." 혹은 자기 교회 중심 삼고 "뭐 해 주십시오." 그렇게 수천 년 동안 기도해 온 교단이 어찌하여 지금 와서는 무력해졌는가?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계획하는 방향권과 하나님이 전투하고 있는 전쟁 마당과는 별도의 환경에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대해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미칠 수 없고 올 수 없는 거리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 그러면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들은 어떠냐? 그런 환경에서 다시 한번 자기 자신을 중심 삼고 생각해 보게 될 때 여러분들이 어려울 때에는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찾는다구요. 무슨 문제가 생겨 가지고 자기가 수습하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 날 도와주시옵소서. 제가 이제야 진짜 깨달았습니다."라고 합니다.

 

자기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하나님과 더불어 어려움을 당했다면 거기에는 기도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그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러분이 잘못을 했으면 잘못한 것을 솔직히 고백하고 각오하라는 것입니다잘못을 했으면 잘못한 만큼 벌을 받아야 된다구요벌을 피해 가려는 자세보다 자기가 행한  대한 응보를 당연한 것으로 맞아들일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벌을 주는 데 있어서 열만큼의 벌을 줘야 하는데 사탄이 "에에 요 녀석 잘못했다."고 하면서 열 이상 혹은 백만큼의 벌을 주는 날에는 하나님이 동원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접근시킬 수 있는 길은 그 외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