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생활의 시련을 防止하는 방법.
- 하나님을 대신하여 산다.
- 사람을 사랑한다.
▣ 1971.3.21(일) 흥망의 분기점. 전본부교회.
042-253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시련이 없을 수 없습니다. 어두운 밤과 같은 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냐? 그러한 시련 굴곡이 오는 것을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방법이냐?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는 방법은 무엇이냐?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 사명과 시련
- 나무는 가지가 많을수록 그만큼 시련을 겪는다.
- 하나님이 바라는 기준이 크면 클수록 거기에 비례해 가지고 그 시련의 무대도 커지는 것이다.
- 시련은 탄식의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천운을 품을 수 있는 하나의 복된 조건
▣ 1969.10.12(일) 복귀의 전선. 전본부교회.
025-315 큰일을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어떠한 한계선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한계선을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련을 겪어야 됩니다. 나 자신을 그렇게 훈련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기준이 크면 클수록 거기에 비례해 가지고 그 시련의 무대도 커지는 것입니다.
그 시련을 이겨내게 하기 위해 십 만한 크기의 사람에게 백 만한 기준의 시련을 퍼부을 것입니다. 십 만한 자리에 백 만한 시련을 퍼붓는 것은 그것을 망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백 만한 시련을 가해서 구십구 만한 실력을 갖게 하기 위한 작전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에 여기에 퍼부어 주는 시련은 탄식의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천운을 품을 수 있는 하나의 복된 조건인 것입니다. 지내 놓고 보면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는 마지막이다" 하며 자기의 생명을 바칠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 가지고 최후의 결정을 지어 뜻하신 대로 가겠다고 결정할 때까지는 막강한 시련의 무대가 우리의 뒤를 포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땅으로 들어가느냐 아니면 하늘로 올라가느냐 하는 두 가지 방법밖에 없는 것입니다. 땅으로 들어가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땅에 들어가지 않고 도망갈 수도 있었으나 그 길보다는 하늘을 향하여 생명을 내놓고 죽는 것이 현명한 방법으로 알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큰일을 하고 싶습니까? 하나의 위대한 조상이 되고 싶습니까? 생과 사의 갈림길을 왕래하는 경지를 거쳐가지 않으면 위대하다는 말을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시련의 3종류.
1) 환경적인 시련
2) 인간적인 시련
3) 영적인 시련.
◑ 시련을 이기려면.
1) 그 시련의 기준보다 한 단계 앞서야 된다.
- 항상 한 단계를 더 위하면 한 번 실수해도 남아질 수 있다.
▣ 1962.12.17(월) 전본부교회. 전체를 대신한 개인이 돼라.
- 각 지구본부 순회 도중 서울본부.
012-108 이제 오시는 주님을 중심 삼고 국가적인 기준을 발판으로 하여 세계적인 역사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2이스라엘 즉 오늘날 세계에 있는 기독교인의 사명입니다. 이들은 하늘과 땅의 시련을 겪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의 기준을 복귀할 수 없습니다.
시련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환경적인 시련이요 둘째는 인간적인 시련이요 셋째는 영적인 시련입니다. 시련을 이기려면 그 시련의 기준보다 한 단계 앞서야 됩니다. 즉 국가적인 승리의 기준을 세우려면 세계를 걸고 이겨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의 고난의 수가 차고 기독교의 고난의 수가 차고 하나님의 고난의 수가 차면 됩니다.
오시는 주님을 중심 삼고 모이는 곳이 성경에 있는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입니다. 그때에 복 받는 사람은 고생을 겪은 사람입니다. 산에서 도를 닦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민족을 위할진대 가정을 버리고서라도 나와야 그 가정이 망하더라도 민족적인 애국자의 계열에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럴 수 있는 사람이 복 받을 사람입니다. 가정 종족 민족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는 항상 한 단계를 더 위하면 한 번 실수해도 남아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한번 기도하고 천년을 기다릴 수 있는 그렇게 정성 들인 민족이 있었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보고 내가 좋아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좋아하시게 하면 안 됩니다.
복은 어떤 것이냐? 공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을 잘못 받으면 망합니다. "원통해라. 내가 이렇게 일을 했는데!" 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복의 세계에 있어서 파탄꾼입니다.
원수를 갚아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원수를 갚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원수를 갚을 수 있겠습니다.
2) 댄버리 감옥에서 나와서 그다음에 새로운 세상을 대해 나갈 때 어디로 갈 것이냐?
- "더 고생을 해야겠다. 더 뜻을 위해서 일해야겠다"
▣ 1986.4.27(일) 새로운 우리들. 본부교회.
144-318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 자신도 댄버리에서 나오면서- , 거 감옥생활과 세상은 달라요. 어떻게 돼야 되느냐? 어떻게 되어야 되느냐 하는 문제···. 마찬가지 문제입니다. 감옥에서 나와서 그다음에 새로운 세상을 대해 나갈 때 어디로 갈 것이냐 이거예요. "아, 이거 이제 고생은 이만큼 했으니 ···. 아무리 고생을 해도 그저 죽을 때까지 고생길이 훤하구만. 아이고 자기 아들딸이 제일이야. 자기 여편네가 제일이구만" 해서는 안 돼요.
그 핍박이란 것은 제2의 출전을 위한 하나의 방어요 시련이요 훈련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영광의 출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수난을 받은 자로서 수난길을 찾아가야 되겠다. 더 어려운 길을 찾아가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는 그 자리는 고착된 자리가 아니요, 화석이 되는 자리가 아닙니다. 습관화된 자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더 고생을 해야겠다. 더 뜻을 위해서 일해야겠다" 하게 될 때 감옥을 통해서도 은사의 자리에서 발전할 수 있고 그 은사의 터전에서 출동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거예요.
3) 시련에 부딪히더라도 나 혼자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부딪힌다는 것을 알아야만 될 것입니다.
▣ 1973.7.22(일) 만일 하나님이 없었더라면. 중앙수련원.
- 제4차 세계 순회 귀국 환영회.
067-276 하나님을 위하여 가는 길이기 때문에, 출발을 하나님과 더불어 했기 때문에 과정에서도 하나님과 더불어 가야 됩니다. 그 종착점도 하나님과 더불어 맞이해야 된다는 것이 필연적 운명인 것입니다.
* 시련에 부딪히더라도 나 혼자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부딪힌다는 것을 알아야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노정을 알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싸워 온 것입니다.
때로는 개인적으로 몰리고 가정적으로 몰리고 사회적으로 몰리고 종족적으로 몰리고 종파적으로 몰리는 자리에 있었지만 그때마다 문이라는 사람 혼자서 몰린다고 생각했다면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까지 남아져 싸워 온 것은 하늘이 있기 때문에, 내가 필연적인 하늘의 운명길을 따라나선 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저버리기 전에 내가 하나님을 저버릴 수 없다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067-317 여가서 여러분은 떨어지더라도 선생님은 가는 거라구요. 여러분은 뒤에서 불평을 하고 불만을 품더라도 선생님은 불평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구요. 여러분과 선생님을 비교하면 불평을 해도 내가 더 많이 할 수 있고 하나님을 배반해도 내가 더 많이 배반할 수 있는 길을 거쳐 왔지 따라오는 여러분이 더 하겠느냐 이거예요.
아직까지 선생님이 가는 갈 앞에는 시련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길을 자처하여 가면서 시련을 만나면 희망을 가지고 내일의 개척자의 사명을 하겠다고 다시 다짐하는 거예요.
이런 것을 보는 여러분이 현재의 입장에서 주저하고 현재의 입장에서 자기를 중심 삼고 신음해서 되겠어요? 그것이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뜻을 대한 자로서 처하여야 할 태도이겠느냐 이거예요. 죽어도 죽어도 그럴 수 없다 이거예요. 여러분이 그걸 알아야 되겠어요.
쓰러지더라도 배밀이를 하면서 전진해야 되겠고 땅에 얼굴을 박고 쓰러지더라도 코를 세우고 눈은 저 세계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면서 죽어야 할 운명길을 다짐했던 무리가 아니었더냐.
* 누구 때문에? 선생님 때문이에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니라구요. 하나님 때문입니다. 이 억울한 것을 잘 아는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그분과 더불어 억울함을 당하고 그분과 더불어 고통을 당하고 그분과 더불어 눈물을 흘리고 그분과 더불어 참고 그분과 더불어 싸워 나가고 있어요. 그러니 그분이 해방을 받아 기쁨을 느끼는 날에는 만국의 그 누구보다도 우리가 그분을 모실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겠느냐.
067-319 멀지 않은 앞날을 놓고 주저하는 여러분이 있거들랑 다시 각성해야 되겠어요. 비판하고 싶은 입이 있거든 입을 다물고 자기 자식을 바라보아야 되겠어요. 처자를 바라보아야 되겠어요. 자기 친척을 바라보아야 되겠어요.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수많은 치욕과 수많은 말을 남기고 수많은 비참한 길을 걸어왔던 그것이 원통하지도 않으냐 이거예요. 그렇게 철부지하고 그렇게 무골충의 사나이로 쓰러지는 여러분이라고 나는 생각지 않는다구요.
4) 강하고 담대하지 못해서 나가지 못하는 날에는 거기서 후퇴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참 이상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길을 갖고 비로소 출발했기 때문에 우리 앞에 아무리 시련이 있더라도 시련을 중심 삼고 격파하고 나가는 날에는 반드시 승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 골리앗과 싸운 다윗과 같이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적으로 치는 것입니다.
▣ 1978.10.22(일) 가정교회 활동에 대하여. 중앙수련원.
- 777가정 축복 8주년 총회.
100-284 그러나 통일교회 시대에 와 가지고 세계를 넘고 공산권을 넘을 수 있는 하나님의 참 이상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길을 갖고 비로소 출발했기 때문에 우리 앞에 아무리 시련이 있더라도 시련을 중심 삼고 격파하고 나가는 날에는 반드시 승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만일에 강하고 담대하지 못해서 나가지 못하는 날에는 거기서 후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 같은 데서 프레이저 의원과 싸우게 될 때 선생님이 우물쭈물해 가지고 "후퇴다. 아이고, 세계를 지배하는 그 나라하고 어떻게 부딪치느냐" 이렇게 졸장부같이 했다간 전부 다 하나님의 뜻을 못 이루고 완전히 쓸려 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골리앗과 싸운 다윗과 같이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적으로 치는 것입니다. 날아가는 포탄과 같이, 날아가는 화살과 같이 가서 심장부를 뚫고 나간다는 그런 결의에서 "네가 뚫리지 내가 뚫리지 않는다" 이겁니다. 이러한 싸움을 했기 때문에 미국이 뚤어졌다구요. 알겠어요?
5) "환경을 이겨 가자"
- 시련이 있으면 반드시 시련에 대비되는 복이 찾아오는 거라구요.
▣ 1973.5.25(금) 환경을 살펴 가자. 벨베디아.
067-100 아까 말한 "환경을 이겨 가자"라는 이런 제목을 두고 볼 때에 우리는 언제나 위험에 처해 있다는 거예요. 언제나 위험에 처해 있는 거라구요.
* 그러니까 모든 문제를 의심하지 말라는 거예요. 파하려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정면으로 도전해라 이거예요. 높은 산이 있으면 반드시 골짜기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련이 있으면 반드시 시련에 대비되는 복이 찾아오는 거라구요. 하나님이, 선이 찾아오는 거예요. 겨울이 지나가면, 겨울의 고개를 넘으면 봄은 찾아온다는 거라구요. 마찬가지라구요.
6)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완전한 제물이 될 수 있게 보강하기 위한 하늘의 자극이다. 하늘의 시련이다"
▣ 1973.5.16(수) 생활규범과 지도자의 책임. 벨베디아.
066-303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기분 나쁜 날,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완전한 제물이 될 수 있게 보강하기 위한 하늘의 자극이다. 하늘의 시련이다" 이렇게 생각하라구요.
7) 목적관이 투철해야 된다.
▣ 1971.4.18(일) 시련과 성장. 구리시 교문동 통일동산.
- 부활절 기념 서울 지구 합동 야외예배.
- 예배 후 식목 행사.
043-045 예를 들어 하나님의 뜻이 경부고속도로를 닦는 일과 같다면 우리는 이제 착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많은 수난 노정이 남아 있습니다.
* 그렇지만 동원된 사람은 목표를 위하여 가는 형편이 다르고 내용이 다르더라도 그 목표인 부산에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것을 극복하여 부산에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뜻의 이념에 일치될 수 있는 목적관이 투철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관과 자기 현재의 환경이 부딪치게 될 때 목적관이 깨져 나가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일신의 생활 무대가 깨지면 깨졌지 부딪쳐 오는 시련이 깨지면 깨졌지 목적관이 깨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시작하지 않았던 것보다 못한 일이 되고 맙니다.
* 시련 노정을 거쳐 가야 할 복귀의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것이 크면 클수록 거기에는 비례하는 수난의 환경이 부딪쳐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고 사방에서 몰아칠 것입니다. 부딪쳐서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운명길이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죽도라도 이 뜻만은 남기고 가야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유언이라도 하고 가야 하는 고빗길이 많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ㄱ.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유리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 광야에서 시련받던 이상의 시련이 있다는 각오와 그 이상의 희생을 하겠다는 결의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 1965.10.30(토) 조국. 대구교회.
- 제1차 세계 순회 후 전국 지구 본부 순회.
155-223 우리가 살 수 있는 조국은 아직까지 영원한 곳에 있고 우리가 가야 할 목적 기준은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과정을 어떻게 가야 되느냐? 탕감이라는 희생의 조건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갈 수 없습니다.
*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유리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가나안 복지 창국을 위해서는 광야에서 시련받던 이상의 시련이 있다는 각오와 그 이상의 희생을 하겠다는 결의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뒤를 보았습니다. 뒤를 보다가는 다 망해요. 뒤를 보다가 망하게 되면 그 땅을 하나님이 다시 간섭할 수 없다는 거예요.
8) 언제나 조심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자리에서 정성을 들여야 한다.
9) 실패로 나타날 수 있는 환경이 가로놓인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필사적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다.
10) 다가오는 시련에 비해 내적인 결의를 할 수 있는 자체의 능력이 크면 된다.
11) 주체적인 입장에 서야 한다.
12) 언제나 하나님과 일치된 태도를 취해야 한다.
13)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인간을 통하여 의논하는 것보다도 하나님과 의논하고 싶어 해야 한다.
▣ 1970.5.24(일) 남은 때. 전본부교회.
031-151 앞으로 다가올 시련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런 시련이 언제 올지 모를 때에는 언제나 조심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자리에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런 생활을 계속하여 다가오는 시련의 고비를 넘길 수 있는 힘을 보강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앙생활하는 사람의 목적은 개인이 승리하는 데 있기보다 세계가 목적이기 때문에 그 크나큰 목적을 바라보고 가는 길에서 그 세계의 한계점까지 가기 위한 신앙인의 행로는 고달픈 수난의 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각자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길은 수많은 인간들의 결심이 실패로 나타날 수 있는 환경이 가로놓인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필사적으로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이 길은 어려운 시련의 노정이요 비참한 노정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비결은 무엇이냐? 다가오는 시련에 비해 내적인 결의를 할 수 있는 자체의 능력이 크면 됩니다. 즉 외적인 시련의 고비를 대처할 힘을 창조해 낼 수 있는 주체적인 입장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힘을 보강할 수 없는 입장에서 신앙길을 가는 사람이라면 그는 언제나 하나님과 일치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내가 가는 이 시련의 노정은 나만 가야 할 노정이 아니라 하나님도 필히 가야 할 노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통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연고로 나라는 사람을 세워서 가야 하는 것이요 내가 아니면 다른 누구를 통해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여기서 수많은 사람들을 대표해서 정성을 들이고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라고 하며 있는 정성을 다 들여 호소하는 그 자리에 서야만 하나님과 인연을 맺을 수 있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자기 환경에 없었던 새로운 힘을 보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자의 생활인 것입니다.
* 그러므로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인간을 통하여 의논하는 것보다도 하나님과 의논하고 싶어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개인과 자기의 사정을 털어놓고 의논하는 것보다 하나님과 더불어 그 사정을 토로하고 의논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가치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런 체험이 없어 가지고는 어려운 사명을 감당해 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역사를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4) 이것이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무엇이 빼앗아 가지 못해요.
▣ 1978.2.12(일) 뜻과 감사. 맨해튼 센터.
- 참부모님 탄신일.
096-268 오색인종의 여러분이 레버런 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여기에 모였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누가 만들었어요? 누가 이렇게 만들었느냐? 레버런 문이 한 게 아니라고요. 하나님의 뜻이 이렇게 만들었고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만들었어요.
* 세계가 반대하고 이 나라가 반대하더라도 이것을 아는 우리들은 이 뜻을 성사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감사하면서 끝까지 가야 하는 거예요. 이것이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무엇이 빼앗아 가지 못해요. 내 앞에 다가오는 시련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이 시련을 극복하고 가야 되겠습니다.
이 세계에 이 이상 가치 없는 것으로부터 일시에 침해를 받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내 생명을 투입해서라고 방어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투이해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을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 1972.10.1(일) 우리의 목적. 전본부교회.
063-021 단지 통일교회를 하나 믿는 조건으로 말미암아 개인이 시련을 당해 왔습니다. 가정이 시련을 당해 왔습니다. 교회 전체가 시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때문에 시련을 받았음과 동시에 시련을 당하게도 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없었으면 좋겠는데 통일교회가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기성교회에 문제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이거예요. 좋든 싫든 간에 앞으로는 연구를 하지 않으면 안 될 단계로 들어온다 이거예요.
* 그러면 반대하는 사람하고 반대받는 사람 중에서 누가 더 가치 있는 자리에 섰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반대가 극하면 극할수록 그 반대를 물리치고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가는 길이 참된 길이라면 반대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 사람의 가치가 작아지느냐? 반대인 것입니다. 환경적으로 반대하면 반대할수록 반대받는 사람이 도리어 나쁜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받는 그 자리가 참이면 참일수록 반대하는 환경이 모질면 모질수록 그 길을 달리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가치가 진해지는 것입니다.
15) 크게 성공하려면 그 성공에 비례하는 시련이 따르는 것이다.
▣ 1969.12.14(일) 작금의 우리의 가치. 전본부교회.
027-180 사람이 크게 성공하려면 그 성공에 비례하는 시련이 따르는 것입니다.
16) 자신의 능력에 비례해서 큰 시련이 오게 되는 것이다.
▣ 1970.2.8(일)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전본부교회.
028-269 그러니 여러분은 미래에 다가오는 시련을 앞에 놓고 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때를 위해서 힘을 축적해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에 비례해서 큰 시련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피해서 가게 되면 결과만 나쁘게 벌어지는 것입니다. 공 없이는 선이 찾아지지 않습니다. 공과 비례되는 가치로서의 선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수고는 안 하고 좋은 결과만 바라서는 안 됩니다.
17) 어떻게 뜻을 중심 삼고 소화시킬 것이냐?
▣ 1970.3.29(일) 하늘 편의 내적 슬픔. 구리시 수택리 통일산업.
- 제3회 협회 간부 수련회.
030-261 시련이 닥치고 가중된 십자가의 죽음길에 부딪친다 하더라도 낙망하고 탄식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뜻을 중심 삼고 소화시킬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승리의 귀결점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18) 망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망하느냐?
- 망하는 사람은 선이면 선, 흥할 수 있는 길이면 그 길을 중심 삼고 가다가 시련과 고통에 부딪치게 될 때 그것을 완전히 포기해 버리는 사람입니다.
▣ 1971.3.21(일) 전본부교회. 흥망의 분기점.
042-247 예를 들어보면 춘하추동 이 사계절이 돌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봄이 지나가면 여름이 오는 것이요 여름이 지나가면 가을이 오는 것이요 가을이 지나가면 겨울이 오는 것이요 겨울이 지나가면 다시 봄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때 생명을 지닌 씨라든가 생명을 지닌 풀이라면 다시 봄을 맞이하게 될 때에 그들은 지나간 봄보다도 크고 굵어진 자태로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이와 같이 뜻길을 가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을이 되었다 하여 완전히 죽어지는 입장에 서게 되면 그것으로써 끝나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을이 되어 외적으로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런 환경에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내심에 집약된 생명력을 스스로 지녀 가지고 외적인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준비태세를 갖추었다면 그 나무는 다시 봄이 될 때 그 생명력으로 천지 앞에 새롭게 드러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날 때는 작년보다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새로운 하나의 연륜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하나의 까풀이 생겨서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확고한 방비의 기반이 닦아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련이라는 것은 인생행로에 있어서 혹은 뜻길을 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행복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태어나는 그날부터 죽는 그날까지 행복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굴곡이 있다는 것입니다.
042-249 그러면 여기에서 흥망의 분기점에 대해서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망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망하느냐? 망하는 사람은 선이면 선, 흥할 수 있는 길이면 그 길을 중심 삼고 가다가 시련과 고통에 부딪치게 될 때 그것을 완전히 포기해 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것으로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것을 귀한 것으로 알고 소원으로 삼고 목표로 삼고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시련과 고통에 부딪치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내정적인 집약점을 결집시켜 가지고 그 터 위에 출발을 다짐할 수 있는 스스로의 준비 태세를 갖춘 사람 앞에는 망하는 길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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